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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mpkin Jun 02. 2020

열광으로 몰아넣은 김문경의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

음악은 문학을 고향처럼 그리워하고 문학은 연인처럼 사모한다고나 할까



와우~!! 첫 페이지부터 탄성부터 터져 나왔다.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거지? 이 책은 음악에 관한 책이지만, 음악 안에 묻어있는 신화와 역사, 철학, 시대적 배경 그리고 조미료처럼 뿌려진 사랑이야기까지 그려져 있다. 책을 읽는 동안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이 시간이 다가오는 것처럼 애타는  아쉬움을 느끼며 미친 듯이 열광하며 읽었다. 너무나 맛있어서 꼭꼭 씹어서 온전히 내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가 소개하는 음악들을 하나하나 찾아 들으면서 그 안에 온전히 묻혀있고 싶었다, 아니 그 안에서 죽고 싶었다.

 

음악의 형식과 장르부터 작곡가의 삶의 배경, 지휘자에 관한 이야기, 같은 주제로 다르게 연주되는 그 시대적 배경은 어떠했는지. 음악은 어떻게 구분되어 있으면 이런저런 부분은 왜 현악기로 연주되었는지. 왜 합창으로 불러졌는지. 토카타가 그 부분에서 엉뚱하게 등장하는지 등등. 음악 전반에 걸쳐 하나하나 섬세한 부분까지 자신의 느낌까지 섞어서 비교 설명해주는 김문경의 섬세하고 감성적이면서도 박학한 지식에 나는 그저 경악할 뿐이었다.


나도 음악 없이는 못 산다고 외치는 사람 아닌가. 창피했다. 나는 무엇을 알아도 무엇하나 제대로 깊이 있게 전문지식을 갖고 아는 게 하. 나. 도. 없음에 한심스러웠다. 나는 좋으면 내 열망이 '즐거움' 안에서 충족되는 만큼만 공부한다. 딱 거기까지만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와 나를 비교해서 열등감을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나의 성향 때문에 어떤 한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삶을 사는 이들을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잡식성 다발성으로 여러 부분에 흥미는 많으나 햇빛을 한 곳으로 모아 불을 내는 돋보기처럼 그렇게 나의 흥미와 열정은 한 곳으로 열정적으로 모아지지 않는다. 초점이 닿기 전에 따뜻해졌다 싶으면 곧 다른 곳으로 분산되어버린다.




이 책이 그토록 재밌었던 이유는 ‘클래식’은 정말 문외한인 내게 클래식이 얼마나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신화가 있고, 철학이 있고, 역사가 있고, 삶이 있다며 살짝살짝 맛을 보여주며 내게 클래식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했다. 마치 살짝 맛을 보여주고는 ‘나 잡아봐라~’하며 꼬리를 감추며 도망가는 얄미운 그녀처럼 그렇게 나를 두근거림 속에 미치게 했던 것이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 그렇게 내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방인인 수많은 작곡가들과 지휘자들을 마치 지아들 이름 부르듯 불러대며 요리조리 사생활부터 기법에 이르기까지 주물럭대는 김문경. 그의 방대한 지식 속에 어떻게 빠져들지 않을 수 있는가.


새로운 분야를 안다는 것, 새로운 장르를 깊이 있게 배우게 된다는 것은 내겐 언제나 들뜸이고 흥분이고 즐거움이다. 더욱이 그것이 음악이라면 그 기쁨은 제곱이 아니라, 곱하기 Infinite 다. 게다가 보너스로 인제 이름 정도는 아는 척할 수 정도로 나의 지적 허영심을 가득 채워주었기에 또한 그렇게 행복한 포만감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은 다소 Old Fashion 한 제목과는 달리 이렇게 아주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내게는 너무나도 커다란 감동을 넘어선 감동과 흥분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은 저자의 너무나도 흥미롭고 재밌는 설명과 함께 나를 깔깔 넘어가게 했던 신세대적인 표현들 속에 내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느껴졌던 ‘클래식’이 조금 친근하게 느껴지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랬기에 그냥 읽고 페이지를 넘어가는 형식이 아닌, 저자가 책 속에서 찹터별로 나누어 다룬 주제로 다룬 음악들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읽었다. 김문경이 말한 부분이 어디쯤인지, 그가 그렇게 절절하게 느꼈던 부분이 어디쯤인지, 정말 그 웅장한 악기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는지 요정들의 춤으로 들렸는지를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리뷰를 뭉뚱그려하지 않고 역시 챕터별로 정리했다. 순간순간 느낀 내 느낌을 온전히 옮겨적고 싶었기에.. 또 그래야만 했기에...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Classic #1 오르페우스 열전


에우리디체와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바로 내가 사춘기 시절 들었던 바로 그 애절하고 슬픈 사랑이야기였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던 바로 그 이야기. 에우리디체는 혹시나 자기가 따라오는지 걱정되어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 때문에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며 죽게 되지만, 그때 에우리디체가 외친 한마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사랑해요 올페우스"


올페우스는 죽음을 무릅쓰고 죽음의 강을 건너기 위해 겁도 없이 죽음의 문턱에 왔느냐며 호통을 치는 지옥의 뱃사공 카론 앞에서 “사랑하는 그녀를 잃은 나는 심장이 없는 사람" 심장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며, 지옥이던 그보다 더한 곳이던 에우리디체가 있는 그곳이 천국이라며 절절한 사랑을 노래하며 결국 지옥의 뱃상을 감동시켜 죽음의 강을 건너며 결국 지옥의 왕으로부터 에우리디체를 되찾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순간의 실수로 에우리디체는 다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다시는 에우리디체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 올페우스. 애절하고 슬프다 못해 비극적인 사랑은 그렇게 지금까지도 우리의 가슴 안에 함께하는 올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사랑이야기.


