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을 밝히는 심리 실험
‘로렌 슬레이터’, 왠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참으로 아름답고 지적이면서도 아주 세련된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지녔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쩜 ‘로렌’이라는 이름이 주는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검색을 게을리한 탓인지 아니면 사이트를 잘 찾지 못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를 많이 구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책에 쓰여 있거나 인터넷 서점에 올려져 있는 정보뿐. 그녀는 심리학자고, 작가고 칼럼니스트이며, 하버드 대학과 보스턴 대학에서 심리학 석, 박사를 마쳤다는 질투 나는(?) 이력서와 ‘미국 최고의 수필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는 것과 도한 ‘뉴 레터 문학상’의 논픽션 부분 창작상 부분을 수상했다는 그야말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그래서 더 궁금했다. 무엇이?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가.
책을 읽으며 느끼는 로렌은 참으로 예리하고 치밀하다. 그녀는 심리학자들의 연구실험에 관한 글을 쓰면서 마치 그들을 실험대상으로 놓고 연구하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녀 역시 심리학자임으로 때때로 학자로서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녀의 수필가로서의 감성 속에 느껴지는 그녀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지적은 읽는 이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었으며, 그녀만의 시니컬한 유머는 순간순간 진지하게 읽고 있는 나를 배꼽 잡게 하며 그녀의 책을 읽는 재미를 더 해주었다. 여자인 내가 봐도 너무나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그녀가 심리학자라는 것도, 그녀가 뛰어난 수필가라는 것도.
그녀는 미적 감각을 지녔다. 내가 느끼는 그녀는 미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다. 자신이 연구하는 심리학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실험에 관한 냉철하고 차가운 질문을 거침없이 퍼부어 대면서도 그녀는 상대방이 가진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가슴 저리게 멋진 알렉산더 교수’.. ‘핸섬한 네덜란드인 정신의학자 반 데르 콜크’, 그런 그녀의 표현들이 그녀의 미에 대한 감각적인 감성을 함께 느끼게 해 준다. 위대한 연구가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해대면서 그들의 외모를 찬찬히 뜯어보며, 마치 상대방을 현미경 밑에 갖다 놓고 그의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심리 상태를 함께 해부하고 분석하고 느껴보는 아름다운 여성. 그녀와 인터뷰를 하는 학자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또한 로렌은 참으로 탐구심이 많은 학자 여성이다. 알렉산더 박사의 마약 중독 실험 편에서 언급했듯이, 어떻게 스스로 마약을 복용하며 그 느낌과 반응을 관찰하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을까. 너무나도 엉뚱한 면을 가진 다양한 색을 띠는 재밌는 여성이었고 그러한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똘똘 뭉친 개구쟁이 같은 그녀의 엉뚱함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올려놓은 자신의 마약 복용에 관한 관찰 결과를 보면 그녀 특유의 시니컬함이 느껴진다. 이리도 저리도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일관성 있게 고수하는 그녀. 참으로 멋지단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얼마나 재밌는 일인가? 나에겐 그녀야말로 연구대상이다. 매력덩어리 로렌, 그녀의 작품으로는 <Love Works Like This>, <Prozac Diary>, <Lying, A Metaphorical Memoir> 등이 있다.
로렌 슬레이터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위험한 생각들’을 읽을 때의 흥분과 호기심이 그대로 느껴졌다. 영화나 소설에서 볼 것 같은 흥미로운 심리 실험 (무섭고 두렵기까지 한), 심리학자에 대한 신화처럼 부풀려진 이야기들.. 그리고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주제들. 그와 함께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작용되는지. 그들의 심리 실험에 함께 떠나는 여행은 놀라움과 경악스러움, 그리고 두려움과 흥미로움이 함께하는 추리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해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인간의 본성을 밝히는 심리 실험
P7 훌륭한 심리 실험은 인간의 경험을 압축시켜 우아한 본질만 남도록 걸러낸 인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의 각 요소들을 정상적으로 조합하여 특정하게 설정된 상황에서 사랑과 두려움과 순응과 소심함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분석하는 상징적 의미의 실험관이기도 하다. 위대한 심리학 실험은 인간의 특정 행동 영역이나 정신없이 돌아가는 혼잡한 인생 속에 묻혀 있는 한 부분을 확대하여 보여준다. 이러한 렌즈를 통해 우리는 d리 자신에 관한 것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P9 심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빌헬름 분트는 1800년대 후반에 세계 최초로 측정을 전문으로 하는 도구 중심의 심리학 실험실을 열었고, 바로 그 실험실에서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태동하였다.
1. 인간은 주무르는 대로 만들어진다. - B. F. 스키너의 보상과 체벌에 관한 행동주의 이론
참 묘한 기분이었다. 서스펜스 영화의 양면성을 본 듯한 느낌. 영화를 보는 내내 우울하고 무서워 마음 졸이며 보았는데, 알고 보니 사랑이야기. 그런 느낌이랄까. 로버트 드 니로 주연한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보았을 때와 같은 바로 그 느낌이었다.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낸 닥터 빅터를 죽였지만, 아버지였다며 슬퍼하며 빅터를 안고 빙판이 된 바다로 사라지며 그와 함께 죽음을 맞는 프랑켄슈타인. 사실 프랑켄슈타인이 원했던 것은 단 하나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모든 상황이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는 단지 자신을 탄생시킨 아버지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얼마나 울었었나. 이 스키너 편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이 바로 그랬다.
