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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mpkin Feb 28. 2022

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 >를 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는 아주 우연한 기회로 읽게 되었다. 얼마 전, 평소 내가 좋아하고 따르는 젬마 언니께서 “전에 말한 책이야~ 이제야 갖고 왔네~” 하시면서 건네주신 책. 나는 얼떨결에 책을 받아 들었고, 꺼내보니 바로 이 책이었다. 그런데, 언니와 내가 언제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나? 곰곰이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언니가 나를 다른 분과 착각하신 거구나'였다. 책이란 그렇게 읽힐 사람에게 스스로 다가간다고 믿는 나. <사해 부근에서>는 그렇게 읽게 된 책이었다.


<사해 부근에서>는 여러 관찰자 측면에서 예수를 중심으로 시대를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인 ‘나’와 친구 ‘도다’, 알패오, 안드레, 시몬, 대사제 안나스, 쑥 파는 상인 그리고 빌라도 등등. 물론, 그중에 우리의 ‘백인대장’을 빼놓을 수 없다.


책 전체에서 예수는 넘치는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또한 기적까지 행하는 분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왜소하고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며 사랑으로 가득 찼지만, 사람들이 기대하고 고대하는 기적 따위는 일으키지 못하는, 그래서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버림받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떠나고 12명의 제자가 남았다고 하지만, 실은 예수를 떠나지 않은 제자는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 예수는 기적을 행한 것이 없고, 그것은 모두 혁명당원들이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예수라는 인물을 기적을 일으키는 메시아로 소문을 냈다. 하지만 실상 예수가 한 것은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쫓겨난 나병 환자와 열병환자들 곁에 머물면서 고름을 닦아주고, 물을 마시게 해 주고, 죽어가는 노인에게 다정하게 대하며 과부의 넋두리를 인내롭게 들어준 게 고작이었다. (P162)


<침묵>을 읽으면서 혹시 그 사건들이 진짜 역사 속에서 일어난 것들인지 궁금해져 인터넷을 뒤졌더랬다. 그만큼 생생하게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사해 부근에서>도 그런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욥이 모든 재산과 사랑하는 딸들과 가족을 모두 잃었는데, 성경엔 그가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부분은 나중에 제자들에 의해 쓰인 것인데 그것이 사실인지,  빌라도의 어머님의 정말로 아우구스토 황제의 오른팔이었던 빌라도의 상관 세이아누스의 집에서 일하는 청소부였는지. 또한 예수님의 기적은 실지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예수를 신격화하기 위해 여러 곳의 전승을 성경자가가 짜넣은 것이라는 부분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주인공 ‘나’와 ‘도다’의 순례 여정을 따라다니면, 이스라엘 성지 순례 때가 떠올랐다. 나에겐 이런저런 상황으로 거룩하고 은혜스러웠던 순례 여행이 아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성지 순례로 기억이 되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어쨌든, 그들의 발길을 따라가는 동안 가물가물 띄엄띄엄 그때 기억들이 떠올랐다. 


특히, 대사제 안나스가 예수님이 갇힌 감옥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상징적인 장소이긴 하지만 예수님이 갇힌 깊고 어두운 감옥이 떠올랐다. 그 안에 갇혀있는 예수님의 모습도.  그 까만 구덩이를 바라보면서 뭔지 모를 울컥함이 일었고, 두려움과 고통이 내게 전해져 눈물이 차오르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엔도 슈사쿠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님은 두려움 속에 떨고 계셨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가난하고 버림받은 모든 이의 고통이 자신이 짊어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계셨다.


갈릴레아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사랑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현실적인 기적을 더 바라고 있었다고 도다는 말한다. 그게 어디 갈릴레아 사람들만 그럴까. 현대에 사는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나 역시도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날라리 신자면서도 당연하게 당신이 내게 해주셔야 하는 어떤 의무감이라도 갖고 계셔야 한다는 듯, 그렇게 당당하게 ‘기도’라는 행위를 빌어 나를 위해 기적을 내려달라고 떼를 쓴다.


이젠 너무 당연해져 조금의 미안함과 죄송함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가 되어버린 나. 어쩌면 울어서 부은 것 같은 눈을 한 코바르스키 수사나 기치지로가 그토록 공감이 가고 애처롭게 느껴졌던 것은 바로 그 안에서 바로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사해 부근에서>는 전에 읽었던 엔도 슈사쿠의 작품인 <침묵>과는 참 다르면서도 닮은 느낌이었다. <침묵>은 조용한 것 같은 제목과는 다르게 매 순간 터질 것 같은 긴장의 연속으로 잠시도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었다면, <사해 부근에서>는 마치 흑백사진을 보듯 그렇게 잔잔한 듯 조용한 듯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한 마디로, <침묵>이 클라이맥스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템포의 구성이라면, <사해 부근에서>는 모노톤으로 읊조리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가 하면, <침묵>의 기치지로와 <사해 부근에서>의 코바르스키 수사는 내게 닮은 그림으로 다가왔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느껴지며 나와 동일시되던 인물 ‘기치지로’. 그는 죄를 지으며 괴로워하고 죄책감에 빠지며 고백성사를 하고 신부님을 도와드리지만, 자신이 어려운 곤경에 처할 때는 생존하기 위해 배교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사해 부근에서>는 ‘코바르스키 수사’가 그랬다. 울어서 부은 듯한 눈을 가진 코바르스키 수사는 주인공 ‘나’의 기억에서 비겁하고 옹졸하고 무시를 당해 싼 인물처럼 비친다. 수용소에서 그가 보여준 행위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생명을 지켜내고자 벌레처럼 매달리는 그. 하지만, 누가 그에게 침을 뱉을 수 있을까.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동정심이나 연민이나 사랑 따위는 그 수용소에서는 자살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P369)

 - 텔데데슈 집단농장의 의사인 야곱 이가르씨가 주인공 ‘나’에게 보낸 편지 중 -


엔도 슈사쿠가 그려 보여준 사랑만 있을 뿐 기적은 행하지 못하는 예수, 하지만 그를 한번 만나게 되면 영원히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예수. 골고다 언덕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상징적인 거짓 순례 장소라며 냉소적으로 대하는 다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떠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뱅뱅 돌고 있다.


무력했던 예수, 살아 있을 때는 아무것도 못한 예수를 위해 왜 제자들이 반평생을 그토록 헌신적으로 뛰었는지 알 수 없다는 도다는 여전히 예수를 만나고자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인공 ‘나’가 ‘코라르스키’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그분을 한 번 알게 되면 그분을 버리고 외면할 수 있어도 결코 잊을 수는 없었다.”


침묵을 읽었을 때처럼, 내 안에는 많은 의문이 남았다.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딱히 명료하게 표현되지 않는 막연한 느낌. 그래서 가슴이 턱 막히는 듯한 갑갑함. 엔도 슈사쿠가 만난 예수님의 모습이 내가 만난 예수님의 모습이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책에서 만난 예수님은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님이셨다. 그저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 가장 외롭고 아프고, 버림받은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 함께 해주시는 예수님은 곧 위로였고, 사랑이었고 치유였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분. 그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는 분.


내 안에 신앙의 불씨가 꺼져 버린 요즘이지만 <사해 부근에서>를 다시 정리하는 동안 내 자신을 가만 바라보며 고백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감동케 하시고, 당신을 바라보게 하시는 하느님.

그래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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