이 작품은 서로 다르게 해석이 되는데, 이태리의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독일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그리고 프랑스의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르페오> 이 세 오페라의 성격과 내용, 그리고 왜 그런 다른 분위기의 오르페오가 나왔는지에 대한 시대적인 배경을 엿보는 것은 또 다른 별미였다.


특히,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아 영영 헤어지게 되는 장면이 각 작곡가의 구상에 따라 달라짐이 재밌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는 에우리디케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뒤를 돌아보고,  글룩의 오르페오는 에우리디케의 바가지(?)에 못 이겨 뒤를 돌아보고, 오펜바흐의 오르페오는 주피터의 시샘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는데, 앞의 두 오르페오는 헤어짐을 슬퍼하는 사랑의 오르페오라면, 마지막 오펜바흐의 오르페오는 지옥으로 도로 떨어지는 에우리디케를 보면 하는 수 없이 이미지 관리를 위해 지옥까지 가긴 했지만 그렇게 영영 헤어지게 됨을 내심 좋아하는 사랑이 완전히 식어버린 오르페오를 그려내며 짜릿한 재미를 안겨 주었다.


‘뭐니 뭐니 해도 2막 후반부에서 펼쳐지는 지옥의 무도회, 주름치마를 두른 여자 무용수들이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는 춤인 캉캉의 신화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남성 관객에게 더없이 흐뭇한 볼거리가 아닐 수 없다.’ (P35)

캉캉이 바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지옥의 무도회에서 시작된 것이라니. 다행히 유튜브에 귀한 자료들이 올려져 있어 ‘읽으며’ ‘들으며’ ‘느낄’ 수 있어서 공부하는 재미, 완전 입체적인 공부의 희열을 안겨주는 짜릿한 시간이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Classic #2 금지된 사랑


‘금지된 사랑’으로 이름 붙여진 2장에서는 역시나 ‘금지된 사랑’이 주제로 다루어진 베를리오즈의 ‘로미오와 쥴리엣',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그리고 쇤베르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소개되었다.


이 세 가지의 사랑이야기를 소개하며 김문경은 이렇게 구분을 하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풋풋한 십 대의 사랑이라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농염한 관능이 느껴지는 본격적인 성인들의 사랑이라고.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도 그쯤 되는 것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빼놓고는 처음 듣는 이름들이지만, 그랬기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곡들이 어떤 유명한 음악가들에 의해서 어떤 형식으로 재현되었는지를 아는 것도 재밌었지만, 음악가들의 삶과 사랑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그너가 그렇게 사랑에 열정적이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내게는 귀를 솔깃하게 하는 흥미로움이었다. 더욱이 그 대상들이 어느 파티에서 만난 여인들도 소개로 만난 여인들도 아닌 바로 자신의 후원자의 부인이나, 자신의 곡을 지휘할 지휘자의 아내였다니.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내적 갈등과 고통이 얼마나 깊었을까.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로 바그너와 플라토닉 사랑을 나누었던 자신의 후원자의 아내였던 마틸데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사랑의 아픔이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켰구나 싶었다. 그 절절한 사랑을 끝낼 수가 없어 무한 선율로 그리도 질질(?) 끌며 끝을 내지 못한 바그너의 애타는 마음. 현실에선 그럴 수 없어도 음악 속에서만이라도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 읽는 나까지 애절해지는 마음이었다.


어쨌든, ‘금지된 사랑’이 잔뜩 들어있는 2장에서는 새로운 사랑이야기들과 작곡가들의 삶과 사랑이야기를 엿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던 부분이다. 앞으로는 행복한 사랑이야기가 가득하여 극장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녀 가수들의 시신들로 넘쳐나지 않기를...




크로이처 소나타


Classic #3 소설 속에 흐르는 클래식


고향처럼 그리워하고 연인처럼 사모하기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처럼 엮인 쌍둥이 영혼 같은 관계. 그것이 바로 음악과 문학인 것이다. 그렇듯 소설 속에 흐르는 클래식이란 표현이 맞는 건지, 클래식 속에 존재하는 소설이라는 표현이 맞는 건지. 어떤 것이 소설이고 어떤 것이 음악인지 구분하기 힘들 만큼 온전히 두 장르가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음악은 문학을 고향처럼 그리워하고
문학은 음악을 연인처럼 사모한다고나 할까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곡’,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 그리고 토마스 만의 ‘키 작은 프리데만’을 통해 듣는 클래식은 소설만큼이나 드라마틱하고 강렬한 느낌으로 우리를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뜨리며 그렇게 자기네들 멋대로 우리의 감정을 휘둘러댄다.


중학교 때 권장 교양도서였던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곡.’ 물론 그 당시 나는 대부분의 또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책을 별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사실 지긋해했던 것 같다. ‘강제’로 읽어야 했던 교양 도서 리스트는 많은 우리에게는 ‘책을 읽는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기피대상으로 느껴지게 했으니. 좀 더 일찍 책에 맛을 들이지 못한 내가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강제 교육을 시킨 학교의 시스템도 문제는 있다고 본다. (물론 어쨌거나 나 같은 반항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 빠져 지낸 문학소녀들도 있었으니 개인차가 작용됨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


어쨌거나 내용상으로 볼 때 그 당시 내가 읽었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충격으로 느껴졌을 것 같은 느낌. 이 작품들을 대하면서 문학 작품을 많이 읽지 않은 나로서는 조금 부끄러운 시간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그 문학 작품들은 내 도서 리스트에 올려지고.


소설과 연결되어 있어선지 확실히 그 느낌은 더 강하게 다가왔고 더 깊이 느껴졌다. 전원 교향곡을 들으며 카라얀의 지휘가 저토록 아름답구나. 저렇게 깊이 온전히 자신도 하나의 음표가 되어 음악과 하나가 되는구나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전원 교향곡을 들은 건지 카라얀을 느낀 건지 그리고 그 맹인 소녀가 느꼈을 시냇물 소리를 함께 느끼려는 의지로 듣는 전원 교향곡은 마음에 평온함을 안겨주었고, 베토벤이 전원 교향곡을 썼다는 바로 그 시냇가와 나무와 새소리를 상상하며 듣는 느낌도 아주 특별했다..


