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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mpkin May 31. 2020

요한 페터 에커만의<괴테와의 대화>에서 만난 인간 괴테

타고난 자신의 경향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교양이란 대체 무엇인가


'괴테와의 대화'는 제목 그대로 요한 페터 에커만이 괴테를 만나고 함께 하면서 나눈 대화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괴테에게 온전한 존경과 사랑을 바치는 에커만의 순수한 열정과 존경은 마치 내가 에커만이라도 된 듯 바로 그 감동, 그 떨림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이며 배움의 열정으로 똘똘 뭉친 에커만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며 그의 앞길을 밝혀주는 삶의 등불이기를 스스로 자처하는 괴테. 그런 괴테를 온전한 신뢰와 존경과 사랑으로 따라가는 에커만. 그 둘의 관계가 사무치도록 부럽고 아름다워서 잠까지 설쳤다. 이미 당대의 석학이었고 존경하는 괴테를 보는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의 초대로 집에  함께 머물며 함께 하는 기회가 주어지다니. 그건 축복이자 삶이 주는 선물이었다. 에커만이 긴장과 두근대며 가슴 벅차 하는 그 장면이 자꾸만 리플레이되어 다가와 내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내가 에커만이었다.


어린 소녀 율리케에 대한 열정을 달래기 위해 시를 쓰는 70이 넘은 괴테. 그런 괴테의 열정을 사회적 불순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망과 감동으로 읽어내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에커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료도 친구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진 존경과 사랑과 신뢰가 함께하는 관계. 읽는 페이지마다 가슴이 터질 것은 떨림으로 가득 차 올랐다.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지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얇아지는 남아 있는 분량과 반비례로 아쉬움은 커져만 갔다.


읽으면서 중간중간 혼자 실실 대며 웃었던 것은 내가 괴테를 참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왜 그런 엉뚱한 착각을 했을까. 아마도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게 괴테의 이름을 내 이름만큼이나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를 참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괴테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은 내가 그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허걱 하며 놀랄 수밖에. 그 흔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조차 읽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놀라움이자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놀란 또 한 가지는, 그에게 자녀가 있었다는 부분이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가 칸트처럼 독신이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마치 사실처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식이 출장을 떠나면, 무식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차분하게 써 내려간 에커만의 글은 자칫 ‘차분함’이 줄 수 있는 ‘지루함’을 묘하게 비껴간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밖에서 안의 전경을 들여다보듯, 그렇게 객관적이고 차분하면서도 침착하게 차곡차곡 자신과 괴테와의 경험을 적어 내려 간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덩달아 차분해지고 정리되는 느낌이다. 


에커만의 행동을 보며 공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의 지난날의 삶이 나의 그것과 비슷했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나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가짐 등이 많이 닮았기에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글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면, 나 자신을 읽고 있는 글이나 그 영화에 자연스럽게 동일화시키며 몰입하는 성향이 있기에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위인들을 대하면 공통되게 느껴지는 것. 그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의 명성과 영광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괴테 역시도 자신의 삶을 ‘지루한 삶’이었다며 힘들기도 했고 지치기도 했던 삶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현재’에 온전히 임하며 열정을 쏟고,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적들로부터의 모든 비판과 비난에도 중심을 잃지 않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또다시 자신을 몰입시키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다. 괴테는 주관적인 시대의 흐름을 떠나 객관적인 자세로 자신의 길을 가면서 묵묵히 한결같은 열정과 끈기로 그 외로운 길을 고수했다. 바로 나의 길을 가는 것이 다른 이에게 길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괴테의 삶을 통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삶 자체가 뭉클한 감동이다. 이럴 때면, ‘뭉클하다’ 또는 ’ 감동이다’라는 식상한 표현밖에 할 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민다.


괴테는 절대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다. 사진으로 보는 그의 분위기도 남성적이긴 하지만, 에커만을 통해 듣는 괴테는 내가 성서 공부를 하며 가장 완벽한 남성상이라고 느꼈던 구약의 요셉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그보다 더 인간미가 느껴지는 괴테라고 할까. 책을 읽는 동안 점점 괴테에게 매료되며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지적이며 품위있는 매력에 빠져들지 않음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와 함께 에커만의 매력에도 허우적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년 에커만의 모습은 청년 괴테의 모습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올곧고 바르면서도 사려 깊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성품이 참으로 닮은 꼴이다. 정석을 추구하고 가장 최선의 것을 이루려고 노력하면서도 겸손과 당당함이 아름다운 조화로 이루어지는 매력으로 똘똘 뭉친 두 남성. 치명적인 매력 아닌가.