스키너의 이야기는 마치 프랑켄슈타인 영화를 보듯 그랬다. 차갑고 암울하고 회색적인. 심지어 신화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스키너를 둘러싼 모든 과장된 이야기들. 그의 큰 딸 쥴리 바르가스와 로렌의 전화 내용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북받치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내가 스키너 박사의 딸이라도 된 듯 알 수 없는 감정 속에 눈물이 흘렀다.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로렌이 10년도 넘은 스키너 박사가 임종 전에 한입 베어 물었던 먼지 쌓인 초콜릿을 스키너의 입술 자국 옆에 자신의 잇 자국을 내었다는 부분에서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터지고.
현대 행동주의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심리학자 스키너 박사. 그의 위대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왜곡되었던 것들도 있다. 딸 쥴리는 말한다 오해의 여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들, 그러니까 적절한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음을. 딸을 상자에 넣어 실험하는 부분에서는 모든 과정은 생략되고 결과만 가지고 그를 마치 사랑이라곤 없는 비인간적인 심리학자로 오랜 시간 많은 이들에게 인식되었을 때 그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딸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래서 스스로 “나는 휴머니스트인가?”하고 물었던 건 아닐까...
스키너 박사 덕분에
사람들이 처벌보다 보상에 더 많이 반응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 실험 심리학자 브라이언 포터 -
나는 스키너의 이론을 잘 모른다. 그의 이름도 앞에서 고백한 대로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으니 그의 이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감히 나의 작은 의견조차 내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짧은 몇 페이지를 통해 그가 내세우고 싶었고 주장하고 싶었던 진정한 이론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또는 시기를 했던 이들로부터 왜곡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스키너 박사의 행동주의 편을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읽어지기보단 더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져 이 짧은 글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려야 했다.
로렌을 아버지의 집으로 초대했던 쥴리.. 그녀는 어쩜 로렌에게 순수한 인간미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아빠 스키너 박사의 연구의 의도를 순수하게 왜곡되게 표현하지 않을 것이란 안도감을 느꼈던 같다.. 그래서 아빠와의 기억을 함께 나누며.. 아빠를 좀 더 가까이서 만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마치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을 당시엔 몰랐지만, 심리학을 공부하게 되면, 심리학을 주류를 이루는 다섯 기둥 안에 들어가는 스키너의 행동주의 이론을 배우게 된다. 흥미로운 실험을 통해 보상과 처벌을 연구하며, 보상이 우리 인간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배우게 된다.)
2. 사람은 왜 불합리한 권위 앞에 복종하는가?- 스텐리 밀그램의 충격 기계와 권위에 대한 복종
스키너 박사에 관한 글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면, 밀그램 박사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는 배꼽을 잡았다. 그의 엉뚱함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괴짜 과학자,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정말 재밌는 것은 그가 뉴욕의 보도블록에 자신의 편지를 떨어뜨렸을 때, 만약 내가 그 편지를 주웠다면 나는 답장을 썼을까. 물론 불순한 내용이라면 버렸겠지만, 어떤 흥미로운 내용이었다면 아마도 답장을 보냈을 것이란 상상을 하면서 혼자 킥킥거렸다. 마치 무엇이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쳐다보고 있는 밀그램을 떠올리니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재밌게 읽어나갔던 밀그램의 ‘충격 기계와 권위에 대한 복종’ 편은 충격 기계만큼이나 충격이었다. 실험을 집행한 실험자나 그 실험에 참여한 피실험자 모두 그들이 그 실험을 하기 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은 그 실험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밀그램이 느꼈을 경악이란. 그가 피실험자들에게 쓰는 편지에서 그의 깊은 슬픔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가 순진하게 생각했던 그 당시의 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피실험자들이 화가 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분노와 살인이 무관할 수 있음을 효과적으로 증명했다
그 실험 때문에 순응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반항자로 바뀌었고, 심지어 동성 연애자임을 숨겼던 순응자였던 사람은 스스로를 당당하게 나타내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주위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었고, 장래가 촉망되던 밀그램은 자신의 직장을 잃었고, 밀그램은 사람들에게 기피대상이 되었고 자신이 익숙하던 세계에서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는 신세로 그로 인해 깊은 상실감에 빠진 그는 결국 병으로 자신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실험을 통해 너무나도 놀라왔던 것은. 그 실험 참여자들이 공산주의자들도 아녔고, 성격파탄자들도 아닌, 지극히 사랑 많은 평범한 가장이요 직원이요 학자들로 다양한 사회 구조의 일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고, 그들의 65%가 반항할 수도 있는 모순적인 권위에 순종했다는 사실이었고,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바로 로렌의 고백처럼 우리 역시 그 65% 안에 속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자신도 결코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실험이라 너무나도 소름이 끼쳤다. 여기서 나는 학생 시절 충격 속에 읽었던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양해서 어떤 확률이나 통계로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들. 환경적인 것으로만 해석될 수도, 또한 가계 혈통이나 성격으로 만도 해석될 수 없는 복잡한 심리상태와 행동들.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뭔지 모를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위에 복종하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알고 싶었던 순수한 밀그램의 의도는 스스로도 그 결과에 놀라고 경악했을 만큼 그렇게 비극적인 사실을 알려주었고 그것이 그의 삶에 커다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에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모든 것이 예민했던 시대적인 환경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그가 지금 그 실험을 하고 그 실험에 대한 결과를 발표했다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반응과 반항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치든다..