전원 교향곡이 그랬는가 하면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바이올린 연주로 들을 때는 톨스토이가 말하는 ‘영혼의 흥분제’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문자 그대로 느끼며, 나는 격렬한 감정의 폭풍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입 부분만 들었음에도 이토록 눈물이 그렁대는 감동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니. 놀라운 경험이었다.


로엔그린과 ‘키 작은 프리데만’의 내용을 비교 분석하며 보여준 작가의 섬세함과 예리함에 놀라움을 느끼며 들었던 로엔그린. 그나마 내가 조금 알고 있는 플라시도 도밍고의 ‘저 먼 나라에’는 나를 감동 속에 허우적거리게 했다.


톨스토이는 왜 그는 자신은 지키지 못하면서 그렇게 엄한 규율을 삶에 적용시켰을까. 자신은 도박과 호객 행위로 그렇게 난잡한 삶을 살았으면서 그러한 행위를 혐오했다는 사실은 이해됨과 이해 안 됨의 경계선에 모호하게 나를 던져 놓았다. 그런 갈등 안에서 스스로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작가의 삶과 음악을 연결시켜 함께 느끼는 그 재미는 마치 Wonderland에 온 앨리스가 느꼈던 그 느낌에 비유되지 않을까. 문학과 음악 떨어뜨릴 수 없는 서로에게 빛과 그림자가 되어주는 그 존재가 어떻게 표현되는지 그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장이었다.




살로메


Classic #4 팜므파탈 이야기


이 네 번째 장에서 저자는 ‘카르멘’, ‘살로메’, ‘룰루’ 세명의 팜므파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카르멘은 비제의 오페라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이야기로, ‘사랑’과 ‘순수한 감정’을 핑계로 한 남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둥이 여자.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는 성경을 통해서 잘 알려진 엄마 헤로디아의 요구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헤로디아의 딸로 오스카 와일드의 터치로 아주 엽기적인 이고 광기 어린 팜므파탈로 재탄생한다.  


베르크의 ‘룰루’는 처음 들어보지만, 앞서 언급된 팜므파탈 중 가장 지독하고 질이 나쁜 구제불능 성 팜므파탈로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여성이다. 그런 여성이 내 주위에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감사를 드리게 하는 저질스런 여성.


여기서 보여주듯이, 자기를 사랑한 남성들의 감정을 가볍게 여기고 갖고 놀며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여자들.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결말은 어떤 것일까. 역시 파멸일 뿐이었다. 카르멘은 자신을 목숨처럼 사랑한 호세의 손에 죽고,  살로메는 그녀의 엽기적인 행각을 보다 못한 헤롯 왕의 손에 죽게 되고, 룰루역시 그 주위에는 그녀를 사랑한 이들의 시신들이 즐비하며, 그녀 역시도 죽음을 맞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그랬던가. 남녀 간의 사랑은 아무리 미화되어도 성욕이 핵심이라고.’ (P94) 


'결국 그런 것인가?' 오스카 와일드의 손을 거쳐 태어난 ‘살로메’는 정말 그야말로 ‘엽기’ 그 자체였다. 잘라진 세례 요한의 목에 키스하는 장면을 떠오르니 토할 것만 같았다. 마치 시리얼 킬러의 살인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고, 그녀가 부르는 노래 내용을 읽다가 오늘 먹은 내용물을 확인할 뻔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엽기적인 아이디어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왜 그런 살로메를 그려냈던 것일까. 김문경은 그런 야누스적인 ‘룰루’를 만든 베르크가 왜 그런 곡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지만,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심리상태와 정신적인 배경이 더 궁금했다.


어쨌거나, 죽여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악마적인 소유욕은 사랑과 정반대 되는 악적인 요소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세례 요한은 한 평생을 광야에서 산 예언자인데, 어떻게 그의 피부가 그렇게 아라비아 정원의 흰 장미보다 더 하얄 수가 있는지 말이다. 물론 극적인 요소를 더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분이긴 하지만, 사실감이 떨어지는 것 사실이다. 차라리 구릿빛 피부에 반했다고 하면 더 매력적이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 당시에 그렇게 일곱 개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던지며 마지막엔 전라가 되는 퍼포먼스가 얼마나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지금 현세대에서 그랬어도 난리 부르스였을 텐데 그 시대엔 오죽했겠는가.


1905년 드레스덴에서 열린 <살로메>의 초연은 스캔들에 가까웠다. 엘리트들이 모인 사교장이 관음증 환자들의 소굴로 면한 것 같은 분위기였으며, 시종일관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자극적인 음악에 비평가들은 마치 악취를 맡은 듯 불쾌해했다.” (P90)


룰루는 대체 이런 여성이 과연 존재할까 싶었다. 카르멘 같은 여자는 현실에서도 볼 수 있는 여성형이고, 살로메도 마찬가지다. 물론 살로메는 정상적인 여성이 아닌 정신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엽기 행각을 서슴지 않는 살인마의 심리 요소를 가진 여성일 게다.


비제를 제외하고 그 유명한 작가들이 왜 이런 이상한 주제로 곡을 만들었을지 궁금했다. 다행히 베르크는 저자가 그 의문증을 풀어주었고, 슈트라우스는 내가 알아봐야 할 듯싶다. 어쨌든 왠지 카르멘을 제외하고는 다른 곡들은 찾아서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정말 내키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그 엽기적이고 파멸적인 주제들이 오페라로는 어떻게 어떤 분위기로 표현되었는지 궁금했기에 들어보았다..


카르멘 중에서 골라 본 하바네라에서의 아그네스 발차는 너무 귀엽고 섹시한 데다 장난기마저 가득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남자였더라도 빠지게 될 것 같은.


