11. 에필로그
젊은 날,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검은 악어 <2002년 안젤라 센>
검은 악어를..
나는
보았다.
아지랭이 처럼 피어나는 음악이
리듬과 멜로디로 증류하는 틈새에서
새까만 거짓말과 자기 혐오가 거품을 뿜어대는 늪에서
검은 악어를 보았다.
그를 마주 친 이후
나는 나를,
분실했다.
이슬을 맞으며 꽃가루를 떨구는 나비처럼
우는 얼굴에 속눈썹이 떨어진다.
나를 두고온 그 곳은
과잉 감정과 피해의식,
소통의 부재가 충만한 환각의 모자이크.
그들이 잠자는 오래된 교회는 태풍의 장막으로 격리되어 있다.
떨어져 나간 모자이크의 빛이 마찰하는 소리.
파티! 파티!
나는 그곳에 가야해.
그 빛의 중심에 늪이 있지요.
오늘도 나는 검은 악어의 그림자를 입고
쓰고
신고
듣고
뿌리고
밟고
걸치고
도망치듯 거울 속을 빠져 나오는 나를 보았다.
입을 벌린채 따라오는 악어의 그림자를 보는것을 나는 싫어한다.
그리고 아직도 그것을 싫어하는 나의 열정을 나는 싫어 한다.
'불'과 '키스'에
'검은 악어향'을 태운 칵테일과
악의 꽃이라는 샐러드에,
데카당스한 프렌치 드레싱을 얹어
물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으며 ,
단지 훈훈하면서 쿨한 감정의 여지를 남겨달라는
다소 까다로운 주문을 해두고
화장을 고친 후 서둘러 핸드백을 정리한다.
런던은 중독이다.
달아나듯 서울로 갔다.
서울로 가서는 한국을 떠났다.한국을 떠나 런던으로 가서 나는 또 다른 도피를 꿈꾸곤 했다. 젊은 날 내가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런던은 중독이다.
화려하고 위험하다.우울하고 아름답다. 두렵지만 짜릿하다. 그런 런던을 사랑하고 증오했지만, 이제는 괜찮다. 마치 피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습처럼, 더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받아들이면 편안해 진다. 싸우려 하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젊은 날의 열병을 견디고 나이를먹는 것이란, 이렇게 편안할 수도 있다. 많은 것들이 괜찮아 지기 때문이다.
런던의 마약 중독 센터에서, 나는 매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환자를 보았다. 그들 또한 도망칠 곳은 더이상 없다. 막다른 곳에서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편리한 방식으로 마약에 기대지만 잠깐의 유체 이탈후에 다시 돌아오는 곳은 킹스 크로스 뒷골목, 지린내가 나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눈을 뜬다. 깨어나면 냅다 달린다. 자신으로부터 계속 도망친다.
그렇다면 잠깐의 방황은 허락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돌아갈 곳은 나 자신이다.
전쟁과 재난, 그리고 지독한 가난에 의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선택으로 런던에 오게 된 이민자들은 무언가 공유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나고 자란 곳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으면 잊혀지지 않을, 깊은 상흔 하나 쯤은 가슴에 남아 있다. 이렇게 런던에 오게된 '자발적 이민자'들은 어떤 감정적 단계를 거치게 된다.
자발적 이민의 1단계는 바로 환상과 희망이다.
마치 여행을 온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재미있다. 상처받은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면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될 것만 같다. 하지만 신혼기의 단맛이 떨어질 때 즈음이면 곧 2단계인 외로움과 회의가 찾아온다.
심리적 2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은 다시 애국자가 되기도 한다. 타지 생활에 마음이 허할대로 허해지고 그 사회의 모순과 단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소위 콩 깎지가 벗겨지는 것이다. 환상과 희망을 품고 떠난 신세계가 삶의 터전과 현실이 되면 결코 호락호락 하지 않다. 낯선 땅에서 느끼는 지독한 외로움은 마치 공기와도 같아서 극복할 성질의 것이 못된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영구적인 귀환을 딱히 희망 하지도 않는다. 한국 생활이 현실이 되면 다시 한국을 떠난 이유를 절감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유랑 생활을 반복하거나 애증의 양 극단을 오락가락 하는 상태에서 어딘가를 단지 그리워 하는 상태로 정체되기도 한다.
떠난 자의 특권은 그리워 할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떠난 이유가 명백하면서도 새로운 현실이 버거울 때에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모국 또는 고향이라는 인위적인 이상향에 기댄다.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다. 이미 강산이 변해버려, 내 기억 속의 고향은 이미 사라졌다 해도 머나먼 고향의 이미지는 시간이 흐르며 기억에 의해 포장된다. 그리고 점차 이상적인 모습으로 탈바꿈 한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서 꼬깃꼬깃 접어 놓은 손톱만한 크랙 코카인을 태우는 것처럼,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고향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꺼내어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그리움에 도취되어 피하고 싶은 현실을 잊는 것이다. 그렇게 머무른 자는 떠남을 갈망하고 떠난 자는 귀환을 갈망한다. 여기, 이 순간에 두발을 붙이지 못한 채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갈애하며 살아간다.
혼란의 2 단계를 거치고 3 단계로 진전하는 행운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적응과 수용의 단계이다. 어디를 간들 장단점이 있음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혹은 양쪽 사회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타협하기도 한다.
내가 돌아갈 곳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가는 곳이 나의 고향이다. 늘 기다려 주고 함께 해 주는 사람은 이미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잠깐의 방황은 허락해도 되지 않을까...
무엇으로부터 항상 쫒기듯 살고 있다면, 그곳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면, 돌이킬 수 있는 만큼은 방황해도 된다. 마치 소풍을 다녀오는 것처럼, 쉼표와 같은 것이다.
나는 이제 런던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기로 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지나가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그 곳이 내가 속한 곳이다.
런던은 기차역과 같다.
임시로 머무는 모래알 같은 이방인의 집합이다.
익명성과 여행의 자유가 주는 과장된 흥분은 무언가 붕 떠있는 느낌을 준다.
런던에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은 어디론가부터 와서, 또다시 어디론가 흩어진다.
하지만 런던에 남겨진 자는 만나면 곧 헤어짐을 준비해야 한다.
런던은 정답을 벗어난 이방인의 고향이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분류하는 궤도로 부터 벗어난, 삶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안식처이다. 이곳에 잠시 모여있는 이방인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내면의 비대칭을 공유한다.
나고 자란 곳에서 이방인이 되는 것보다 이방인의 고향에서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마치 삐딱한 그림을 삐딱하게 보는 것 처럼 내면의 비대칭이 멋지게 화해한다. 런던의 이방인은 그렇게 서로를 이해한다. 공감의 눈길을 짧게 교환하고 다시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그것은 뜻밖의 구원이다. 내가 나답게 살아도 괜찮다는 구원이다.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런던 살이의 연식이 꽤 되어 얼쭈 런던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거니와, 때에 따라 이 질문은 '촌스럽거나 무례하다'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영국의 날씨 만큼이나 인상을 팍 쓴 얼굴로, 한치의 망설임이나 두리번거림 없이 재촉하는 발걸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왔나요?
혹시, 아직도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이제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세계 시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