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에 천개의 태양이 빛나기를...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게 넘어가 고통 속에 절규하고 있는 그들을 보니 몇 년 전 할레드 호세이니의 책들을 통해 접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이 좀 더 가까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런 가운데 미라클 작전을 통해 한국 공관에서 일했던 아프간 직원들이나, 한국인들을 도와준 아프가니스탄인들을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왔다는 소식은 얼마나 감사한지. 지난 날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았던 우리가 도움을 주는 위치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뿌듯하고 감사한 일이다.
2년 전에 썼던 리뷰를 정리하여 다시 올려 본다.
할레드 호세이니는 ‘연을 쫓는 아이’는 “내 눈의 누르(빛)인 하리스와 파라,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에게”, 그리고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는 “내 눈의 누르(빛)인 하리스와 파라,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며 책 헌정의 대상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렇게 ‘연을 쫓는 아이’는 아미르와 하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마리암과 라일라의 삶을 보여주며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그려내고 있다. 마치 아프가니스탄 버전의 ‘여자의 일생’내지는 ‘오싱’ 같은 느낌이었다.
호세이니는 '천 개의 빛나는 태양' 소설 제목은 17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사이브에타브리지가 쓴 시에서 따온 제목이라 했다. 어쩜, 여전히 고통과 아픔이 이어지고 있는 사랑하는 조국 아프가니스탄에 천 개의 태양이 빛나기를 바라는 할레드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마리암
마리암은 부자인 아빠와 하녀 사이에서 하라미(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 잘릴은 매주 목요일이면 딸을 만나러 온다. 딸아이는 늘 불평만 하고 아빠에 대해 나쁜 이야기만 하는 버림받은 엄마 나나보다는 자기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고 선물을 주고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엄마는 그런 딸아이가 나중에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고 사회란, 삶이란 어린 마리암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지만, 어린 마리암이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아버지 잘릴을 사랑했다. 물론, 나나의 말이 꼭 옳다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마리암에게는 그렇게 삶은 펼쳐졌다.
결국 마리암은 아버지를 만나러 아버지 집엘 찾아가게 되고, 아버지를 만나겠다는 일념 하에 집 밖에서 밤을 새우게 되는데 아버지는 자기를 보았음에도 모른척하며 받아주지 않음을 알게 된다. 배신과 실망으로 인한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나나는 엄마의 자살을 목격하게 된다. 바로 마리암이 엄마가 자기에게 했던 그 모든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삶을 놓은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안게 된다. 아버지 잘릴의 세 부인들이 마리암을 자신들의 삶에서 떼어내고자 엄마인 나나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도 전에 부인과 아들을 잃은 나이 많은 구두수선공 라시드에게 강제 결혼을 시키게 된다. 아직 사춘기 소녀인 마리암이 여자로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름으로 적응하며 살아가게 되는 끔찍한 삶의 시작이었다.
라일라
라일라는 ‘부유한’ 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주 화목하고 교육열이 높은 집안, 특히 아빠 바비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하지만, 가정의 화목과 평화는 두 오빠가 소련에 대항해 싸우는 전쟁에 나가면서 깨지게 된다. 아빠인 바비가 허락을 해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아빠를 사랑했던 엄마는 남편을 미워하게 되고 침대에 누워 지내게 된다. 기본적인 엄마로서의, 아내로서의 역할마저 저버린 채 어린 라일라의 존재를 무시하며 오로지 슬픔과 히스테리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라일라는 아빠인 바비의 사랑으로 엄마의 빈자리로 인한 아픔을 견뎌낸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꽉 채워준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타리크’였다. 어렸을 때부터 이웃 오빠로 함께 자란 타리크는 라일라보다 두 살 위로 6살 때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고 의족을 하고 다녔지만 라일라의 온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둘이 꼭 붙어 다니며 어렸을 때는 친구처럼, 오빠처럼 그렇게 붙어다니다 나중에는 운명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파쉬툰족 피를 가진 타리크. ‘연을 쫓는 아이’에서 너무나도 매력적인 바바가 파쉬툰족이어서 그런지 타리크가 파쉬툰족이라는 것만으로도 내겐 참 믿음직한 청년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느낌을 틀리지 않았다.
타리크는 곁에서 라일라의 모든 기쁨과 슬픔과 설렘을 함께 하지만 결국 카불에서 일어나게 되는 수많은 폭격과 폭력으로 그곳을 떠나게 되며 라일라의 삶에 큰 아픔을 안겨주게 된다.
라일라의 아빠인 ‘바비’는 교사답게 열린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딸아이에게 ‘배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똑똑하고 귀여운 라일라는 자신이 아빠의 말처럼 나중에 카불 대학에 들어가 사회에 공헌하는 여성이 되리라는 꿈을 그린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탈레반이 점령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해진 카불에서 드디어 떠나려 했던 바로 그 날, 집에 폭격이 떨어지면서 엄마와 아빠를 잃게 되며 자신도 폭격으로 인한 잿더미에 죽을 뻔했던 그때 이웃에 살던 부부에게 구해주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라일라를 구해준 이웃은 바로 마리암과 그의 폭력적인 남편 라시드였다.