이 세 팜므파탈의 작품 중 가장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은 바로 '살로메'였다. 보면서 너무나도 섬뜩하고 무섭고 그러면서도 살로메의 파멸적인 사랑이 느껴졌다, 사랑이란 잔인한 것.


나를 한 번이라도 바라보았더라면 나를 사랑했을 거라며 절규하는 살로메. 살로메의 눈빛과 광기에 가까운 사랑의 고백은 그 완벽한 연기에 전율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살로메는 상상할 수 없는 미친 연기력. 당신 입술에 키스를 했다며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인지 슬픔을 느끼는 것인지. 복합적인 심리상태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정말 숨을 죽이게 만드는 대단한 퍼포먼스였다.





Classic #5 신화를 동경한 음악


 신화에는 선과 악, 사랑과 증오, 평화와 전쟁, 삶과 죽음 등
시대를 초월한 인간 심리의 비밀이 가득 담겨있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다양한 주제로 가득한 신화를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라는 라틴어 서사시를 썼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디터스도르프라는 음악가에 의해 12곡의 교향곡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6곡 정도만이 악보가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변신 이야기> 중에서 오보에 협주곡을 들었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내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책에서 설명해준 부분을 상상하면서 마치 전원 교향곡 분위기의 평온하면서도 경쾌함을 함께 느끼는 시간. 책이 안겨주는 행복이다. 오보에가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피리도 아닌 것이 플루트도 아닌 것이 지친 영혼에 휴식을 너무 듣기 좋은 소리.


클래식은 한번 들으면 자꾸만 깊이 빠지게 되는 것 같다. 팝이나 가요처럼 쉽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진한 맛이 나는 느낌.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끼는 것. 작곡가의 삶에 대한 설명과 곡에 대한 이해,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난 후 느끼는 연주는 조금 깊이 다가온다고나 할까. 달콤했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41번 주피터에 관한 이야기 부분에서는 우선 모차르트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또한 삶의 환경이 바뀌면서 어떤 곡들이 만들어졌는지를 연결시켜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한 사람의 삶에 대해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모차르트가 어떤 가정에서 어떤 부모 밑에서 어떤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는지, 그리고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떤 상황에서 그는 고통을 느꼈는지를 아는 것은 내게는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모차르트의 삶을 엿보면서 아버지의 후광에 가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 당시 영국에서는 그의 영향력이 대단한 유명한 작곡가였 바흐의 막내아들 J. C. 바흐에게 모차르트가 교향곡과 협주곡 작곡법을 배웠다는 사실은 흥 로운 발견이었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편을 읽으면서는 얼마나 웃었는지. 특히 프랑스 작곡가 생상과의 대화를 읽다가 배꼽을 잡았다. 오페라를 관람하다 너무 지루한 나머지 “언제까지 저렇게 갑니까?”하고 묻는 생상과 “끝까지 저렇게 갑니다”라고 대답한 드뷔시. 그러고 보면 초보중의 초보인 내가 클래식 음악을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듣다가 잔다고 해서 뭐 그리 부끄러울 상황은 아닌 것이다 저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음악가들도 저런 느낌을 받는 정도면 나 같은 사람이야 오죽하겠나.


<목신의 오후>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현대 발레 곡으로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드뷔시가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를 읽고 감동을 받아  만든 곡이다. 시의 어느 부분과 음악의 어느 파트를 연결하여 듣는지를 설명해주는 자상한 김문경. 매력 떵어리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Classic #6 복수의 아리아


제6장 복수의 아리아 편에서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와 파발로치가 가장 사랑했다는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가 소개되어있다.


마술피리는 저자가 말했듯이, 정신 사납게 이어지고, 대본도 악역과 선한역이 바뀌고 왔다 갔다 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정신없게 한다지만 삶이란 게 그런 게 아닐까. 항상 악역도 없고, 항상 착한 역도 없는 것. 선과 악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렇게 때로는 착한 면이 나타났다가 어떨 때는 악에 사로잡혀 못된 부분이 드러나기도 하는. 그러기에 이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마술피리>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본성이 온전히 드러난 작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표현대로 ‘이혼한 부부’상을 그려보면 그대로 이해가 된다. <가면무도회>는 스토리가 매력적이었다. <가면무도회>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의 살인사건을 다룬 것이라는 구절을 읽고는 정말인가 싶어서 검색했더니 정말 그는 암살을 당했다. 단지 그건 <가면무도회>에서와는 달리 사랑으로 인한 암살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에서의 암살이었다는 것이 달랐다.


짧게 읽어본 그의 생애를 통해 느낀 그는 참으로 용맹하고 지혜로운 왕이었다. 스웨덴의 위상을 높였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민중을 위한 정치를 펼쳤던 구스타프 3세. 단지 아내인 소피아 막달리나와의 결혼만큼은 불행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까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관계만큼은 깨끗했던, 즉 그는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관계를 추구했다고 하니 참으로 멋진 남성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극에서는 그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인 아멜리아를 사랑하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된 부하 레나토는 가면무도회에서 국왕을 칼로 찔러 죽이게 된다. 아내의 배반보다 자신의 충정과 우애를 온전히 바친 왕에 대한 배신이 더 컸던 것이다. 남자들의 세계는 언제나 그렇게 내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의리, 충성, 존경, 사랑. 늘 가보지 않은 길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겠지.


내가 레나토의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나는 아마도 국왕을 탓하기보다는 아내를 탓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둘을 떠났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 무조건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걸까. 내 남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여인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래서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나는 과연 손가락질을 하며, 질투에 불타서 그와 그녀를 욕하며 부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이에 대한 자세는 모두가 다를 것이고, 나 역시 상상 속의 나와 실제 속의 나는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남편에게 사랑하는 운명의 여인이 나타났다면 나는 무슨 권리로 한 인간의 진정한 사랑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인생에는 공식이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다. 물론 원칙은 있지만,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 감성 부분이 아닐까 싶다. 단지, 서로가 인정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하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옳은 답이 아닐까 싶다.


