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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mpkin May 29. 2020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을 읽고

자아가 비대해질수록 자기와 타자의 사이는 잇기 힘들어집니다.


1950년 일본 규슈 구마모토에서 재일교포 2세로 출생.

독일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정치학과 정치사상사를 전공. 한국인 최초의 도교 대학 정식교수,

도쿄대 현대한국연구소 센터 초대장, 저널리스트.


강상중 교수는 사진만 보아도 예리하고 차가운 이성과 날카로운 지성이 팽팽하게 살아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마저 느껴지게 한다. 책을 읽는 동안, 논리적이면서도 깊은 통찰력이 느껴지는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펼쳐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글이 사진의 분위기와 참으로 닮았음이 느껴졌다. 




강상중 교수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의외로 그에 대한 정보는 많았고, 그를 존경하는 분들이 많아서 놀랐다. 마치 나만 몰랐던 것 같은 부끄러움마저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분의 강연을 듣거나 시사 프로그램에 나와 일본 정치가들과 함께 토론을 하는 것을 본 분들이 쓴 글들을 통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그분에 대한 나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정치가, 저널리스트, 많은 게스트들이 강 교수님과 공방을 벌일 때는 꼬리를 내리는 게 보통이죠. 강 교수님은 자신이 옳다고 말하기보다, 이런 사실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는 스타일이며, 감정에 격해진 토론자들에게 찬물을 끼얹어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타입입니다.” <출처: ">http://cafe.daum.net/hanryulove>


강상중 교수를 통해 아직 세상에 정의와 지식이 살아있음을 느낀다며 존경한다는 말로 끝을 맺은 어느 분의 글을 읽으며, 직접적으로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 강상중 교수가 어떤 분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일본 정치가들의 무서운 입담마저 꼬리 내리게 하는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이면서도 당신은 <이지 라이더> 세대라며 Born to be wild를 들으며 지낸 세대기에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달리는 꿈꾸는 강상중. 언뜻 서로 연결이 쉽지 않은 서로 다른 분위기를 절묘한 조화로 이끌어내는 강상중 교수가 매력적으로 다가왔음은 당연했다.


역자 이경덕은 실제로 강상중 교수와 함께 했을 때를 기억하며 책에서 느꼈던 그는 냉철함이나 예리함이라는 분위기를 가졌지만, 함께 하면서 그 예리한 지성과 더불어 너그러움과 편안함을 느끼고 맛볼 수 있었다고 떠올린다. 


1950년생인 강상중 교수는 올해로 71세다. 71세의 날카로운 분위기의 노교수가 긴 가발이 달린 헬멧을 쓰고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거리를 누비는 반전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함이요 즐거움이다. 그 꿈이 이뤄지길!! Born to be wild!! 



   


책 표지에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사진 분위기 때문일까?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창 밖으로 비치는 불빛으로 수놓은 깊어진 도시의 밤을 바라보며 고백하듯 이어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의 삶과 생각을 ‘강상중’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삶을 읽는 동안 프루스트의 눈을 통해 삶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 알랭 드 보통이 떠올랐다.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의 생각과 표현을 빌어 써내려 간 그는 ‘고민’이라는 단어를 앞세우며, 9가지 테마, 자아, 앎, 돈, 청춘, 믿음, 일, 사랑, 죽음, 그리고 나이가 들어감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삶의 고민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만난 많은 책과는 달리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닌, 고민하는 과정 속에 얻게 되는 힘에 대해서 말이다.


자아 vs. 자기중심 주의자


첫 장은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은 빠지게 되는 고민인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된다. 일본에서 한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일본 교육을 받은 재일교포 2세인 강성중 교수도 예외는 아니어서 청년 시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외국에서 태어나 한국인 부모님의 가정 교육과 태어난 나라의 문화적인 갭으로 겪게 되는 수많은 교포 2세들이 그렇듯이.


이 장에서 나의 시선을 붙잡았던 것은 바로 ‘자아’와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부분이었다. ‘자기중심주의자’는 ‘타인의 기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을 밀어붙이는 사람이며, ‘자아’와는 다르다는 것. 왜냐면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자아와 자기중심주의자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자아가 비대해질수록 자기와 타자의 사이는 잇기 힘들어지며, 자기가 쌓은 성은 파멸을 부른다는 것은 뜨끔하게 했다. 어쩜 나는 그동안 감정의 균형이라는 합리적인 변명 아래, 바쁜 삶 속에 나의 내적 충전을 위해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핑계로 나의 성을 높이높이 쌓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어쩜 그렇게 타인과의 관계에 벽을 두르며 나만 생각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아의식 속에 깨어있다는 착각 속에 사회적 관계 속에 함께하기 보다는 자기중심주의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은 아닌지 가슴이 뜨끔했다.