“자네의 그런 성향은 물론 사교적이 아니야. 하지만 우리가 타고난 자신의 경향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교양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을 우리에게 동조시키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네. 나는 결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네. 나는 인간을 언제나 자립적인 개인으로만 보면서, 그러한 개인을 탐구하고 그 독자성을 알려고 노력해 왔으나, 그 밖에 더 이상 그들로부터 동정을 얻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
그리하여 나는 이제는 어떤 인간과도 사귈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비로소 각양각색의 성격들을 알게 되고 인생살이에 필요한 민첩함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일세. 성미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무난히 지내기 위해서는 자제해야만 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내부에 있는 모든 다양한 측면이 자극을 받고 발전하면서 완성되는 것이라네. 그리하여 마침내 누구와 부딪쳐도 당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자네도 그렇게 해보게, 
자네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소질이 있어. 그런데 이번 일에는 틀렸군. 하여간 자네는 넓은 사회로 들어가야 해. 물론 자네가 바라는 대로 처신하면 되겠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고 맞는 사람들과 깊은 교류를 원하는 에커만에게 괴테가 해주는 부드러운 조언은 바로 에커만과 비슷한 성향을 지닌 나에게도 감사한 조언이었다. 불편하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는 한 자리에 있는 것조차 거북해하고 싫어하는 나. 괴테의 그 진심 어린 따끔한 충고는 내 가슴에 울림과 함께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괴테와 에커만의 대화 속에 자기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거장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르내렸다. 그들과 직접적인 친분을 교류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괴테가 에커만에게 해주었던 ‘관계’에 대한 충고가 다시 나를 깊은 생각에 빠지게 했다.


막연히 이름만 알고 있던 ‘실러’에 대한 이야기도 참으로 흥미로웠지만 바이런경에 관한 이야기는 회기심을 자극시켰다. 바이런이 우울하고 부정적이지만 않았으면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시인이라고 칭송하면서 그토록 안타까워하는 괴테를 보며 ‘그 잘생긴 시인이 대체 어땠길래’하는 궁금증이 이는 게다. 고등학교 때 바이런에 대해 배우면서 "이렇게 잘생긴 시인도 있나?" 그의 뛰어난 외모에 놀랬던 기억이 있다. 물론 문학가들이 다들 못생겼다는 의미는 아니나, 그 귀족적이고 영화배우 같은 외모에 놀랬던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너무나도 고귀한 신분에 탁월한 외모와 재능까지 물려받은 바이런 경이지만 시대가 맞지 않았던 걸까. 괴테의 말대로 그가 그토록 고귀한 신분이 아니었으면 어쩌면 순수한 시인으로서의 삶은 더욱 빛을 발했을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꼬리를 물고 줄줄이 사탕처럼 올라오는 의문들. 


"대체 바이런은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괴테의 입에서 ‘몰리에르’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들떠서 완전 난리 부르스였다. 얼마나 반갑고 또 반가웠는지. 마치 오랜 연인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듯 그렇게 가슴 터질듯한 기쁨에 휩싸였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 때 고전 문학에 대해 배우면서 몰리에르를 알게 되었다. 그가 얼마나 삶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무대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는지를 배웠다. 그리고 몰리에르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무대에서 연극을 하다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 흥분했고 그에게 무작정 빠져버렸다. 그래서 그의 사진을 내 수첩에 오려 붙이고 다니며 좋아라 했다. 괴테의 입에서 '몰리에르'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몇 백 년 전의 그를 그렇게 혼자 흠모했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도 좋았을까. 


내가 한국을 떠날 때  미대 지망생이었던 친구가 선물로 그려준 데생의 주인공도 바로 몰리에르였다. 그렇게 몰리에르를 입에 달고 다닌 나였는데, 존경해마지 않는 괴테가 몰리에르를 극찬하다니. 그야말로 나는 흥분하다 못해 거의 광란의 난리 부르스 수준이었다.


이렇듯, <괴테와의 대화>를 읽으며 내가 누렸던 호사는 바로 그저 벽지의 무늬처럼 겨우 이름만 듣고 알던 시인들이나 작가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함께 엿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 이야기를 좋아하고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들의 추구했던 이상과 꿈을 엿보는 것은 그야말로 생각지 않게 따라온 보너스였다. 그렇게 그들의 삶이 더욱 궁금해지고, 그들의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지는 호기심이 자극되어, 결국 그것은 나를 또 다른 배움의 길로 인도해주고 이끌어주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자극이 되었다.