이어진 <엘렉트라>는 거의 <룰루>와 맞먹었다. 완전 사이코의 전형. 물론 엄마의 불륜과 그 엄마라는 여자와 정부가 작당해서 그렇게 사랑하는 아빠를 살해하는 것은 처절한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아빠 아가멤논이 타고 다니던 말도 사랑하던 개들도 모두 죽여서 죽은 아빠를 시중들어야 한다는 부분에서는 완전 광기를 넘어선 광기였고, 이제는 어떤 목적을 위한 복수라기보다는 한 사이코가 벌이는 피의 향연 같은 느낌이었다.


오죽하면 저자는 <엘렉트라>를 감상한 이후에는 ‘푸치니의 <토스카>가 아이들 장난 같고, 난폭하기 그지없는 바그너의 오페라가 감미롭게 느껴질 정도’ (P142)라니 그 웅장함이 어떠한지 감이 가고도 남는다.




파우스트


Classic #7 파우스트에 매혹되다


음악과 문학의 만남.
그것은 참으로 매혹적인 결합이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매혹의 대상으로 느껴졌고, 여러 장르의 음악으로 표현되었다. 슈베르트가 좋은 시를 보면 악상이 저절로 떠오른다고 고백했듯이, 안 그래도 감수성 풍부한 음악가들에게는 괴테의 작품들은 매력적인 음악 소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번 7장에서는 괴테의 작품인 ‘파우스트’에 대한 여러 음악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그중에서 김문경은 슈베르트의 <물레 짓는 그레트헨>과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 그리고 말러 교향곡 8번 2부가 바로 그들이다.


슈베르트가 이 오페라를 만들었을 때의 나이가 17세라고 하는데, 저자가 말한 음악의 완벽성보다 나는 그가 이런 절절한 사랑을 음악으로 만든 나이가 그렇게 어렸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깊고도 고통스러우면서도 온전히 사랑으로 승화된 사랑을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을 그 어린 나이에 표현을 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의 중요성에 대해 과소평가를 하는 것이
음악적 지성이 높고 고매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다


리스트의 작품에 대해 읽는 동안 그에 대한 평가의 글이 나의 시선을 잡았다. 시니컬한 웃음이 나왔다. 물론 나는 리스트를 잘 모른다. 음악 수업 때 시험 출제 단골손님이었던 덕에 이름을 기억하는 정도일 뿐.


이 평을 읽는 순간 브라질의 유명한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떠올랐다. 소위 책을 좀 읽는다는 사람들은 작가로서의 그를 터부시 하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면, 마치 자신은 이성적이고 문학에 조예가 깊게 보인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참 웃기는 짬뽕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우아하고 고매하고 싶어 리스트를 과소평가하는 이들이나 지성인 인척 하며 빠울로 꼬엘료를 통속 소설가라며 우습게 보는 작가들과 독자들이나. 내게는  참으로 닮은 모습이라 코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에 언급된 말러는 김문경이 너무나 좋아하고 깊이 연구한 음악가다. 그래서 더 솔깃해서 읽었던 부분이다. 김문경의 말러에 대한 평이 참 재밌고 귀엽다.


말러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교향곡 8번에서 자신의 역량을 과잉으로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하나의 작품을 완벽한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예술가는 자신이 지닌 힘의 4분의 3만 표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완성에는 어느 정도의 여유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말러는 여운을 허용하지 않고 감상자를 극도의 흥분으로 몰아넣는 성향이 있다.(P162)


혹시 말러는 ‘열정적이고 표현력이 강하고, 저돌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예술 작품에서는 특히, 내면의 성향이 그대로 나타나는 법이니까.


어쨌든 말러 교향곡 8번은 결과적으로 후기 낭만파 교향곡의 묘비명이 되고 말았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러 교향곡 8번 그것은 세계대전 이전 유럽의 ‘좋았던 시절’의 마지막 황금빛 노을이 아니었을까’ 그랬을지도...





Classic #8 죽음에 대한 3가지 명상


죽음에 대한 3가지 명상을 읽는 동안 내내 눈물이 고였다. 미어지는 가슴. 잠시 큰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마지막에 쓰인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만든 말러의 이야기는 엄마인 내게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고 슬픔이었다. 형이 죽음으로 인해 첫째 아들이 된 말러. 맏형으로서 동생들이 그의 곁을 떠나가는 것을 보며 그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트라우마로 다가왔을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늘 그의 주위를 맴돌았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은 그쯤에서 끝나지 않고 그에게서 딸아이까지 빼앗아 갔다. 그 섬세한 말러가 자신의 큰 딸아이가 그렇게 죽음을 맞았을 때의 그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의 영혼이 절규하며 피를 쏟아내는 통곡이 내게 들리는 듯했다.


살아 숨 쉬는 것이 고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기에 숨을 쉴 수 있도록 무언가에 미쳐있어야 했을지도. 잠시라도 그 형벌 같은 고통에서 벗어서 숨을 쉴 수 있는 무엇이 간절히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음악’이란 그에게 그런 안식처요 휴식처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말러가 평생 느꼈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는 오로지 죽음으로서 그에게 평화와 안식을 안겨주었다.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생긴 매력적인 말러. 그에게서 느껴졌던 슬픈 분위기 바로 그가 대항할 수 없었던 ‘상실’이 안겨준 걷을 수 없는 그림자였던 듯.


슈베르트


이름이 주는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장가 때문인가. 아름다운 음악가로 느껴졌던 슈베르트가 매독으로 인해 썩어 들어가는 몸으로 그렇게 처절한 몸부림으로 불안과 좌절에 시달린 음악을 썼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의 서정성은
정신세계의 치명적인 독성을 웃는 낯으로 가려보려는
몸부림의 일환이다.