3. 엽기 살인 사건과 침묵한 38명의 증인들 - 달리와 라타네의 사회적 신호와 방관자 효과
마침 이 편을 읽는 시각은 밤이었다. 제목이 나의 어쩔 수 없는 호기심을 너무나도 자극해버려 잠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스토리는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듯 처음부터 공포스러웠다. 얼마나 두근거리며 마음을 조이며 읽었는지 행복한 마음으로 잠들고 싶었던 내 마음과는 달리, 너무나도 무서워서 자려고 눈을 감아도 그 무서운 장면과 사람들의 냉소적인 무관심이 눈앞에 어른거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너무나 무서워서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조차 힘들었다.
불을 끄고 누운 내 머릿속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 머리 안에서 시끄럽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왜 전화를 하지 않았던 걸까..?”
“왜 그 수많은 사람들은 모른 척했을까?”
로렌의 말처럼 한통의 전화로 모든 게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범인이 고발자가 누군지 알게 되는, 그래서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도 아녔는데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모른 척할 수가 있었을까. 사람이 칼에 찔려 살려달라고 신음을 하는데 그 범인이 세 번이나 돌아와 자신의 범행을 완벽히 완수(?) 하는 동안 그들은 왜 침묵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범인보다 그들의 침묵이 더 무서웠다. 철저한 외면 속에 그렇게 처참히 죽어간 여인 키티 제노비스. 그녀는, 그녀의 가족은 도대체 누굴 붙들고 피 끓는 한이 맺힌 울음을 터뜨려야 했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설 속의 이야기도 영화 속의 이야기도 아니다. 만약 영화나 소설로 누군가가 지어냈다면, 너무나도 억지스럽다며 관객몰이에 실패했을 법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실지로 우리의 일상 속에 버젓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경악스러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밀그램의 실험에서처럼 이라면 나 역시 그 침묵한 증인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 무서웠다. “난 절대 아냐~”라고 과연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이 느끼는 책임감은 적어진다는 것이었다.
군중들 사이에서 책임감이 공평하게 나누어지기 때문이었다.
책임감 분산이 사회적 예절과 결합하게 되면
그것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생사가 걸린 상황도 무시하게 된다.
나의 이런 끓어오르는 의문은 나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심리학자 달리와 라타네는 그에 대한 반응을 알기 위해 실험을 했다. 결국 그들은 침묵한 증인들이 현대사회의 냉담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 분산’, 또는 두려움, 그리고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함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 즉 생존보다 사회적 예절을 더 중시함을 보여주며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납득이 가는 분석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위험한 무언가를 목격하거나 참여하는 상황이 ‘혼자’ 일 경우에는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빠른 행동 속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곧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연구 결과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내가 연기 실험에 참여했다고 해보자. 나의 반응은 어땠을까. 어쩜 나도 그들처럼 그냥 그렇게 ‘괜찮은가 보다’하고 앉아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왜냐면 나보다 더 많은 숫자인 두 명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만있었고, 어쩜 나는 심리적으로 ‘아무것도 아닌가 부다’하고 안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의 무의식의 행동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난날 동안 ‘절대로 난 아니야’라고 강하게 말했던 것을 어느 순간 행하고 (‘당연하게’는 아니더라도) 있음을 경험해왔다. 나는 내 말을 지키지 못하는 언행불일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며, 내 말에 책임지지 못했을 때의 불편한 결과를 기꺼이 감수하며 나름 언행일치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다. (물론 가끔씩 피하려다 더 큰 불상사를 겪으며 스스로 실망스러운 경험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끔은 내가'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절대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내가 한 발 물러서야 할 때도 있으며, 내 입장에선 ‘죽어도 아닌 것’이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는’ 것이 각자 살아온 문화와 삶 속에 함께 공존함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과 함께 좀 더 복잡하게 변한 나 자신이 어떤 특별한 환경 속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쩜 좀 더 겸손한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누군가를 속인다거나, 나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과 같이 나의 가치관과 어긋나는 일은 경우가 다를 것이다.
