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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벌띵 Jul 17. 2024

싹 다 버렷!

태어나 가장 많은 양의 책을 버렸다. 나눔 할 것과 중고서점에 내어 놓을 것으로 구분한 나머지는 남편이 잘 묶어 내어 놓았으니 고물상에서 들고 가지 않을까.

지난 한 주 끙끙 앓아누웠던 주제에 겨우 기운 차리고 하는 짓이 책방 정리라니…… 퇴근한 남편이 책 먼지를 뒤집어쓴 나를 보고 얼어붙은 듯 섰다.

“갑자기 왜….?” 남편의 생략된 말에 나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잔소리가 하많았다.

“곧 책에 깔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오늘 갑자기 들어서.. 더 더워지기 전에 해치워버리려고.” 남편 물음에 답하는 목소리가 걸걸했다. 한의원 가면 등짝 한 대 후려 맞아도 할 말 없을 만큼 기운이 쇠진했다.


  딸이 돕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팔만 걷어붙였다. 버려야 할 책 중 대부분이 딸 몫이라 ‘꼭 남겨둘 책과 버릴 책’을 구분하라 했더니 자리에 앉아 책을 읽을 기세다. 이 책은 언제 샀고, 어떤 내용이었고, 그때 감정은 어땠고. 결론은 그래서 못 버리겠다는 거였다. 훼방꾼 역할만 하고 앉은 딸이었다.


  우체국 택배상자 5호 크기로 네 박스의 책이 퇴거당했다. 무슨 미련을 가지고 내놓지 못했는지, 30년 가까이 된 것도 있었다. 진지한 고딕체에 깨알 같은 크기의 활자가 누런 종이에 몹시도 정갈하게 나열되어 있어 죄책감이 일었다. “깊이 생각하지 말고, 직관적으로 결정해!!” 나에게 명했다.



  벌써 18, 9년쯤 되어간다. 영국 유학 갈 거라고 영국 갈 때마다 사모았던 IELTS 문제집. 지금이야 흔해빠졌지만, 당시엔 대형 서점에도 몇 권 없었다. 그런 덕에 영국 여행의 끝은 늘 서점 나들이었고, 그 무거운 책을 이고 지고 날랐다.

  어제 곧 20년이 되어가는 IELTS 책을 정리했다. 무슨 미련이 그리도 남아 여즉 그걸 들고 있었는지. 내놓으며 뒤적이니 여백마다 적힌 손글씨가 그때 나의 절박함을 대변해 주었다.

“그거 내가 보면 안 돼?” 눌러 숨긴 아쉬움을 읽을 딸이 물었다.

“뭣하러. 너 영국 유학 준비할 땐 다른 거 사줄게. 이건 너무 오래됐어.” 단호히 답했다.



  묵은 때를 벗긴 듯 개운했다. 책방 한 구석에 켜켜이 쌓여있던 책들도 한 자리씩 꿰찼다. 그러다 보니 책장은 또 빈 곳 없이 가득했다. 어쩌랴, 허탈하면서도 시원했다.

  딸 몫의 책장에는 여전히 초등시절 재밌게 읽었던 만화책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싹 정리해 버리고 싶지만, 개인 취향 존중의 룰을 진지하게 지키는 우리 가족의 암묵적 합의가 들썩이는 내 욕구를 다독였다. 갖가지 사연과 추억이 낱장마다 담겼다는 딸에게서 내가 보였다.



  

  세세히, 하나하나, 엄밀히 살펴서야 정리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알고 보면 하나같이 의미 있고 소중한 추억이 담긴 인간 관계도 그렇다. 이런저런 이유로 거리 두기가 어려운, 좀 더 견디고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언젠가는 나아지려냐 기대를 걸게 되는, 예전의 좋았던 기억이 아쉬워 미련을 떠는 관계 말이다.

  미련을 둔다고 좋아질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끌고 가는 친구는 오래 간직한 책처럼 돌아보자. 얼마나 자주 읽는 책인지, 가장 최근에 읽은 게 언제인지, 여전히 감동되는지, 지금 삶에 필요한 책인지 실피 듯 관계를 살펴보자. 그런 후 그와 내 사이 안전거리를 결정하면 좋겠다.

  막상 하고 보면 묵은 때를 벗긴 양 후련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책이 가득한 박스를 봉인했다.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는 힘은…… 대견하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Pexels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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