그랬던 거구나. 우리는 그저 그렇게 무심결에 들으며 지나치는 그 아름다운 곡들이 그는 처절한 고통의 몸부림 속에 썼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스티브 잡스 전기를 읽고 난 후 아이폰을 보며 느꼈던 애착 반응. 그런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온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해 만든 작품을 그냥 그렇게 스쳐 지나가듯 아무런 느낌 없이 본다는 것에 대해 미안해지는 마음. 앞으로 슈베르트의 곡을 들을 때는 평화로움보다 아름다움보다 고통이 먼저 느껴질 듯하다.


마지막으로 포레의 레퀴엠 이야기를 들으면서 ‘레퀴엠’이 음악에서 어떤 장르에 속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장례미사 음악이 포레 이전에는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분위기를 자아내었다는 사실 또한 흥미로웠다.


포레의 말에 공감한다. 우리는 삶을 전쟁처럼 산다. 그렇기 전쟁처럼 살지 않고 좀 더 느리게 속도를 줄이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려고 나름 노력한다.  어쩌면 그래서 ‘느림’에 대한 책들이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쓰나미처럼 휩쓸어가는 경쟁과 유행과 비교 속에 나 자신을 잃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색깔을 내며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우리의 살아가는 삶이 그러한데 죽음만큼이라도 좀 평온하고 휴식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죽어서 이제야 휴식을 취하러 가는데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길에라도 평화롭고 위로가 되는 음악을 깔아줘야 하지 않겠나. 무서워서 어깨가 움츠려 들게 하는 다른 곡들은 들어보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정신이 복잡한데 음악까지 들어가면서 움츠려들 거야 없지 않을까.


어쨌든 포레가 음악을 만들게 된 그의 생각이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평온하고 쉼을 안겨주는 곡을 만들어준 그가 고마웠다. 모든 것은 나 보기 나름. 죽음도 무서운 악마의 선물이 아닌, 편안한 친구처럼 이 삶에서 저 삶으로 넘어갈 때 함께 해주는 동행으로 느껴지면 좋겠다.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Classic #9 음표로 새겨진 전쟁의 참상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그것이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던 슬픔과 고통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다. 음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직접 전쟁을 목격하였던 쇼스타코비치나 운 좋게 미국으로 망명을 하여 전쟁을 겪진 않았지만 동포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전쟁의 참상을 그려낸 쇤베르크,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바로 전에 죽음을 맞은 영국의 시인 윌프레드 오윈의 시와 더불어 라틴경전으로 레퀴엠을 만든 브리튼 모두 전쟁을 직접 겪고 안 겪고를 떠나 전쟁의 참상을 지켜보거나 목격했던 이들에게 있어 전쟁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내가 전쟁에 대해 그저 막연한 두려움을 갖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두려움과 고통일 것이다. 전쟁을 겪고 있는 나라들의 국민들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그 고통을 느끼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모순적인 현실의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같은 공간 속에 같은 일상을 나누고 있지만, 누구는 그저 일상이 주는 힘겨움과는 차원이 다른, 생존과 직결된 처절한 고통 속에 삶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도록 차갑고 냉정한 삶의 모습이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하고는 있지만 각자의 슬픔은 각자의 몫으로 수용하며 감당해내야 하는 것인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온전히 스스로 겪어내야 하는 슬픔, 고통.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몸이 아파 군대에서 싸우지는 못했으나 나름의 충성을 다해 국민들을 위로하며 자신의 자리를 충실히 지켜낸 쇼스타코비치. 하지만 그가 지은 <레닌그라드>는 스탈린의 전쟁 승리를 위한 음악이 아녔다는 그의 고백이 나에겐 훨씬 더 공감이 간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전쟁의 승리를 염원하는 음악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나는 언뜻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처절한 죽음을, 살상을,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어떻게 자신의 나라의 전쟁 승리만을 염원할 수 있단 말인가. 전쟁 자체가 혐오스럽고 미친 광란의 횡포의 존재 바로 그 자체임을 알면서 말이다.


어쨌든, 예술가로서 히틀러가 들어오기 전 이미 스탈린의 손에 죽어간 수백만명의 국민들을 떠올리며, 아파하고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했던 쇼스타코비치의 그 고백이 내겐 깊은 공감 속에 위로와 함께 고개 끄덕여지는 부분이었다. 그의 말대로 스탈린이 시작한 것을 히틀러가 마무리해주었음을. 처절한 아픔 속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역사의 현실.


<바르샤바의 생존자>는 쇤베르크가 직접 쓴 가사를 읽으면서 어쩌면 쇤베르크는, 자기에게 주어졌던 '기회'라는 것을 가져보기도 전에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과 예술가들을 보며 자신이 살아있음에 대한 죄책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폭력적 행위에는 그럴듯한 대의명분이 내세워지지만
사람들은 이를 핑계로 자신의 악마적인 본능을 만족시킬 뿐이다.”


볼테르의 말처럼 “명분이 어떠하든 모든 전쟁은 강조 짓일 뿐’인걸.. 그러면서도 우리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그렇게 합당한 강도짓을 웃으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슬픔인지...


이 9장을 통해 나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여사가 아우슈비츠에서 벽에 그려진 나비를 보며 느꼈을 슬픔이 느껴져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우리 인간은 전쟁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걸까. 왜 우리 인간은 이렇게 저돌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 왜 전쟁으로서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그런 무모하고 모순적인 미친 짓를 하는 것인지 되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Classic #10 독일 음악 속의 영웅들



10장 ‘독일 음악 속의 영웅들’은 “나는 총칼로 승리한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영웅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오직 마음으로 위대했던 자들이다.” 로망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중 발췌한 구절로 ‘영웅’이라는 것이 단순히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무사나 군인들을 뜻하는 전쟁 영웅을 넘어서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영웅’을 의미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장에서는 ‘마음으로 위대했던 영웅’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과 영웅인지 꼭두각시인지 헷갈리는 바그너의 <지크프리트> 그리고 자아도취에 빠진 공처가 영웅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가 소개되었는데, 나는 그들의 음악에 대한 설명보다도 그들이 만든 <영웅>이라는 주제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이 재밌다.


