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의 온도

by 에벌띵


“오~! 이게 엄마가 쓰던 지갑이야?”

청소를 하던 중 서랍 깊은 곳에서 오래된 장지갑 하나가 나왔다. 오래 쓰지 않아 가죽이 달라붙어 쩍 소리를 내며 열린 지갑을 살피던 딸이 탐을 낸다.

“갖고 싶으면 너 해.” 선심 쓰듯 내어주니 조아라 제 방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챙겨 넣는 소리가 들린다. 다 큰 척하는 딸이 내는 어린 티가 사랑스럽다.


나는 지갑이 귀찮다. 현금보다 카드를 선호하는 시대기도 하지만 그 부피가 부담스럽다. 조금의 현금과 두 장뿐인 카드가 쏙 들어가는 작은 사이즈 지갑을 사려다 말았다. 두세 권의 책, 파우치, 태블릿, 손바닥 만한 키보드, 그리고 텀블러와 사이에 숨은 지갑을 찾을 때마다 스트레스다. 휴대전화 뒷면에 카드 한 장, 가방 속 비밀 주머니에 현금 조금이면 충분하다.



이럴 때면 나의 두 할머니가 생각난다. 긴치마 아래 입은 고쟁이, 그 고쟁이 속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돈주머니를 차고 다닌 할머니.


외가에 갈 때면 진수성찬을 해먹이고도 뭐가 그리 아쉬웠던지 할머니는 긴치마를 휙 걷어 고쟁이 속을 뒤졌다. 멀지도 않은 거리라 차비 들 일도 없는 내 손에 지폐 몇 장을 꼭 쥐어주며 “책 사 보그레이~” 하시던 모습이 선연하다. 남편 없이 다섯 남매를 키워낸 할머니가 주는 돈은 함부로 쓰기 어려워 엄마에게 고스란히 넘겼다. 잃어버릴까 주머니 깊숙이 넣고 손으로 꼭 쥐고 온 탓에 눅눅해진 돈을 받아 든 엄마 눈엔 어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고였다.


부잣집 마나님이었던 친할머니 돈주머니 사정은 달랐다. 어지간해서는 열리지 않아 그 안에 돈이 있기는 한 건지… 의뭉스럽기까지 했다. 명절과 소풍날에만 드러나는 친할머니 고쟁이는 눈부시게 하얬고 돈주머니는 묵직했지만 3천 원 이상 나온 적이 없었다. 외출 후 돌아오시는 할아버지를 마주치는 게 나았다. 그래도 난 할머니가 내민 돈을 감사히 받았다. 고개를 90도로 숙이고 감사의 말도 전했다. 책 사 보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외할머니께 받은 것과 다른 온도의 지폐를 저금통에 넣었다. 그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서랍 정리가 끝나고 뜨개실과 코바늘을 잡는다. 제대로 본 적 없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돈주머니를 떠보기로 한다. 약간의 현금과 카드 두 장이 들어갈 작은 크기의 동그란 주머니에 긴 줄을 달아 가방 속 주머니에 넣고 다닐 요량이다. 고쟁이를 입고 긴치마를 입는데도 휙 하니 치마를 걷어 올릴 수 없으니 보부상이나 들고 다닐 만한 크기의 가방이 고쟁이가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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