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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Jul 04. 2024

비싼 값매겨 갚아!

영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각자의 생에 충실했다. 새로운 터전에 적응하고 커리어를 키워가며 우리는 각자의 가정을 이뤘다. 간간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전하며 안심하고, 그리워했다.

다시 만난 건 우리의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고서였다. 

오랜만에 찾은 서울, 너무 오래 소원했던 그녀를 만나기 위해선 길고 긴 지하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잔뜩 긴장한 딸의 손을 잡고 서울 중심에서 제법 떨어진 어느 지하철 역 출구를 나가자 햇살 같던 그녀가 보였다. 아름답고 당당하고 언제나 자신감 넘쳤던 그녀의 너무도 변한 모습에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그녀가 꿈을 잃고 살아갈 거란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다.

흐린 영국 하늘 아래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던 그녀가 한 줌도 되지 않는 허리를 하고, 너무 말라 생긴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목이 막혔다.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려 입 속 여린 살을 깨물었다.

“나 많이 늙었지?” 짧은 그녀의 질문에 내 속이 들켰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부러 더 크게 웃었다.

“늙긴!! 그때나 지금이나 예쁜 건 여전하네~ 뭐야, 아줌마가 이렇게 날씬해도 돼? 비법이나 공유하셔.” 

내 안색을 연신 살피는 그녀의 눈을 슬쩍 피한 채 또 웃었다.




하루 밤만 함께 보내고 떠나야지 했던 만남이 사흘로, 나흘로 이어졌다. 우리 모녀를 피붙이 마냥 반기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이틀 만에 떠날 수 없었다. 

“이모, 나 이모 따라가면 안 돼요?” 집 근처 공원으로 가던 길에 아이가 내게 말했다.

“이모 따라가고 싶어?” 내 딸아이와 동갑내기 아이에게 드리운 슬픔을 느끼고 되물었다.

“네, 나 이모랑 ㅇㅇ이랑 같이 살면 좋겠어요. ㅇㅇ이가 다니는 학교에 다니면서…”

사흘간 들었던 정이 깊다면 얼마나 깊다고, 처음 보는 사람이나 진배없는 나를 따라가겠다는 건지.

“엄마랑 동생은 어쩌고?”

“음… 내가 이모랑 살고 있으면 엄마도 동생 데리고 오지 않을까요? 그러면 아빠를 안 봐도 되고, 엄마도 덜 힘들고… 내가 먼저 이모 집에 가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공원 입구에 멈춰 나는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우리 ㅁㅁ이가 많이 힘들었구나. 엄마를 지켜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속상했구나. 이모가 방법을 한번 찾아볼게.” 내겐 어떤 권리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서, 슬펐다.



나를 따라오겠다던 아홉 살 아이는 열다섯이다. 

재능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렸던 그녀는, 꿈 많고 빛으로 가득했던 그녀는 어렵게 홀로 서 있다. 자신만 바라보는 두 아이의 엄마로 생을 갈아 넣고 있다. 

행복이라 믿었던 그녀의 선택에 대한 대가가 너무 가혹해 눈을 질끈 감고 그녀를 외면하고 싶다. 그런데도 나는 어쩌다 한번, 어렵사리 연결되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긴 숨을 쉴 수 있다. 폐부를 찢는 숨. 그래도 쉬어지니 다행이다 싶은 그런 숨. 



“난 내가 이렇게 살 줄 몰랐어.” 담담한 그녀의 고백이 들렸다.

‘나도 네가 그렇게 살 줄 몰랐어.’라고 답하고 싶지만 꿀떡 삼켰다.

“그래도 견디다 보면 언젠가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을 살 수 있겠지?”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살고 싶었는데?” 되물었다.

“글쎄..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 생각이 안 나네… 나 어떻게 살고 싶었지?” 

“예전에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가 뭐가 중요해.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 지나 생각해 봐.” 쓸쓸한 그녀의 되뇜이 싫은 내 목소리는 부루퉁했다.

“어떻게 살든 간에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나랑 뭐 하며 지낼지도 생각해 놔. 애들 독립하면 너랑 나랑 영국에 다녀오는 계획도 하나 넣고.” 우습지도 않은 내 말에 그녀가 웃었다.

“그래. 우리 같이 영국에 다녀오자. 그거 좋네!”



5년 후 영국 옥스퍼드, 우리가 종종 자리 펴고 누웠던 크라이스트 처치의 잔디밭에 다시 드러누워

“나는 네가 그 일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어떻게 그런 걸 할 생각을 했대? 용하다 용해.” 감탄사를 연신 쏟아내며 서로에게 다정한 웃음을 보이겠지. 서로의 어깨를 쳐대며 깔깔, 숨 넘어 가게 웃으면서.

그때라야 비로소 나는 작고 여린, 아름답고 당당했던 그녀의 노고를 치하할 수 있겠지.

“야, 난 정말 너 때매 졸아든 심장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잘 살아낸 그녀에게 원망 한 마디 할 수 있겠지. 

쫄아든 내 심장에 제대로 값매겨 갚아라, 큰소리칠 날을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그녀가 평안하길, 어제보다 오늘이 더 살만하길 기도한다. 나의 아름다운 그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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