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

by 에벌띵

해가 기울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아이를 씻기다 말고 현관으로 나가니 지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간단한 간식 봉투를, 다른 손에는 아이 둘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갑자기 와서 놀라셨죠.”

지영은 늘 그렇듯 먼저 미안해했다.

“아, 어쩐 일이세요? 들어오세요.”

희수는 문을 조금 더 열어주었다. 아이들이 신발을 벗자마자 안으로 뛰어들었다.

희수가 서둘러 딸의 샤워를 마무리하는 동안, 지영은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정돈된 책장, 식탁 위의 노트북, 가지런히 접힌 빨래. 희수의 집은 늘 같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까 놀이터에서 현미 씨 만났다면서요?”

지영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지영에게 주스를 건네던 희수의 손이 아주 짧은 순간 멈칫거렸다.

“네. 잠깐 이야기했어요.”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

“요즘 그 사람이 좀 그래요. 사람 얘기를 자기 식대로 옮겨서…. 괜히 상처될 말 했을까 봐 걱정돼서요.”

희수는 잠시 지영을 바라보았다.

지영의 얼굴에는 걱정과 확신이 동시에 떠 있었다.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사람처럼.

“저한테는,”

지영이 말을 이었다.

“현미 씨가 희수 씨 얘기를 조금 안 좋게 하더라고요. 혼자 잘난 척한다느니, 애 키우는 거에 비해 여유를 부린다느니.”

지영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희수 씨 상황도 모르면서 왜 이러니 저러니 하느냐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희수는 티 없는 아이들을 잠시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아까 현미 씨는요…”

말을 고르듯 잠깐 멈췄다가,

“지영 씨가 저를 많이 이해해 준다고 하던데요.”

지영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지만, 곧 그 기색을 지웠다.

“그럼요, 이해하죠. 저는 희수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만…”

짧은 침묵이 흐르고, 지영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근데 세상은 그렇게까지 봐주지 않잖아요. 특히 애 키우는 엄마들 사이에서는요.”

그 말은 조언처럼 들렸고, 동시에 경고처럼도 들렸다.

희수는 곧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영 씨는… 제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지영은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음…. 너무 맑은 사람?”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서 더 걱정돼요. 사람들에 입에 오르내려 괜히 희수 씨가 오해받을까 봐.”

그 말에 희수는 작게 웃었다.

“오해...”

“아시잖아요. 전 희수 씨 편이에요.”

아이들이 과자를 쏟아 바닥에 흘렸다.

희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치우며 말했다.

“저는요,”뜸 들이듯 희수는 깊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지는 크게 생각 안 해요.”

그 말에 지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제가 직접 겪은 게 더 중요해서요.”

굽혔던 허리를 펴며 희수는 지영의 눈을 마주 보았다. 공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그게 희수 씨 장점이죠.”

금세 옅게 웃으며 지영이 말을 덮었다.

“그래서 제가 더 옆에서 봐주고 싶은 거고요.”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기 전, 지영은 현관에서 다시 한번 말했다.

“다음 주 어린이집 상담 끝나고, 같이 커피 한 잔 해요. 그날은 꼭요.”

희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 맞춰볼게요.”



아이를 재운 뒤, 희수는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둔 거실에 앉아 있었다.

현미와 지영이 전한 이야기는 그 결이 다른 듯 같았다. 걱정이라는 말, 잘 모를 거라는 전제가 있었다.

어두워진 밖을 보며 희수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았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현미의 말과 지영의 말은 서로를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결을 품고 있었다


그날 밤, 희수는 누가 맞는지 따지지 않았다.

다만 이 관계가 언제부터 자신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는지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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