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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mpkin May 23. 2020

나미야 할아버지와 도둑들

<참 소중한 당신> 2016년 7월호에 실린 글

 


 

벌레 먹은 잎사귀가 갈바람에 서럽게 서걱거리듯, 때때로 가슴에 시린 바람 불어 마음이 추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따뜻한 이야기로 마음을 데우고 싶어 진다. 그래서 집어 든 책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었다. 이 소설은 ‘2012년 중앙 공론 문예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일본의 추리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참혹한 살인 사건이나 악의를 묘사할 때도 인간의 선량함에 대한 믿음을 놓아버리는 일이 없었다. 오래도록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이유일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옮긴이의 말이다. 책을 읽으며 옮긴이가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이 작품에 푹 빠졌던 이유는 독특한 구성과 흥미진진한 스토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타고난 인간의 선함을 믿으며, 설사 범죄자일지라도 그 밑바닥엔 선함이 존재함을 믿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따뜻한 감성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잡화상 주인이었던 나미야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자신을 괴롭힐 작정으로 장난처럼 시작한 고민 상담을 해 주게 되는데…. 어떤 짓궂은 질문에도 정성스럽게 답변을 해 주는 할아버지에게 어느 날부터 진지한 고민을 해 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뉴스에도 나올 만큼 유명해지게 된다. 그리고 30여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세 명의 도둑, 쇼타, 고헤이, 아쓰야가 도둑질을 한 후 도망을 치다가 몸을 숨기기 위해 어느 집에 숨어들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폐가가 된 나미야 할아버지의 잡화점이었다.


숨어든 지 얼마 후, 그들은 무언가 박스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 안에서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뜯어봐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지만 피어오르는 호기심에 열어 본 편지는 고민을 털어놓는 내용이었다. 막상 읽고 보니 여린 마음에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어 답변을 주게 된다. 배움도 학력도 모자란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고민을 나름의 생각으로 진지하게 상담을 해 주는 모습은 코믹하면서도 따스한 웃음을 안겨 준다. 편지를 보내온 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조언을 각기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며 삶을 살아간다.


비록 어린 도둑들은 상담에 대한 전문 지식은 없지만,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나오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충고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하고, 문제를 직시하게 한다. 빙빙 둘러대지 않고 핵심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들 감정 안에 슬며시 감춰놓은 자신들의 진짜 얼굴을 맞닥뜨리게 하여 가면을 벗게 하는 것이다. “올림픽이라고 해 봐야 결국 운동회를 좀 화려하게 하는 것뿐이잖아.”(63쪽) 그러니 좀 화려한 운동회에 참가하자고 자기 입으로 그렇게 사랑한다는 사람 곁에 있지 않고 훈련에 참여하는 게 옳은 선택이냐는 식이다. 


고민을 상담해 오는 이들의 편지를 읽으며 답을 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하는지, 서로 다른 의견으로 투덕거리는 모습은 일상 속의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들의 투덕거림은, 비록 그들이 도둑질은 하지만, 아무 관계도 없는 이들의 고민을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이것이 아마 작가가 보여 주고 싶었던 선한 인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도둑질을 한 이유도 사실은 자신들을 보살펴 주고 키워 준 환 광원을 구하기 위함이었고.


나미야 잡화점의 마지막 상담 편지는 아무런 내용이 쓰여 있지 않은 백지였다. 나미야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써내려 갈 고민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삶 속에 원하는 어떤 방향이 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그 어떤 지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달리 보면, 나미야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원하는 대로 지도를 그릴 가능성이 무한히 펼쳐져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날, 나 역시 아쓰야처럼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알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며 방황했다. 미로 속에 갇혀 두려움 속에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을 통해 적어도 나는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간절히 원하는 꿈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많은 부분이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거짓 열망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물 위로 떠오른 거짓 열망들을 하나씩 하나씩 가지치기하다 보니 내 삶을 어떤 그림으로 그려내고 싶은지, 또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의아스러운 것은 내 길을 찾았다고 좋아라 할 때쯤이면 어김없이 또 다른 갈림길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는 사실이었다. 길을 찾는 일은 계속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그래서 삶은 고해라고 하는 건가. 자신이 가리켜야 하는 정북향을 향해 있으면서도 늘 떨고 있는 나침반의 바늘처럼, 나의 길을 가면서도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힐지 모른다. 그 물음에 대한 정답이 있을까.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바로 나의 길이 아닐까.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림자처럼 함께 할 삶의 질문이다. 백지 편지에 대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말씀이 내게 그토록 깊이 와 닿았던 이유였다. 


그저 마음이 추워서 집어 든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는 고민과 답을 통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삶의 방향과 길을 바라보게 했다. 덤으로 따뜻한 위로를 안겨 주었다. 내 책상에 놓여 있는 데스크 매트에 적힌 이철수 작가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서두를 것 없어요, 천천히 걸으세요, 길은 외길입니다. 당신이 가서 이르는 데까지가 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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