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umpkin Jun 03. 2020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by 빅터 프랭클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 
- 빅터 프랭클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내 책장에 제법 오랜 시간 꽂혀있던 책이다. 이제야 집어 들었다. 빅터 프랭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스티븐 코비 박사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통해서다. 스티븐 코비 박사는 그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그 후 그가 쓴 다른 책에서도 종종 그의 이름이 언급되곤 했다. 그렇게 빅터 프랭클과의 첫 눈 맞춤은 스티븐 코비를 통해서였다. 스티븐 코비와 함께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한국 정신의학계의 권위자인 이시형 교수가 번역을 했다. 그가 단숨에 한 호흡으로 정신없이 읽어내려 간 책에 대한 뜨거운 감정을 표현해놓은 서두를 읽으며 그가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덩달아 나도 그 열정에 잠기는 듯한 느낌마저 들고. 


알베르 까뮈가 떠올랐다. 알베르 까뮈가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섬’ 원고를 받아 들고 그 감정이 너무 벅차고 귀해서 책을 가슴에 품고는 단걸음에 달려 자기 방구석에 앉아 숨죽여 읽었다는 글을 읽으며 마치 내가 까뮈가 된 듯 얼마나 두근대었는지. 아마도 이시형 박사가 느낀 바로 느낌도 이렇지 않았을까. 나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런 느낌을 받았던 때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하게 느껴지며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와  먹먹해진다.


누군가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할 때의 그 순수한 열정, 너무 소중하고 귀해서 놓치고 싶지 않은 그 느낌을 나도 안다. 그런 멘토를 직접 학회에서 만나 강의를 들을 때 이시형 박사의 느낌은 어땠을까.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도 스스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흘렸을 것 같다. 그 벅찬 감정을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었을 거란 말인가. 내가 읽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그렇게 첫 서두부터 감동 드라마로 시작되었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경험한 이야기들은 감정의 표현이 넘침 없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마치 모노톤의 내레이션으로 보이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억지로 절제된 감정이 아닌, 자신이 제삼자가 되어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학자의 모습이 느껴졌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그것은 비단 책을 쓸 때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수용소에 있을 때도 그는 그렇게 자신과 동료들의 삶과 죽음을 오가는 순간에도 그렇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고자 했다. 만약 자신과 고통을 일치시켰더라면 그 극악한 상황 속에서 과연 견뎌낼 수 있었을까.



읽으면서 가장 고통스럽게 느껴졌던 부분은, 그들의 가족과의 이별이나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을 맥없이 지켜봐야 했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가장 무섭게 느껴졌던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선택을 매 순간 해야 한다는 것. 단순한 선택이나 호명이 바로 나의 삶과 죽음을 가름한다는 것.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매 순간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다는 것. 더욱 끔찍한 것은 그 선택은 그들 자신이 아닌 그 순간의 기분에 좌우되는 누군가의 결정이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르는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 속에서 모두들 숨이 멎을 듯한 극도의 긴장 속에 있다가, 비록 먼저 있던 곳보다 더 극악한 곳이긴 하지만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 함성을 지르며 기쁘의 춤을 추며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는 그들. 리뷰를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울컥하니 눈물이 그렁거린다.

정작 그 모든 고통을 겪은 프랭클 박사는 덤덤하게 써 내려갔건만, 그의 글을 읽는 나는 자꾸만 감정이 격해지곤 한다. 일을 하다 잠시 노을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리며 대화를 나누는 프랭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니체 –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


그들이 겪은 고통 속에 내가 있었다면 과연 나는 그 고통 속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까. 프랭크 박사의 말처럼 성자처럼 초연하게 맞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가장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 과연 나는 그 연장선 상에 어느 지점쯤에 점을 찍고 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경험하고 싶지는 않다.




프랭클 박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끔찍한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그것은 그가 견뎌낼 수 있게 하는 삶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그것이 그를 살아있게 했고, 그는 살아있음으로 우리에게 삶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그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게 하는 얄팍한 감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삶을 성찰하게 하고 지금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내 자세를 추스르게 하고 운동화 끈을 다시 동여매게 한다. 남들을 이기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 발걸음 보폭만큼 걸어가며 주위도 둘러보고 뒤도 때때로 돌아보며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차분하게 걸어가게 하는 것. 


삶의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빅터 프랭클 - 


지금 내게 주어진 기회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내가 선택한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어떤 의미를 지닌 결과로 이어질지를 차분하게 생각하게 한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것인지. 어떤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죽을 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말이다. 그냥 마음으로만 생각으로만 하는 결심이 아닌, 행동으로 옮기며 삶으로 살아내는 의미 있는 삶일 수 있도록.....


빅터 프랭클의 글로 리뷰를 맺는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 빅터 프랭클 -



나도 그러려고.

너무 행복하려 하지 말고,

무언가를 해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하는 동안 기회가 다가왔음에 감사하고, 

순간순간을 즐기면서 선물처럼 주어지는 행복을 누리려고..


이미 알고 있음에도, 

가끔씩 ‘성취감’의 기쁨이 유혹이 되어 욕심이 되는 걸 잊곤 한다.




2017. 6. 17.




매거진의 이전글 열광으로 몰아넣은 김문경의 <클래식으로 읽는 인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