암튼, 우리는 도움을 주거나 받을 때 3분 안에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결과는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아서 비먼 교수가 공저로 쓴 , 성격과 사회 심리학 편람>이라는 논문에서 보여준 것처럼 어떤 집단에게 사회적 신호와 다수의 무시 그리고 방관자 효과에 관한 교육을 실시한다면 그런 행동이 앞으로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정신적 평안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다. 정말 로렌의 말처럼 이 세상은 메시지와 미스터리 그리고 다의적 의미로 가득하다. 책을 읽는 내내 왠지 한 번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어두운 심연의 바닷속을 탐험하러 가는 듯한 그런 두려움이 함께 하는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덧붙임으로, 자살 기사가 신문 1면에 나올 때 ‘베르테르 현상’이라 하여 자살률도 높아지고, 비행기 사고나 차사고가 많아져 그때는 비행기 타기를 조심하거나 높은 액수의 보험금을 든다고 말하는, 요즘 ‘설득의 심리학’으로 명망 높은 심리학자 로버트 차알디니에게 ‘자신이 만든 벙커 속에서 숨어 지내는지도 모르겠다’고 차갑게 쏘아붙이는 로렌이 참 재밌었다. '설득의 심리학'으로 유명한 심리학자지만, 렌에게는 그리 호감 가는 학자가 아녔던 것 같다.
4. 사랑의 본질에 관한 실험 - 해리 할로의 애착 심리학
해리 할로의 애착과 사랑에 관한 가짜 원숭이 실험을 두고 로렌은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실험’이라고 표현했다. 읽으면서 그녀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슴에 그대로 느껴져 왔다. 갓 태어난 아기 원숭이를 엄마 원숭이로부터 떼어놓고는 가짜 어미 원숭이를 만들어놓고 ‘애착’에 관한 반응을 살피는 연구. 그랬다. 그의 실험은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실험’이었다.
결국 사랑에 작용하는 변수가 세 가지 있다는 것을 의미했지요,
스킨십과 움직임 그리고 놀이, 우리가 이 세 가지를 모두 제공할 수 있다면
영장류에게 필요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우유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해리는 연구를 통해 그 실체를 보여주었고, 해리의 그 연구 덕분에 우리는 스킨십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유는 시간을 정해놓고 먹이는 것이 아닌 배고플 때 안아서 먹이고, 안아달라고 할 때마다 안아줄 때 아이들이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을 알았다. 나 역시 첫 아이 애리를 낳았을 때 의사로부터 그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사랑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전달되고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결과는 바로 엄마와 생이별을 해야 했던 아기 원숭이와 자신의 피붙이 새끼 원숭이를 빼앗기는 엄마 원숭이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인. 이 어찌 잔인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해리가 우리에게 전한 메시지는 강력했으며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은 너무나 당연시하는 지식, 즉 인간은 단순한 허기 이사의 것을 원하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자 한다는 것 그리고 상투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우리가 맨 처음 본 얼굴을 가장 사랑스러운 얼굴로 여긴다는 것을 그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것이다. (P130)
아기 원숭이가 천으로 된 엄마 원숭이가 자신의 엄마인 줄 알고 철사에 찢겨가면서도 엄마에게 매달리는 장면은 눈물 없인 읽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런 무조건적인 애착, 사랑, 그렇게 처절한 고통이 동반한 연구 결과로 얻어진 스킨십의 중요성. 우리는 더욱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담아 주고, 우리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는 친구들 이웃들을 안아주고 보담 아줌마로서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Free Hug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역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가 아닐까.
자꾸만 아기 원숭이의 절규가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5. 마음을 잠재우는 법 -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 부조화 이론
레온 페스팅거의 ‘마음을 잠재우는 법’에서 다룬 인지 부조화에 관한 이론은 앞에서 읽었던 슬프거나 아름답거나 또는 황당하거나 무서운 그런 것이 아니어서 일단은 잔잔한 마음으로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인지 부조화 이론', 이 인지 부조화 이론을 실지로 체험하기 위해 사난다교에 신자를 가장하고 교단에 들어가 홍수와 함께 지구에 종말이 올 것을 믿으며 그 종말의 시간을 기다리는 그들과 생활하는 레온 페스팅거. 이 재밌고 용기 넘치는 심리학자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믿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어떤 상태로 어떤 모습으로 그것에 반응하는지 연구를 하며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즉 자신이 꾸며낸 거짓말을 돌이킬 수 없다면 아예 자신의 믿음을 바꾸어 더 이상 부조화를 겪지 않아도 되고, 바보 얼간이가 된 것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그는 증명했다.
그의 인지 부조화 실험은 그 당시 많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데, 그중에서도 재밌게도 보상이 행동을 강화하고 처벌은 소멸시킨다며 유심론을 배척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자인 스키너를 가장 당황케 했다.
실제로 인간의 행동은 보상 이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단히 놀라운 정신적 활동을 한다.
페스팅거가 스키너와 반대되는 자신의 이론을 실험으로 증명해 보였을 때 느꼈을 스키너의 놀랐을 모습이란. 감히 한 다리는커녕 새끼발가락 하나 걸칠 수도 없는 짧고 얕은 나의 생각이지만 심리학이건 철학이건 어떤 한쪽으로만 국한적으로 설명되는 이론은 늘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행동만으로도 설명될 수 없고 정신만으로도 설명될 수 없고, 또한 영혼만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너무나도 복합적이고 신비스러운 것이 생명체 아닌가. 그중에서도 ‘생각’을 하는 인간에 대해서 어느 한 면만 가지고 ‘그렇다’라고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헛 점을 드러내는 것은 어쩜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우주는 균형을 이루고 있다.