베토벤의 <영웅>의 주인공이 나폴레옹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아주 재미가 쏠쏠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악보를 찢어버렸다는 이야기나, 악보에 ‘나폴레옹’이라고 쓰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귀족에게 음악이 헌정되었다는 사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음을 맞자 그에 대한 곡을 이미 써놓았다고 고백하는 부분이나. 역사에 걸쭉한 자국을 남긴 이들에 같은 세대를 살며 어떠한 연유로 연결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겐 아주 커다란 흥미와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바그너 부분을 읽다가 나는 아주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감상에 있어 4일이 소요되며 총 연주시간만 해도 16시간 정도 걸린다. 때문에 혹자는 이 작품을 철인 3종 경기를 뛰는 각오로 감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바그너는 이렇듯 감상자에게 온전한 복종을 강요하는 작곡가이다. 어쩌면 클래식을 지루하게 느끼도록 일조한 장본인일지도 모른다.’ (P215)


요 부분이 중요하다. ‘어쩌면 클래식을 지루하게 느끼도록 일조한 장본인” 내가 클래식을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지난날들의 핑계를 합당화시켜주고 정당화시켜주는 바로 요 부분. 한참을 웃었다. 하여간에 바그너는 좀 독특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성격도 강하고 카리스마틱 하면서도 감성적으로는 열정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 면이 매력적으로 보이면서도 참으로 성격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아녔을까 혼자 생각해본다.


음악을 듣는 감상자의 느낌까지도 컨트롤하고 싶었던 사람. 혹시 스티브 잡스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 아니었을까. 스티브 잡스도 그리 괴팍하고 열정적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에게 아직도 당신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고백하던 그런 감성적인 사랑을 했던 이가 아니던가. 사랑하는 와이프에 대한 고백을 읽으면 내 가슴은 또 얼마나 그렇게 뛰었더랬는지. 멋진 별들이다.


리하라트 슈트라우스의 영웅 부분에서는 완전 반전이었다. 자기도취에 빠진 음악가의 모습이란. 왠지 내 손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자화자찬으로 이어진 음악을 만들며 그는 정말 스스로가 그렇게 영웅처럼 느껴졌던 걸까. 어쩌면 현실에서의 공처가로서의 삶이 내면적으로는 영웅이고 싶었던 마음이 그렇게 음악으로 표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석을 하고 보면 그가 왠지 불쌍하고 왜소해 보이고 초라하고 불쌍하기마 저하다. 그 부인도 참 예의도 없지. 부부끼리 만나는데 자기는 피곤하다고 먼저 호텔로 돌아가다니. 그 멋진 말러 부부와 함께하는데 말이다. 그것도 열 발자국 떨어져 걸으라는 명령까지. 그렇게 말하는 와이프나, 그렇게 하는 남편이나. 그러고는 돌아와서 ‘그러기에 내가 필요하다’고 둘러대는 변명이나.


너무나도 카리스마가 넘치고 남성미가 넘쳐흐르는 남편과 살다 보니 피곤한 면도 많고 속으로 삭여야 되는 부분도 많아 부드럽고 온화한 남편였으면 싶을 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 남편이 이런 슈트라우스 같은 머저리 같은 남자였다면 정말 싫었을 것 같다. 부드럽게 감싸주고 보담아 주는 따스함과 더불어 남자는 자고로 남자다워야 하는 것. 갑자기 내 남편이 너무 멋져 보였다. 그래서 고마웠던 찹터였다.




송나라 시대 피리를 불고 있는 궁정악사들.


Classic #11 나로 하여금 취하게 하라


김문경은 앞서 여러 가지 주제들에 얽힌 음악들을 보여주었다. 사랑, 전쟁, 복수, 신화, 팜므파탈, 소설 등등.. 그런 가운데 어떻게 ‘술’이 빠질 수가 있겠는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번 11장의 주제는 바로 ‘술’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오델로>에 나오는 악마의 화신 이아고가 부르는 베르디의 ’ 건배의 노래’를 비롯하여, 말러가 이백의 시에 매료되어 지은 <대지의 노래>와 베르크가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의 시를 뽑아 만든 아리아 <포도주>가 소개되었는데, 나의 온 관심을 끌은 것은 단연코 말러의 <대지의 노래>였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점점 말러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그가 장녀 마리아를 잃음과 함께 개인적으로 처절하게 힘든 상태에 읽은 이백의 시 [춘일취기언지]가 바로 그의 <대지의 노래>에 영감을 주고 배경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다. 그 오래전에 독일 음악가가 동양의 시인의 시에 위로를 받고 영감을 얻어 음악을 지었다니.


김문경의 표현대로 서양의 보헤미안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에게 잔잔한 파문을 던질 줄 그 누가 상상했으랴. 그의 표현대로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말러에게 동양의 시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고. 특히 동양적 허무주의와 자연친화적인 로맨티시즘, 그리고 호쾌한 시상을 지닌 이백의 시가 그에게 커다란 위로이자 새로운 대안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백의 시에서 넘쳐나는 술기운을 빌어 끔찍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문경의 생각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내가 말러에게 점점 더 빠지게 되는 이유는 김문경처럼 그의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구스타브 말러’라는 인간에 대해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 그리고 나를 또 한 가지, 문학과 철학에 대해 관심도 많아 그 분야에 방대한 지식을 가진 지성의 소유자 말러. 그러한 그의 학구적이고 지적인 매력에 흠뻑 빠진 것이다.