어쩌면 타리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쁨은 순간으로 끝나고 엄마 아빠를 모두 잃은 라일라. 게다가 타리크가 카불을 떠나기 전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결과를 그의 아기를 갖게 됨을 알게 된 라일라는 그 집에 더 있고 싶으면 자신과 결혼해야 한다는 라시드의 제안에 받아들이게 된다. 그 전쟁 통에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해서 라일라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삶이 시작이 된다.
마리암과 라일라..
마리암은 7번이나 임신을 하지만 매 번 아이를 잃어버리게 되면서 라시드의 온갖 폭력과 무시와 멸시를 감당하며 살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금발의 아름답고 지적인 라일라의 임신은 그녀의 위치를 더욱 위축시켰다. 하긴, 애초에 그녀의 ‘위치’라는 것은 라시드의 집에서는 없었다. 그저 가정부의 역할이었을 뿐. 그리고 때때로 그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게 되는 폭력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겐 그것이 자신의 공간이었고, 자신의 삶 전부였다. 그런 삶이 라일라로 인해 침범당하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리암도 라일라도 타고난 선한 품성을 지닌 여성이었다.
라일라는 마리암이 자신으로 인해 라시드에게 더 천대받게 되는 상황에 미안해 하고 있었고, 잘 지내고 싶었지만 마리암에게 라일라는 그나마 숨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었던 자신의 삶을 온통 훼저어놓은 미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어느 날, 라시드가 마리암에게 마구잡이로 때리는 그 순간 마리암을 보호하고자 라시드를 막는 그 순간에 두 여성 간에 끈끈한 감정이 싹트게 된다. 물론 마리암의 사랑을 잡은 것은 라일라의 딸 아지자 때문이었다. 갓난아기는 이 지자는 마리암을 무방비상태로 만들게 하는 사랑과 미소를 건네며 그렇게 온몸으로 따랐다. 마리암에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필요로 하는 대상이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첫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서로를 의지하는 가족에게 느끼는 사랑은 시작되었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라시드로부터 자행되는 그 끔찍하고 힘든 고통을 서로를 의지하며 견뎌낸다. 마리암에게 라일라는 한 번도 주어지지 않은 갖지 못한 딸이었고 하지자는 손녀였다. 라일라에게 있어 마리암은 자기 삶 속에 존재했으나 느끼지 못했던 사랑을 부어주고 보호해주는 엄마였다.
결국 마리암은 라일라를 구하기 위해 라시드를 죽이게 되고, 라일라와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그들을 떠나보낸다. 죽은 줄 알았던 타리크와 딸처럼 사랑한 라일라가, 자기는 가져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는 이지 자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잘마이로부터 아버지를 빼앗음에 대한 속죄하기 위해.
어쩜 마리암은 그저 생존하기 위해 여자라는 이유로 무식하고 폭력적인 남편 옆에서 벌레처럼 살아온 삶이 그리 허망하지 않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삶에 불쑥 나타난 라일라와 이지자로 인해 어둡고 칙칙했던 자신의 삶이 컬러링 되고 의미가 부여 졌음에 비록 더 함께 할 수 없는 삶이 안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사랑하는 이지자가 커가는 모습을 보고, 손톱에 예쁜 물을 들여주고,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이지자의 아이들과 놀아주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적어도 그들과 잠시지만 함께 하며 ‘사랑’을 느꼈던 삶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눈 앞에 닥친 ‘사형’에 의한 죽음이 두렵긴 했어도 마음 한편엔 평온함이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마리암은 이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많은 걸 소망했다. 그러나 눈을 감을 때, 그녀에게 엄습해온 건 더 이상 회한이 아니라 한없이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그녀는 천한 시골 여자의 하라미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쓸모없는 존재였고,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불쌍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잡초였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이자 벗이자 보호자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어머니가 되어, 드디어 중요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마리암은 이렇게 죽는 것이 그리 나쁜 건 아니라고 했다.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이건 적법하지 않게 시작된 삶에 대한 적법한 결말이었다,” (P506)
마리암의 희생과 죽음이 헛되지 않았던 것은 라일라가 타리크와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이루며 행복으로 채우며 가꾸어가 가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음이었다. 때때로 두려움에 사로 잡히고, 아직 아빠를 그리워하고 타리크에게 뭔지 모를 증오심을 갖고 있는 어린 잘마이가 마음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잘마이에게 아빠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져 갈 것이고, 타리크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었다. 라일라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타리크는 잘마이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고, 결국 잘마이는 사랑으로 다가오는 타리크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재밌는 것은 이지자는 타리크가 자신의 진짜 아버지인지도 몰랐으면서도 그에게 끌림을 느끼는 부분이었다. 타리크는 얼마나 놀랍고 행복했을까. 라일라가 그 끔찍한 상황에서 어떻게 아지자를 지켰는지. 예쁘게 키웠는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반듯하게 자라준 아지자가 고마웠을 것이고 함께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둘의 사랑은 또 하나 생명이 되어 라일라 안에 심어지게 되고, 그녀가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을 현실이고 현재 속의 진행형임을 알려주는 스토리는 끝난다.
