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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mpkin May 30. 2020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우리는 영적인 공간을 얼마나 멀리까지 방황할 수 있겠는가!


처음 이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언뜻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현란한 단어들의 향연처럼 많은 부연 설명이 붙어있는 글들은 지름길이 아닌 부러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좀 더 명확한 뜻을 느끼기 위해 같은 문단을 여러 번 읽기도 했지만, 곧 문체에 익숙해졌고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나는 점점 프루스트에게 빠져들었다. 아니면 알랭 드 보통에게 빠져든건지. 어쨌거나 난 그렇게 빠져들었다.


P43 프루스트의 남동생인 로베르가 썼듯이, “슬픈 일은, 사람들이 매우 아프거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지 중 하나에 새롭게 깁스를 하거나 결핵균이 발견되어 침대에 눕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프루스트가 쓴 무장의 길이라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인용된 제 5권의 문장 하나는, 표준적인 크기의 글자로 한 줄로 배열된다면 4미터가 조금 안 되며 포도주병 바닥을 17번 감을 수 있다.
P45 이 소설의 처음 부분을 간략하고도 당혹스럽게 흝어 본 후에 윔블로는 “친해하는 친구여, 내가 우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답장을 썼다. “하지만 왜 한 장에 30페이지나 들이면서 그가 잠이 들기 전 침대에서 어떻게 뒤척이는지를 서술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쯤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전에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랭 드 보통은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는 결코 읽지 않았을 이 책을 얼마나 해학적으로 표현을 내놓았는지 깔깔 웃음이 터져버리게 한다. 알랭 드 보통과 함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프루스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참으로 즐거운 여정이었다.


프루스트는 참으로 여러가지 색깔을 가진 사람이었고, 참 다양한 분위기를 가진 작가였다. 책을 통해 느껴지는 그는 아주 병약해서 때때로 신경질적이고 짜증스럽고 어리광투성인 응석받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고 함께 하면 즐겁고 행복한 느낌을 갖게 하는 사람. 그래서 상대방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아주 배려깊고 재밌는 친구. 그가 죽은 후에 너도나도 서로 다투어 그들로 하여금 프루스트와 함께 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게 했던 멋진 사람이었다.






프루스트를 키워드 별로 설명해놓은 부분을 읽으면서 프루스트가 가엾게 느껴졌다. 어떻게 그렇게 정신적인 안정도 못 누리면서 심한 육체적인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는지. 그가 좀 더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고 제 끼니에 식사를 하고 햇빛도 받고 운동도 하면서 생활을 했다면, 그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거나 또는 덜 겪어도 되었을지도. 이 모두 어머니의 그릇된 애정표현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섬뜩한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내 삶이 더 나아지면
바로 그것이 엄마를 괴롭히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다시 아프게 될 때까지
모든 것을 망친다는 것입니다.


프루스트의 고백처럼 어머니는 그가 전적으로 당신에게 의지하기를 바라기를 의지적으로 바라지야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셀이 그녀 곁에 있어줄 수 있고 그녀로 하여금 그를 보살펴줄 수 있는 한 방편으로 간호사-환자 관계의 절름발이 애정을 쏟았던 것 같다. 책을 읽어갈수록 마르셀이 너무 가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엄마 탓으로 돌릴 수야 없지만, 섬세한 심성을 가진 마르셀 프루스트 삶에 엄마의 역할이 무척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프루스트가 왜 너무 자주 사용되는 구절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결국, 달은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것 아니던가?
노을은 불타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가?
상투어란 바로 좋은 표현이기 때문이 인기 있는 것 아닌가.?”


늘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언어의 풍요로움을 망각시키는 것에 대한 프루스트가 가브리엘 드 로슈푸코에게 해준 조언은 마치 내게 한 충고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론 나는 로슈푸코처럼 장황한 소설을 쓰지도 않았고 소설을 쓸 생각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내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한계성을 느끼며 안 그래도 부끄럽고 속상하고 있던 중에 읽은 이 대목은 정말 이불 밑으로 숨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그에 이어지는 알랭 드 보통의 설명은 더 나를 괴롭게 한다.