이유나 동기야 어떻든 말러를 좋아하는 김문경의 깊이 있는 설명과 소개로 나 역시 그에게 점점 빠져들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궁금한 음악가 또 한 명 ‘바그너’ 그의 삶에 대해서도 읽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폭풍 같은 격정의 삶을 살았을 것 같은 음악가. 음악가들의 삶을 엿보는 것은 때로는 즐겁기도 하고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놀랍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 어떤 고통이 따랐던 역시 예술가들의 삶이란 내 눈엔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다. 고통을 넘어선 아름다움, 슬픔을 이겨내려는 모습 속에 비치는 아름다움, 내 안의 다른 나를 느끼고 싶은 아름다움, 문학과 함께하는 아름다움, 신화 속으로 데려가는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아름답게 느껴지기만 한다. 그들의 아픔까지도.




Classic #12 백조의 노래


‘백조의 노래’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지막 장은 백조는 ‘죽을 때 딱 한 번 아름다운 목소리로 운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작곡가 죽음을 앞두고 작곡한 마지막 작품을 일반적으로 ‘백조의 노래’라고 부른다는 저자의 설명에 가슴이 시렸다.


슈베르트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겨우 31살에. 그것도 매독에 썩어가는 몸을 부여잡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의 영혼을 쏟아부은 아름다운 작품들은 그 살아생전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 그래서 죽은 뒤에 장례를 치를 돈도 없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안도의 한숨도 나왔다. 만약 그의 작품들이 음악을 알지 못하는 문외한의 손에 넘겨져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졌으면 어쩔 뻔했나. 그렇다면 그 요절한 천재는 그야말로 무명으로 죽었을 것이며, 우리는 그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엔 그런 천재들이 많이 존재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후대에 빛을 볼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은 수많은 천재들.


나와 하루 차이로 생일이 비슷한 같은 물병자리 태생의 슈베르트. 그에게 무한한 사랑과 존경이 느껴졌다. 그리고 감사했다. 그의 음악이 후대에 알려질 수 있도록 그이 작품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세상에 보여준 그 누군가가 말이다.


슈만을 사랑한 클라라,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클라라 슈만을 사랑한 브람스.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그래서 더욱 가슴 시리게 하는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사랑. 자신의 부인을 사랑하는 줄 알면서도 젊은 음악가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를 세상에 길이 남길 음악가로 키워준 슈만도 너무 멋있고, 자신을 향한 사랑을 느꼈을 텐데도 그렇게 순수하게 관계를 이어간 클라라 슈만도 너무 아름답고, 그녀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는 브람스. 이토록 성숙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또 있을까. 그저 두고두고 보고 싶고 느껴보고 싶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다.


클라라 슈만이 오른손을 다쳤을 때 이때다 싶어 그녀를 위해 바흐의 음악을 한 손으로 피아노 칠 수 있게 편곡까지 해준 브람스는  그녀가 죽은 얼마 후, 행여나 그녀가 외로울 새라 얼마지 않아 죽음에 길을 따라간다. 한 평생 자신이 바라보고 따라가던 삶의 의미였던 클라라가 없는 삶이 과연 브람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


요즘처럼 그렇게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는 인스턴트 사랑이 난무한 세상에 과연 이런 사랑이 존재할까. 새삼 사랑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너무 쉽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너무 쉽게 사랑을 버리고 너무 쉽게 사랑을 떠나는 현대인들.


마지막 장에 이어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과 이야기를 읽으면서 앞장에서 공처가인 슈트라우스의 모습이 너무 머저리 같다고 쓴 표현이 조금 미안했다. 그가 공처가던 아니던 그건 그들의 문제였고, 어떤 모습의 부부 관계였던 슈트라우스와 파울리네는 그들의 방식대로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인데, 내가 그저 내 눈에 비친 작은 면 하나를 보고 그를 그렇게 매도한 것이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 >, 브람스의 <4개의 엄숙한 노래, 슈트라우스의 <4개의 마지막 노래>는 그들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설명을 들어선 지 가슴에 더욱 깊은 여운이 남아 그렇게 살랑거렸다...




음악평론가 김문경



마치 이 책을 읽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그렇게 열광 속에 허우적거리며 읽고 리뷰를 쓰며, 책에 언급된 음악을 들으며 보냈던 시간이었다. 정말 치열하게 임했던 시간이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흥분하고 열광하고 몰입했던 나 자신.


이 책이 참 좋았던 것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클래식이 조금 가까이 느껴지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음악들이 어떤 배경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만들어졌는지를 알고 음악을 들으니 그 깊이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다는 것, 황홀한 느낌.


음악뿐만 아니라 작곡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보너스였다. 게다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여러 음악가들의 작품과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배움을 얻게 된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요 즐거움이었다.


이 책으로 인해 나는 나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을 또 분명하게 느꼈다. 나는 정말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사실을.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어떤 고통 속에 어떤 행복 속에 어떤 작품이 만들어졌는지를 함께 느껴보는 것이 내게는 더없이 기쁨이고 흥분이고 즐거움이었다.


내가 더 이렇게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김문경의 음악과 작곡가에 대한 방대한 지식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신세대다운 필치로 나를 꺼이꺼이 넘어가게 했던 그의 윗트와 유머러스한 비유 덕분이었다. 그래서 너무 고마웠고 감사했던 마음.


김문경은 그냥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느낌’만을 나열하지 않는다. 시나 문학의 어떤 부분에 어떤 악기를 어떤 분위기를 내기 위해 사용되었는지까지도 표현하고 설명해주기에 읽는 이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다. 대체 어떤 음악일까, 어떤 부분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걸까 하고 말이다. 그의 느낌의 깊이와 음악과 문학과 철학의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문경이 말러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 많은 부분이 김문경과 말러가 참으로 닮은 것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무작정 음악을 좋아할게 아니라 그 음악을 만든 사람, 글을 쓴 사람의 삶도 알아보고 느껴보면 그들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음을 피부로 느끼며 나도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지식이 함께 하면 그 느낌을 더 풍요롭게 가질 수 있음을 배웠다. 긴 리뷰였다. 치열하게 읽고 느꼈던 책이었다. 그랬던 만큼 읽는 내내, 리뷰를 쓰는 내내, 음악을 찾으며 듣는 내내 참으로 짜릿한 행복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2012.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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