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상황에 대해 개입하려 들지 않고, 과도하게 관심을 갖고 살피는 것을 그만둘 걸세. 그런 다음 곤경에 처했을 때는 언제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낼 거야. 그러면 부모의 변화를 눈치챈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신의 과제로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도움을 구하거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할 걸세.
<미움받을 용기> 중
“숙제하는 줄 알았더니 지우개 똥을 모아 조물거리고 있지 뭐야!”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딸의 만행에 황당하고 어이없어하며 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종일 놀기만 하는 모양이 답답해 밀린 숙제라도 하라며 제 방에 들여보낸 딸이 쥐 죽은 듯 조용하길래 들여다보았더니 책상 위 흩어진 지우개 똥을 정성스레 모으고 있더란다. 깨끗한 책상 위를 지우개로 문질러 만들어 낸 지우개 똥을 다시 뭉치기를 반복하는 초등 5학년 딸의 행태에 열이 뻗친 그녀는 딸의 등짝을 후려치고 말았다며 후회와 열불을 동시에 쏟아냈다.
울그락불그락하는 그녀 앞에서 나는 파안대소했다. 남의 딸이 저지른 ‘만행’이 제삼자의 눈엔 그저 귀엽고 재밌었다.
“아니, 너희 딸도 그러니? 더군다나 너희 딸은 홈스쿨링 한다며? 나는 상상만 해도 뒷목 혈관이 팽창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넌 어떻게 하루종일 애랑 붙어 있어?” 와다다, 질문과 푸념을 한 덩이로 뭉쳐낸 그녀는 똥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하하, 우리 딸은 지우개 똥을 뭉치는 대신 간혹 시간을 죽이고 계시지. 멍 때리고 있기가 다반사고 책은커녕 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건 일상이야. 요즘은 일렉기타인지 뭔지 배운다고 아침부터 밤까지 뚱땅대고 있는데, 너희 딸은 그나마 저렴한 지우개 똥 가지고 노니 얼마나 다행이야~”
“넌 그걸 참니? 나 같으면 당장 학교로 쫓아버렸어!!”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누가 누가 빡세나’ 배틀을 했다. 승자는 없고 웃음은 넘쳤다.
딸의 방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방문을 닫는 경우는 반려견 미남이가 방해 공작을 펼 때와 손님이 방문했을 때다. 잘 때라도 닫으라 해보지만 엄마 숨소리라도 듣겠다며 열어 둔다. 비밀도 없는 건지……
되려 내가 딸에게 독서실 책상을 선물했다. 공부할 때라도 사적 영역을 고수하라고 넣어 준 책상 앞에 가장 오래 앉아 있는 걸 보면 딸도 들키고 싶지 않은 무엇이 있는 건 분명해 뵌다. 천만다행이다.
우리 가족은 고양이와 닮았다. 외로움을 타지만 타인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건 부담스럽다. 함께 살더라도 자기 영역이 있어야 하고 침범받는 걸 꺼려한다. 그런 까닭에 각자의 방을 가지고 있다. 공통의 공간인 거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자기 공간으로 흩어진다. 특이한 점이라면 모든 방문은 항상 열려 있다. 서로 뭘 하는지 관심도 없으면서 문을 열어두는 건 왜지?? 이유는 몰라도 우리 가족에겐 자연스럽다.
아들러의 말처럼 타인의 과제와 내 과제를 구분하기 위한 훈련이 있었다는 걸 시인한다. 특히나 사적 공간이 너무도 중요했던 나는 네 것 내 것 구분 없이 얽히는 가족관계에 대한 피로도가 높았다. 누군가의 방문이 있을 때마다 동원되어 인사를 나누고 (내 상황과 처지에 아랑곳없이) 이러다 죽겠다 싶을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어른들의 생각에 대항했다. 그러다 보니 결혼으로 이루어지는 영역침범은 말할 것 없이 힘들었고 우리 세 가족만이라도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훈련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