굳이 ‘하느님’이라는 창조주 신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균형 없이 온 우주가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며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설명될 수가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서로의 거리를 간격을 유지하고 있음을 우린 자연스럽게 상상해볼 수 있다. 각 소우주 안에서도 그 어떤 힘에 의한 균형 속에 자연이 생기고 그 안에서 생명체가 탄생하고 활동을 한다. 그런 우주의 일부인 우리가 전체를 보지 않고 한 부분만을 보며 극단적인 주장을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
암튼, 페스팅거는 이 실험을 통해 우리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심리 상태를 이해하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여기서 로렌은 이 인지 부조화 이론에 약간의 결함을 지적하며 의문을 제기한다. 인지 부조화 이론은 우리가 이야기를 어떻게 구체화시키는지에 관해서만 설명하고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수정하는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 (P163)
또 앞으로 누군가가 실험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실험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게 될까. 문득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이 나를 자극한다. 그 실험에 '나도 함께 동참할 수 있다면'하는 야무진 꿈도 가져본다.
6. 제정신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 데이비드 로젠한의 저인 진단 타당성에 관한 실험
데이비드 로젠한의 정신 진단 타당성에 관한 실험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몇 년 전 보았던 아담 패치 박사 영화가 떠올랐다. 데이비드 로젠한 교수와 그 일당(?)들의 취지와는 살짝 다른 경우지만 스스로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 아주 긍정적이고 건설적이고 행복을 안겨주었던 영화. 그 영화를 보면서 실제 있었던 일이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재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흥분하게 했었나. 이 로젠한 교수 편을 읽으면서 그가 떠올랐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읽으면서 '마틴 셀리그만'의 이름이 함께 나와 그에 대한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는데, 마틴 셀리그만이 바로 이 실험에 함께 동참한 ‘일당’중의 한 명이란 사실이 너무나도 재밌게 느껴졌다. 마치 나 역시 그 일당이라도 된 듯 그렇게 신이 나서 읽었던 ‘정신 진단의 타당성’ 편. 데이비드 로젠한과 그의 실험에 동참하기 위해 가짜 정신병자로 가장하는 괴짜 일당 8명. 그들의 정신병원 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자세한 언급은 없으나, 마틴 셀리그만과의 인터뷰는 나를 흥분으로 몰아넣었고 배꼽 잡게 했다.
젊은 학자들의 말릴 수 없는 호기심과 열정적인 탐구심이 내게까지 전해져 와 그들 일당 속의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학시절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라던 테오필라 수녀님의 말씀을 귀여겨 들었어야 했다. 때늦은 후회란..
로젠한과 그 일당들은 실험을 통해,
우리가 투과하는 렌즈에 따라 세상이 언제나 왜곡된다는 사실을
훌륭히 보여주었다.
또한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내면을 가진 존재이고
주관성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암시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실험 결과를 사이언스지에 논문으로 발표를 했고 그 논문이 발표되자 수많은 논쟁이 담긴 편지가 쏟아지고 정신의학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미국 전역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에게 반기를 들고 그에게 반항을 하게 된다. 결국 한 정신 병원에서는 로젠한 교수에게 도전장까지 내밀게 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에 이르게 되나, 그 정신병원은 로젠한 교수의 주장을 더 확실히 해주는 역할만 하면서 참패로 끝을 맺는 자신들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무조건 로젠한 교수의 주장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많은 이들은 생각한다. 왜냐면, 환자가 어떤 부위의 통증을 고통스럽게 호소하며 의사에게 다가올 때 의사는 그 부위의 통증을 중점으로 치료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 부위를 치료하려는 의사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의견.. 공감 가는 이야기다. 더욱이 어떤 육체적인 통증이 아닌 정신적인 문제일 때 그 치료는 더욱 복잡해지고 모호하게 된다.
분명 로젠한 교수는 바로 그렇기에 정신적인 치료를 할 때는 한 부분인 아닌 모든 면에서 지켜봐야 하고, 전체 적인 시각을 가지고 치료에 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신병자가 단순히 정상적인 사람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 국한적이고 부분적인 행동을 가지고 퇴원을 시키는 것도, 또한 한 가지 행동만을 가지고 정신병이라는 진단 아래 엉뚱한 약물 복용과 함께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들게 되는 그런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결국엔 정신과 의사들의 실수라고 주장하는 것. 전체적인 꾸준한 관찰 없는 치료는 이런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던 것 아닐까.
그는 말한다.