나는 책을 열린 마음으로 읽는 편이고, 설사 재미없거나 지루하더라도 무언가 내게 배움을 안겨줄 책이라는 믿음 아래 늘 그 안에서 깨달음을 발견하려는 마음으로 읽는 스타일이다. 그런 나기에 쉽게 동화되고 쉽게 그 분위기에 젖어드는 성향을 지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괴테와의 대화>처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나와 내가 함께 하는 이들, 내 삶,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 꿈, 관계 그 모든 것이 넘어가는 페이지마다 떠오르며 깊이 사색하게 했던 책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과 경외심이 느껴지는 사랑으로 괴테를 대하는 에커만. 총명하고 겸손하면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청년을 진실로 아끼고 사랑하며 그의 재능을 꿰뚫어 알고, 그에게 가장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 가장 현명한 선택이 무엇인지, 괴테가 스스로 고백하듯 그런 후회스러운 순간을 만들지 않도록 에커만이 지혜롭게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진심 어린 충고와 배려로 이끌어주는 괴테. 정말이지, 괴테와 에커만의 관계는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을 만큼 부러움이었고, 설렘이었고 바람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서프라이즈로 가득하다. 그렇게 지난 몇 년을 오로지 괴테만을 생각하고 괴테만을 읽으며, 앉으나 서나 괴테 생각이던 에커만. 괴테를 만나고 싶은 절절한 욕망에 결국 용기를 내어 그를 만나러 가는 그 순간에도 괴테와 자신의 관계가 이토록 깊고 친 말한 관계로 이어질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괴테의 삶 속에 그리 깊이 참여하게 될지 감히 상상 속에서도 그려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계를 맺게 되지만, 과연 이렇게 서로의 성장을 도와주고 배움을 주고받으며 존경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과연 얼마나 맺을 수 있는가. 괴테와 에커만은 서로에게 삶이 안겨준 축복이자 선물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는 이별을 하고 상실에 대한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괴테의 죽음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며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에커만. 그렇게도 존경하고 사랑했던 이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에커만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깊은 슬픔과 상실의 고통이 어떻게 위로될 수 있을까. 그의 눈물 앞에 나도 그저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괴테와의 대화에서 만난 괴테는 이름이 주는 진지하고 엄한 분위기와는 달리 열린 마인드를 가졌고, 사람을 좋아하고 만남을 즐기며, 관계를 소중히 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파울로 코엘료를 꼬집고 비꼬며 표현했던 그런 질투에 몸살을 앓는 작가들의 모습이 아니라, 아주 활달하고 정감 넘치며 배려있고 따뜻하면서도 기품 있는, 그런 멋진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런 거장과 함께 했던 요한 페터 에커만이 느꼈을 기쁨이란. 


괴테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 화가나 조각가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가 작품을 창작해내고 있는 순간의 느낌을 그대로 느낀다는 사실에 그가 얼마나 감성적이고 예술을 사랑하는지, 마치 나도 괴테처럼 예술을 사랑하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그는 재능 있고 능력 있는 젊은이들에게 자극을 주고 동기 부여를 해주고 진심으로 그들의 성장을 바라고 도와준다. 그 마음은 그냥 ‘마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그들 자신 안에 있는 재능을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슬픔에 젖어있는 18세 청년에게 주노상을 보여주며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싶어 했던 괴테. 그는 그런 마음으로 함께하는 멘토였다.


세계의 획을 긋는 굵직한 역사의 현장이 괴테의 살아생전 일어났다. 그것을 실제로 보고 겪고 느끼는 것은, 후세에 누군가가 글로 읽고 느낀 그것과는 다른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는 괴테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놀라운 것은, 책을 통해 알고 있는 위대한 철학자나 거장들이 괴테와 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 그래서 서로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내겐 또 다른 흥분이었다. 나폴레옹과 같은 시대에 살았고, 더불어 예나 대학에 입성하는 말을 탄 나폴레옹을 보며 ‘절대정신 울 보았다’며 감탄했던 헤겔과 쇼펜하우어도 같은 시대에 살았던 괴테. 자신들이 속한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들이 그렇게 한 시대에 살았고 같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실험실로 걸어 들어간 괴테


괴테에게 배우고 싶은 여러가지 성품 중에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은 객관적인 태도였다. 괴테 자신을 비판하거나 헐뜯는 이들조차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들의 재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자의 원형이다. 괴테가 그렇게 존경받는 이유는 단순히 문학의 거장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성품이 함께 따라주었기 때문었이 아니었을까.