“음.. 뭐지..?”
책을 읽을 때는 의외로 덤덤했는데 리뷰를 쓰는 동안 울컥거리며 눈물이 자꾸만 떨어졌다. 물론, 마리암과 라일라의 이야기가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여성의 삶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그런 삶을 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곳에서 여성들이 어떤 존재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군주제가 무너지고 소련이 점령하면서 무자히딘의 투쟁으로 정권이 넘어가고 결국엔 드디어 숨을 쉬게 되었다고 좋아라 했던 것도 잠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탈레반 정권이 들어오면서 자신들에게 어떤 운명이 닥칠지를 상상 속에서도 그려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여성의 재능이 인정되고 사회적 지위가 주어지고 여성의 교육이 자유로웠던 시대는 탈레반 정권이 들어섬과 함께 끝이 나고, 여자는 사회생활은 전혀 할 수 없으며, 눈만 보이은 부르카를 착용해야 하고, 절대 밖에 혼자 다닐 수 없으며 남편과 함께 동행해야 되는 등등의 사회 규제는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노동력인 여자를 집안에 가둠으로써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었던 정권 교체와 전쟁으로 퇴보하게 되는 아프가니스탄의 찬란했던 문화는 더욱더 악화되게 되고 수많은 난민들을 배출하게 된다.
“아프간 난민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위기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는 벌써 30년이 다 되었습니다. 전쟁, 기아, 무정부, 핍박은 이 소설에 나오는 타리크와 그의 가족처럼, 수백만 명의 아프간 사람들로 하여금 집을 버리고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이웃나라인 파키스탄과 이란에 살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들의 탈출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는, 8백만 명에 달하는 아프간 난민들이 해외에 살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2백만 명이 넘는 아프간 난민들이 파키스탄에 남아 있습니다.” (564)
작가 호세이니의 말이다. 8백만 명.. 2백만 명..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많은 숫자의 난민들이 해외를 떠돌고 있다. 누군가는 해외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기회를 얻어 살고 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처절한 고통의 연속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호세이니가 UN 난민 기구에서 특사로 일하는 이유다. 호세이니를 떠올리면 ‘연을 쫓는 아이’에서 나오는 아버지 바바가 떠오른다. 온 삶을 통해 사랑한 것은 아내와 아프가니스탄이었던 바바. 호세이니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사랑은 바바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슬람 문화권에 관한 책을 얼떨결에 연이어 세 권을 읽었다.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와 할레드 호세이니의 처녀작인 ‘연을 쫓는 아이’와 두 번째 작품인 ‘천 개의 태양’. 이 세 작품을 통해 느꼈던 것은 정말 내가 얼마나 왜곡된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었고, 각성되고 반성되고 나를 성찰하게 하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이슬람’에 대해서만 아닌,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판단을 하고 비판을 하는가.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함에서 오는 무지임을 모르고, 그저 조금 아는 것. 극히 일부만 아는 편협된 지식으로 얼마나 난도질을 하는지.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두려움.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틀렸다 하고 내가 옳다고 박박 우기며 덤벼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동안 이슬람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고, 때론 굴절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 식의 왜곡된 시각이 각인되어 이슬람은 호전적이라는 편견이 굳어졌고, 은연중에 일부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를 이슬람과 결부시켰다. 이런 편견을 버리고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지려면 이슬람에 대해 바른 이해가 필수적이다.” (P575)
아프간 인질 사태 이후 외교통상부 장관이 했던 말은 깊은 공감을 안겨준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하며 떠들기 전에 ‘바른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어도 침묵할 줄 아는 용기, ‘알아보고자 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함을 다시 한번 절절하게 느꼈다. 그리고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늘함 속에 통렬하게 느끼게 하는 고마운 작품들이었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와 ‘천 개의 빛나는 태양’을 번역한 왕은철 교수의 말을 옮겨본다.
“적어도 우리는 이슬람교가 살람(평화)의 종교라는 평범한 사실부터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편견은 원자보다 깨기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한테 배어 있는 편견을 깨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호소력이 강한 이슬람 문화와 접촉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 접촉이 우리에게 이슬람들이 낯선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소련의 침공 이전의 평화로운 시기에서부터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의 파란만장한 아프간 역사를 아우르고 그 역사를 살아야 했던 아프간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과 사랑과 염원이 녹아들어 있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 (P575)
내가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깊은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그들에게 천 개의 빛나는 태양이 그들에게 비치기를…
두 손 모아 고개 숙여 겸허한 마음으로 기. 도. 드. 린.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