프루스트의 우정에 대한 생각과 친구에 대한 그의 애정과 배려는 놀라울 정도다. 어쩜 그래서 그는 더 몸이 약해졌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고. 관계 속에 한 명 한 명에게 쏟아붓는 정성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지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결같은 정성으로 그들을 대했는지, 그의 친구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느낄 수 있다. 과연 나는 그럴 수 있는가. 그렇다는 답을 할 자신이 없다.


그는 자신이 지적인 사람이긴 했으나 그는 친구들에게 같이 지적이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상대방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며  한결같은 공감적 경청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어떻게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누군가가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고,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를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그가 온전히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고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으며,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함께 그 순간을 나누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프루스트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깊이 공감하며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의 병은 치유가 된다.점점 이기적이고 경쟁이 심해지며 상대적인 빈곤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인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나만 중요한 자기중심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점점 외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이란 심리적인 감기를 많은 우리가 때마다 앓게되는 것 아닌가.


프루스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 심리 치료사가 되어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이에게 멋진 친구였고 충실한 친구였고 신실한 친구였다. 누구라도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열망마저 갖게 하는. 어느 책에서는 실제로 상담심리학의 시초는 마르셀 프루스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버지니아 울프’에 관한 부분이다. 프루스트의 책을 감히 읽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그녀. 책을 읽다가 절망하며 자살 충동까지 느끼는 그녀. 그녀의 절망과 절규가 마치 나의 그것처럼 느껴져와 결국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부분을 쓰는데 또다시 코끝이 시큰거려진다.

어떻게 어떤 사람이 내 손에서는 언제나 빠져 나갔던 것을 확고하게 담아내서
이 아름다우면서도 완벽하게 영원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책을 내려놓고 한 숨을 쉴 수밖에 없군요

그녀가 로저 프라이에게 쓴 편지다. 하마터면 세기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침묵케 할 뻔 했던 프루스트. 대체 그의 책이 어땠길래 버지니아를 이렇게 절망 속으로 빠뜨렸을까. 프루스트로 인해 자살 충동까지 느꼈던 그녀. 어쩜, 훗날 그녀가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한 것 그 깊은 곳 어디 쯤에는 프루스트라는 이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억지스런 상상마저 하게 된다.





역시 알랭 드 보통이었다. 철저한 분석력과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관찰력,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알랭의 시니컬한 유머. 프루스트의 삶과 그의 작품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함께 비교분석하며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까지 그는 현미경을 놓고 보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해부를 하듯 구석구석 파헤치며 보여준다. 심지어 중간중간 보충 설명을 곁들이며 보여준 철저한 분석에 나는 그야말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집요함과 완벽함. 또한 부분부분 순간순간 느끼게 해주는 그의 시선에 따른 심리적 분석. 그의 심리묘사나 심리분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섬세하고 날카로워서 마치 살얼음을 걷는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읽는 내내 진지했고, 읽는 내내 신기했으며, 읽는 내내 궁금했다. 프루스트에 대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꼭 읽어보고 싶다. 지난 며칠 매일 새벽마다 함께 했던 프루스트와 알랭 드 보통과의 데이트는 내가 생각했던 이상의 짜릿한 행복을 안겨주었고, 나의 지적 욕구를 자극시켜주었다. 매력적인 두 남자와의 데이트가 마침내 끝났다.


책을 읽으며 살짝 아쉬움이 들었던 부분은 바로 제목이었다.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보다 그냥 원제로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두었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프루스트를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떠나 프루스트의 삶과 생각과 추구했던 것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그의 책을 인용해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으니 제목이 붕 뜬다는 느낌이랄까.


암튼, 프루스트의 생각 하나한, 행동 하나하나를 해부하듯 파헤치고 분석하며 그가 의도했던 표현의 의미까지 일일이 해석해주는 알랭 드 보통의 능력이 너무나도 놀라웠다. 그 아빠의 그 아들이 아니라, 그 프루스트에 그 알랭 드 보통처럼 느껴졌던 책.


‘프루스트하다’ , ‘프루스트적 순간’ 같은 표현까지 등장하게 했던 프루스트.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도 프루스트적 순간을 맞으며 프루스트해지고 싶다는 갈망이 생긴다.


                                             

  


20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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