10년 전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 나에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키워드가 ‘자유’였다면,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내 가슴을 치고 들어온 단어는 ‘관계’였다. 그가 각각 한 장씩 할애하며 다룬 여러 테마들은 제각기 다른 옷을 입은 듯했지만, 모두 ‘관계’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첫 장에서부터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장에서 반복되며 마치 스타카토처럼 톡톡 튀며 내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자기가 쌓은 성’이 파괴를 부르며 자아가 비대해질수록 자기와 타자의 사이는 잇기 힘들어지기에 결국 지나친 자아가 바로 현대병의 우울증 내지는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자아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에,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 


강상중의 말을 듣다가 어쩌면 나는 ‘자유’에 대한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성찰과 함께 다시 한번 ‘나’와 ‘너’ 즉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또 하나 나의 시선을 붙잡았던 것은 바로 ‘일’에 관한 부분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지, 일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타자로부터의 배려 그리고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그의 표현은 나를 ‘잠시 멈춤!!’ 하게 했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은 생계나, 의미 추구, 또는 나의 꿈을 위한 행위이지, 한 번도 그것을 ‘타자로부터의 배려 또는 타자를 위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강상중은 ‘그 일이 그 사람에게 보람이 있는지 없는지, 그의 꿈을 실현시켜 줄지 그렇지 않을지는 다음 단계’라고 이야기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사회 속에 있는 자기를 재확인할 수 있고,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자신감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  한 마디로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리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고 ‘자기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내가 ‘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떠올리던 수많은 이유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했고, 고개 갸우뚱거리게 하면서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나를 바라보게 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강상중 교수의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왜 그렇게 사회적 시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설명을 읽고 보니 어쩜 ‘배려’라는 것이 그의 말처럼 꿈을 실현시켜줄지 아닌 지에 대한 것보다 더 기본적이고 더 소중한 의미를 지녔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인정


“우리는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것은 경제적, 물리적 뒷받침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철학적 의미에서도 그렇습니다. 자아를 보존해 가기 위해서는 역시 타자와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상호 인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상호 인정이 없으면 자아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P151) -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중에서- 


좀 더 젊었을 때 나는 타인의 인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인정보다는 나 자신 스스로 느끼는 충만감, 나 자신의 인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내가 추구하는 삶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대단한 삶을 이뤄낸 것은 아니나, 일상 속에 내가 택하고 행하는 많은 결정과 행동들에 나에 대한 타인의 인정과 시선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순진하게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나라고 조금의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


그렇게 지낸 나의 젊은 시절은 도전과 시도로 내 삶을 컬러링 했고, 그 안에서 나는 때때로 어려움과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행복과 충만감을 느꼈으며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과 추억들도 함께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늘 갈증을 느꼈다. 늘 무언가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것이고, 함께하는 것보다는 혼자서 하는 것을 즐겼다. 그것을 나는 스스로 자존감이 높기 때문이고 긍정 마인드의 소유자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그 모든 것의 깊은 심연 속에는 미처 나 스스로도 인식하지 모산 ‘타인의 인정에 대한 욕구 ’가 짙게 깔려 있었음을. 나는 결코 타인의 시선이나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나 깊이 내 삶 밑바닥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미처 인지할 수도 없었던 것임을 이제야 알겠는 것이다. 자아 비만 속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임을 말이다. 쿨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엔 목에 걸린 가시처럼 넘어가지 않는 아픈 진실이었다.


자존감도 좋고, 긍정적인 마인드도 좋다. 이 모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함께’ 하는 내가 아닌 ‘혼자’ 만의 나에게 그것들은 어떤 의미를 안겨줄 수 있는 것인가? 상호 인정이 없으면 자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거부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처럼 말이다. 함께해야 서로의 존재에 의미가 부여되고 가치가 부여된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볼 때 우리의 삶은 ‘관계’를 벗어나서는 ‘나’도 ‘자유’도 ‘사랑’도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관계 속에서만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통증이 일 만큼 아프게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마치며…


읽는 내내 그의 특유의 조용한 어조로 삶이 지니는 양면성을 예리하면서도 찬찬하게, 그러면서도 조목조목 긍정적인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모두 구석구석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편협적인 사고로 동전의 한 면만 보고 있던 나에게, 같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같은 동전이어도 양면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준 책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나의 사고의 각도가 1도쯤 넓어진 듯한 느낌이다.


고민은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좀 더 나아가 뻔뻔해지라고 등을 떠미는 강상중 교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내게 부딪혀 오는 고민들을 피하려 하지 않고 끝까지 당당하고 치열하게 맞서며 Born to be wild!! 를 외치는 나를 그려본다. 



2010년 10월 25일에 쓴 리뷰를 정리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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