‘정신병이라는 딱지가 정신병을 낳은 것일까? 병 때문에 진단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진 진단이 두뇌에 각인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두뇌가 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두뇌를 만드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우리 몸에 붙어 있는 딱지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리라.’ (P186)
로젠한의 정신 진단의 타당성에 관한 실험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실험이었다. 만약, 내가 그의 친구였다면, 그래서 그가 원했던 10월에 내가 바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가 내게 그 일당 중의 한 명이 되어주길 원하며 실험에 참여를 부탁했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Yes or No? 아마도 나는 너무나도 흥분해서 난리 부르스였을 것 같단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분명 Yes라고 대답하는 대신 "깨끗한 하얀 벽의 병원으로 보내줘" 그랬을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어떤 결과를 가지고 그에게 돌아왔을까. 몹시 궁금해진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정신병의 진단을 내렸을까. 현실 망각증? 구제불능 멍때림증? 나혼자 잘놀아 사회성 결핍증? 궁금해지는 밤이다.
7. 약물 중독은 약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 브루스 알렉산더의 마약 실험
책을 읽다가 지난날 내가 읽은 책의 저자가 언급되면, 나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너무 반가워서 신이 난다. 심리 실험을 읽으면서 실험을 같이 한다던가, 스승으로 모셨다던가 하는, 현실에서 서로 연결된 관계 속에 두 학자가 함께 했다는 것이 내게 무척이나 경이롭게 느껴졌다. 괴테와 실러, 두 거장이 실제 현실 속에서 친구였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친근한 ‘긍정 심리학’ 마틴 셀리그먼이 데이비드 로젠한 교수의 가짜 정신병자 일당 중의 하나인 실험 참여자라던가, 브루스 알렉산더가 해리 할로 교수의 원숭이 실험 테이프를 보고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 메디슨으로 날아가 그의 제자가 된 것이나, 그러한 실제 현실 속에서의 관계는 내게 강한 호기심과 흥미로움을 더욱 자극시켰다.
알렉산더의 마약에 관한 실험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적인 생각과는 달리 쾌적한 환경 속에서의 쥐는 마약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정말로 가슴 두근거리는 놀라운 결과였다. 결국 약에 의해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우리는 중독되고 싶은(?) 무엇을 찾는다는 것 아닌가.
지금껏 읽은 실험 중 그의 실험이 내게는 가장 흥미진진했고 재밌었으며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긍정적인 결과를 보여주었기에 내겐 ‘중독’이라는 어둠 속에서 빛을 보는 듯한 그런 희망적인 밝은 느낌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젊은 시절 ‘가슴 저리게’ 잘 생겼었다는 알렉산더 박사의 마약 중독 편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떨림이 느껴졌다. 물론, 그가 가슴 저리게 잘생겨서가 아닌 (^^), 그의 실험과 연구 결과로 인해.. ^^
‘알렉산더 박사의 연구는 마약 중독이 실은 자유 의지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쥐든 인간이든 쇠파이프를 들어 올렸다가 그것을 다시 내려놓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피아프를 다시 내려놓지 않고 파괴적인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파이프 안에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어떤 본질적인 본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처럼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 외에 더 나은 대안을 찾지 못한 환경적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세계에서 중독은 생활 방식의 한 전략이며, 그것은 인간이 만든 모든 전략과 마찬가지로 교육과 관심 이동과 기회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P217)
이 쥐 공원을 토대로 한 중독 실험은 그 실험을 한 장 본인인 알렉산더 박사나, 그 연구 결과에 반대를 표하는 아이비리크 나침반의 시각으로만 보는 거만한 마약의 황제 클레버 박사나 대단한 연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까지 보여준 대단한 연구보다도 더 떨림을 안겨주는 실험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비춰주는 희망적인 메시지 때문이 아니었나 자가분석을 해본다.
물론 그의 실험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긴 했지만, 그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 해리 할로 박사처럼 술에 의존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환경이나 운이 없음을 탓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의 연구 학자금을 중지당했을 때도 자신의 연구실이 폐쇄당했을 때도 그는 기죽지 않았다. 그는 더욱 다른 연구에 심취되었으며 자신만의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비록 자신의 연구가 빛을 발하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후에 다른 많은 연구들의 기본 토대가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심리학자들은 훌륭한 연구 발표를 내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지지 않나.
사람들이 약물을 복용하는 것은 약리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고서는 힘든 상황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중독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것이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쩜 연구도 심리학자의 모습대로 따라가는 것 같다. 우리는 로렌의 글을 통해 알렉산더 박사가 얼마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사람인지 느낄 수 있다. 그의 실험도 그렇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그의 연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7편까지 읽은 것 중).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의 연구 성과를 소수를 제외하곤 알아주지 않음에도 자책하거나 우울함에 빠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여러 가지 다른 연구에 활발히 참여하는 그가 정말이지 매력적이었고 멋져 보였다. (절대 그의 '가슴 저리게' 잘생김 때문은 아니다.^^) 난 이렇게 긍정적이고 활기 있는 사람이 좋다. 나도 모르게 끌리게 된다.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염되니까.