괴테는 참 행복한 가장이었던 듯싶다. 명석하고 똑똑한 아들, 그리고 명랑하고 귀엽고 자기표현에 솔직하고 자유로운 며느리. 에커만의 글 중에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간간이 다가와 시아버지인 괴테의 팔짱을 끼고 볼에 키스를 하는 며느리를 묘사한 장면은 얼마나 사랑이 가득 넘치는지.


마리엔바트에서 괴테가 외모도 영혼도 아름다운 19세 소녀 울리케 폰 레벷초프에 보낸 열정과 사랑. 괴테는 7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런 열정과 사랑을 느끼며 그것을 시로 쏟아내고 음악으로 풀어냈다. 그 나이에도 그런 감성이 살아있다니. 물론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나이에 그런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그런 소문을 믿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육체적인 건강함뿐만 아니라 정신의 생산력과 영혼의 원기 발랄함에 완전히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P77)


이렇듯 에커만의 눈에 비치는 괴테는 열정이 살아있는 건장한 육체와 영혼을 가진 괴테였기에, 괴테의 노년의 사랑은 에커만에게는 괴테의 자연스러운 감성의 표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괴테와의 대화를 읽기 전 내가 아는 괴테는 오로지 ‘세기의 문호’ 괴테였다. 하지만 <괴테와의 대화>에서 만난 괴테는 문학사의 거장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였고 과학자였으며, 사교술이 좋은 외교관이면서 철학자였던 괴테였다. 그중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괴테는 바로 '인간 괴테'였다. 너무 고고해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괴테가 아닌 일상 속에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누는 따뜻한 품성을 가진 인간 괴테.






<괴테와의 대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 준 책이었다. 그 느낌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모두 초서에 옮겼다. 마지막으로 괴테에게 감사한 것은, 그를 통해 삶을 더욱 섬세하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술엔 문외한이던 내가 미술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도 감사하다. 미술관까지 쫓아가서 괴테가 미술작품들을 보며 느꼈던 그 느낌을 나도 느껴보려고 시도해 봄으로 새로운 즐거움을 맛 본 경험은 또 얼마나 즐거웠는지.


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성숙하게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은 나에게는 소중한 배움이었다. 그리고 그의 끝없는 학문과 배움으로의 열정, 삶에 대한 중용의 자세. 자신에 대한 비판에 연연하지 않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감으로 남들에게도 그들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는 괴테의 삶에 임하는 자세. 그 모든 것이 바로 ‘괴테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배우고 깨달은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겨우 이 몇 줄로 내가 느낀 그 깊고도 깊은 감동과 배움과 느낌을 다 말했다고 할 수 있겠나. 그토록 훌륭하고 멋진 한 인간을 에커만의 눈을 통해 책으로라도 만나고 느낄 수 있었음에 그저 벅찬 감동과 감사가 함께 할 뿐이다. (해야 할 말을 다 못한 것 같은 느낌에 글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럴 땐 참으로 나의 초라한 표현력에 화가 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정말로 마지막으로), 테크놀로지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던 그 시대에 괴테와 나눈 이야기를 그렇게 모두 기억하고 일기로 적어 두었던 에커만. 그의 놀라운 기억력에 감사를 표한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그들이 나눈 대화를 읽으며 그들의 삶과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축복은 아예 주어지지도 않았을 터다.


꼭 그리 머지않은 언젠가 나는 바이마르에 갈 것이다. 그래서 괴테 하우스 앞에서 그의 책을 읽는 행복을 직접 누려볼 것이다. 나는 괴테 앞에서 어떤 느낌일지. 에커만이 느꼈던 그 느낌을 나도 느낄 수 있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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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를 쓰고 2년 후, 유학 중인 딸아이를 만나러 독일에 갔다가 프랑크프루트에 있는 괴테하우스에 갈 기회가 있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가라앉힐 수가 있을까.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곳. 정원이 없어서 창문 너머 옆집 정원을 바라보았다는 그 방. 모짜르트 음악이 흐르는 그곳에서 감정이 북받쳐 결국 눈물을 흘렸던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행복의 절정을 느꼈던 순간. 기회가 되면 꼭 바이마르에 가고 싶다.  




2012.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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