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가 자란 환경은 좀 독특했다. 천 평에 달하는 큰 대지를 두른 담 안에 여러 채의 가구가 있는 형태였다. 조부모님과 큰아버지 가족 그리고 미혼의 두 삼촌이 살고 있는 본체가 있고 우리 가족과 셋째 작은 아버지 가족이 본 채 울타리 밖에 각각의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할머니의 강한 통제욕과 할아버지의 재력이 이뤄낸 가족 형태였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에 올라갈 무렵 큰아버지네는 대도시로 이사했다. 장손이었던 사촌 오빠의 학업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를 대고 해방을 이뤘다.
엄근진이던 큰아버지가 떠나고 넷째였던 삼촌이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순서로 하면 둘째였던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이 본 채로 들어가야 했지만, 복잡한 사정으로 넷째 작은아버지가 된 삼촌의 신혼살림이 차려졌다.
천 평 대지 중 250평에 달하는 조부모님 댁에 큰고모와 큰아버지를 제외한 5남매의 가족이 모일 때가 있었다. 어른들이 하는 일에 관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을 때라 그 이유는 몰랐다. 할아버지의 딸된 작은 고모는 대청에 앉아 엄마와 숙모들의 속을 뒤집어 놨고, 허울뿐인 부잣집 며느리들은 대가족 입에 들어갈 음식을 해대느라 혼쭐이 났다.
엄마가 고생하는 게 싫었던 걸까.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단골 정육점에서 삼겹살을 사 오셨다. 그 많은 식솔들을 먹여야 하니 소고기는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푸성귀가 김치, 몇 가지 밑반찬이 놓인 평상 자리는 대체로 남자 어른들 차지였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마당에 깔아 놓은 돗자리에 앉았다. 그런 날이면 팔을 걷어붙이는 건 아버지와 작은 고모부였다. 아버지와 고모부의 노고로 고기는 맛있게 익었다.
깊은 속사정이야 어찌 됐든, 짚과 숯을 적당히 태운 불에 굽는 삼겹살 냄새는 노느라 정신없던 꼬맹이들을 참새로 만들었다. 지글지글, 타닥타닥, 하하 호호. 마당을 가득 채운 건 냄새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정겹고 따뜻한 형제애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상놈들이나 묵는 걸 뭐가 맛있다고.. 쯔쯧쯧!”
올 킬! 할아버지와 안방에서 잘 차려진 소고기 찌개를 배불리 드신 후 마당에 나온 할머니 한 마디에 모든 소음이 일시에 멈췄다. 엄마가 고기와 쌈장을 넣어 곱게 싼 쌈을 맛나게 씹던 꼬맹이들은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얼어붙었다.
“엄마, 고기 좀 드시소. 음청 맛나네.” 그나마 딸인 고모가 분위기를 풀어보자 너스레를 떨었지만.
“백정들이나 묵는 거를 내보고 무라꼬?” 한 칼에 튕겨 나가떨어졌다.
졸지에 백정이 되어버린 우리는 새하얀 모시적삼에 어울리지 않는 할머니 말에 기가 질렸고 엄마와 숙모들은 상을 치울 준비를 했다.
“차린 밥 잘 드시고 와 자식들한테 뭐라 카능교? 어무이 자식들이 백정이면 어무이는 백정 어무이 밖에 더 되는교? 쉰 소리 말고 들어 가시소. 아들(아이들) 눈치 봐가 밥도 못 삼키고 이게 뭔교?!” 결국 아버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몽땅 잃어 길에 나 앉을 뻔한 재산을 다시 일궈주었던 아버지를 가장 어려워했던 할머니의 비난은 멈췄지만 흥겨운 파티는 끝나고 말았다. 굽기 무섭게 사라지던 고기만 불판 위에서 지글거렸다.
그날 이후로 삼겹살은 우리 가족만 모인, 우리 집에서만 먹었다. 불시에 들이닥치는 할머니의 습격을 피해 가능한 저녁에만, 그것도 가장 구석진 방에서 먹었다. 할머니 눈에 뜨였다가는 졸지에 백정 놈이 될터였으니까.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이사간 집 너른 거실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던 날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게 훨씬 좋더라. 느그 아부지가 번 돈으로 내 새끼들 입에 맛있는 거 들어가는 거 보는 게 젤로 속 편하고 좋대. 우리 가족만 단출하게 먹으니까 속도 편하고 힘들지도 않고. 그 덕에 느그 작은 아부지네들만 손해 봤지 뭐. 맨날 형한테 얻어먹을 줄만 알고 한 번 살 줄도 모르더만, 할매가 안 그랬으면 우짤 뻔했노.” 그때 기억을 떠올린 엄마는 숨겨놨던 마음을 털어놨다.
“맞아요. 고기가 굽히기 무섭게 다른 사람 생각도 않고 먹는 셋째, 넷째 작은 아버지 때문에 우린 제대로 맛도 못 봤는데 우리한테는 잘 된 일이었어요.” 나도 맞장구쳤다.
그렇게 삼겹살은 우리 다섯 가족만의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