암튼. 알렉산더 박사의 연구도 그의 연구 결과에 강력히 반발하는 클레버 박사도 결국 결론은 존엄성 문제로 모아진다. 인간이 자신의 재능을 계발할 기회를 갖게 되고 존중되며, 문화의 근간을 형성하는 유산과 믿음을 전달하게 될 때 아이들은 마약이라는 것에서 유혹당하고 그것에 중독될 가능성은 줄어든다는 것이 서로 반대의견을 가진 두 박사의 일치된 결론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될 때 마약뿐 아니라 모든 ‘중독’ 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임에 우리 인간 존엄성의 본질에 대해 더 깊이 근본적인 시각으로 다가가게 하는 실험이었다.
8.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진짜 기억인가? -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가짜 기억 이식 실험
이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편은 그녀의 가짜 기억에 관한 실험이라기보다는 마치 심리학자 로렌의 또 다른 심리학자 로프터스 교수에 대한 실험 연구 논문을 읽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결코 밝지 않은 우울한 느낌. 이 책의 첫 편이었던 스키너 박사의 행동주의 실험 편을 읽었을 때 느꼈던 아주 우울하면서도 슬픈 사랑 영화를 보고 난 듯한 그런 암울한 느낌. 그랬다. 그런 먹먹한 느낌이었다. 쌍파 울의 회색빛 하늘이 그 분위기를 한껏 더해주고..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 때 엄마를 잃었던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 그녀에게 엄마는 늘 그리움이었다. 수학자였던 아빠에게서는 사랑보다는 미적분을 통해 현실의 차가움을 배워야 했던 그녀.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따뜻하고 섬세했던 엄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온전히 감당해야 했고 또한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겨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어린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을 흘리며 견딜 수 없는 그리움으로 헐떡거려야 했을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지는 슬픔이 나를 점령한다.
로렌은 로프터스 교수를 두고 ‘자신의 진정한 눈물이 나 진정한 슬픔에는 관심은 없고 남의 오페라에나 지나치게 몰입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표현했다. “일이 없으면 제가 어디에 존재하겠어요?”라고 전화선을 타고 오는 로프터스 교수의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쩌면 그녀는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더욱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두며 그것이 물 위로 떠오르지 않도록 그녀의 온 정신을 몰입할 수 있는 일과 사건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정신이 잠시도 쉬지 못하도록 엄마에 대한, 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도록 말이다. 굳이 내가 심리학자가 아녀도 알 것 같았다.
대부분의 인생은 어떤 특정한 터닝 포인트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인생의 대부분이 조금씩 집중적으로 쌓여가다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남는다.
마지막에 가서야 그 형체가 드러나는 퇴적물이 되는 것이다. - 로렌 슬레이터 -
그녀는 강했다. 그녀는 사회의 질타를 받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주장을 내세움에 있어서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고 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감히(?) 프로이트 이론에 반박하는 아니, 프로이트의 심장에 말뚝을 박는 일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하게 해냈던 것이다. 자신이 옳았던 틀렸던, 사실 틀렸다고 스스로 인정하기 전까지 우리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과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 행위가 잘못된 거라고 말할 수 없다. 틀림을 알면서 ‘우기는’것과는 달리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신념의 문제임으로. 그녀의 용기가 너무나도 감탄스러웠다.
다윈도 프로이트도 시대의 시선을 의식하여 자신의 연구 발표를 미룬 전적이 있음을 볼 때,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정말 ‘거침없이 하이킥’이 아니라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거침없는 불도저’ 같은 맹렬 여성학자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깊숙한 그곳에는 평범한 여자의 일상을 그리워하는 채울 수 없는 ‘무엇’이 존재했고. 그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해 그렇게 자신의 일과 연구에 매달렸음은 삶이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그녀에게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부분은 역시 ‘사랑’이었을게다.
쓰다 보니 로프터스 교수의 연구에 대한 리뷰인지, 그녀에 대한 글인지 알 수가 없는 정체 불분명한 리뷰가 되어버렸다. 그럼 어떤가. 무슨 논문 발표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읽으면서 느꼈던 느낌을 올리는 것일 뿐이니..
9. 기억력 주식회사 - 기억 메커니즘을 밝혀낸 에릭 칸델의 해삼 실험
켄델 박사의 해삼 실험으로 들어가기 전.. ‘헨리’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의 이야기가 나오고 핸섬하고 저돌적인 과학자 스코빌 박사는 칼 레슐리가 일련의 실험을 토대로 기억을 관장하는 특정 부위가 두뇌 안에 따로 없다는 사실을 믿으며 헨리의 간질병을 위한 연구 수술을 시도하게 된다. 그는 헨리의 ‘해마’를 제거하게 되는데 바로 그 ‘해마’가 그때까지 알려진바와는 달리 기억과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기억의 많은 부분을 관장하는 곳임을 그 수술을 통해서 스코빌 박사의 실수를 통해 밝혀지게 된다. 정말 무서운 장면이었다. (이는 후에 내가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교수님들에 의해 많이 언급되던 바로 그 실험이다.)
인간의 두뇌에는 신경이 없기 때문에 국부 마취만을 한 헨리는 드릴을 들고 다가오는 스코빌 박사를 자신의 두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 드릴이 자신의 뇌를 뚫고 긴 은빛 빨대로 빨아내었을 때 자신이 드릴을 든 스코빌 박사를 보았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는 자신의 기억을 고스란히 빨아내어 가져 갔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무섭고 공포스러운 이야기였다.
스코빌 박사는 한 인간의 기억을 도둑질해갔을지는 모르나 바로 그 도둑질로 인해 우리는 바로 기억을 관장하는 곳이 어딘지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과학의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한 인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심리학의 진보. 그로 인해 어쩌면 더 많은 사람의 뇌가 드릴로 뚫어졌을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론 그 이면에는 한 인간의 삶이 없어진 희생이 있었음 부인할 수 없다. 그 누군가가 내가 아녔다고 해서, 내 가족이 아녔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감사하는 걸로만 끝내야 하는가 하는 씁쓸함도 들었다.
어쨌든, 스코빌 박사의 해마 제거 실험은, 많은 이들이 기억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하는데 밑바탕이 되었고, 헨리는 심리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잊히지 않는 슬픈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켄델 박사의 해삼을 통해 기억 메커니즘을 밝혀낸 실험은 참 흥미진진했다. 일단은 그가 해삼에게 가르친 바로 반응의 조건화였다. 먹이사슬에서 바로 한 단계 밑이고 그의 뉴런이 외부에 존재함으로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는 켄델. 그의 해삼 연구를 통해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을 밝혀내고 뉴런 사이의 대화와 관계를 증명해 보인 것은 경이롭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단순히 기억 메커니즘을 밝혀내는 것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었고, 그 ‘크랩’을 통해 기억을 강화시키고 억제시키는 것도 그 연구를 통해 증명해 보임으로써 신경과학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는 기억 강화제를 만드는 시도까지 하게 되고, 당연한 결과겠지만 그것은 시판되기도 전에 윤리 문제로 시비에 걸리게 된다.
어쨌든 우리의 두뇌 속에 망각 능력이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이다.
그것이 진화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이테크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퇴적물을 던져버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로렌은 말하고 있다. 기억 강화제가 우리에게 가져올 수도 있는 끔찍한 현상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치러내야 할 그 대가에 대해서도 만약 우리가 기억 강화제로 우리의 일에서 더 높은 성과를 거두고 더 많은 보수를 받으며 사회적으로 더 성공적으로 삶을 살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더 행복을 느낀다는 보장은 없으며, 그렇게 자연을 거스르는 수단을 써서 이룬 성공 속에 우리는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요구, 더 많은 기대, 더 많은 욕심.
어쩜 우리가 치러내야 하는 대가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바늘처럼 솟아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기억들, 잊고 싶은 그 기억들,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매 순간 내 세포 안에 하나하나 간직하며 느끼며 살아야 하는 형벌이 고문처럼 주어지는, 바로 ‘기억’ 일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더 나은 삶을 위한 기억 강화가 모순적이게도 바로 잊고 싶은 그 기억을 잊지 못하는 고통 속에 살게 하는 형벌 말이다. 자연의 균형 파괴는 결국 인류의 파괴로 직결되는 것임을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느끼고 배웠다. 우리는 어떤 싸이언스를 다루더라도 그 윤리적인 면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기억, 기억은 나의 이야기이고 나의 역사이다. 슬프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도 나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과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과거에 빠져 사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나의 지나온 과거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곳에 나의 사랑이 있었고 나의 꿈이 있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이 단어를 치는 바로 그 순간도 바로 찰나의 과거의 역사로 들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빠울로 꼬엘료는 말했다.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바로 이 현재라고. 이 현재만이 영원한 것이라고. 미래가 현재가 되고 이 영원한 현재는 과거로 들어가는 이 찰나의 시간 속에 기억이란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순간을 안겨주는 것인가.
나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고 싶지 않고, 내 안에서 기억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픈 고통이 그 순간의 느낌 그대로 내게 영원히 기억되기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을 기억하고 싶다. 슬펐던 시간들,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은 서서히 희미해져 가지만, 행복했던 시간들,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생생 해지는 나의 기억 속의 시간들. 나는 지금의 내가 있도록 해주었던 지난날들의 시간들을 잊고 싶지 않다. 때때로 삶이 힘들고 지친다고 느껴질 때 나는 내 안에 소중히 묻어놓은 나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보며 그 안에서 행복한 느낌에 잠기곤 한다. 나는 결코 잊고 싶지 않다. 지난날의 나의 아름다운 사랑했던 순간들을...
헨리의 이야기는 참으로 슬펐다. 아니, 멍했다. 한 인간이 지난 이십몇 년을 살아오면서 차곡차곡 쌓아갔던 삶의 역사가 그렇게 한점 살을 떼어냄으로써 도둑맞았다는 사실이. 그리고 헨리는 자신의 삶이 도둑맞았다는 그 사실조차 못 느끼는 채로 살아가고 있음이. 참을 수없이 슬펐다. 어쩜 헨리에게는 차라리 그 기억조차도 사라진 것이 더 좋았을까. 그냥 모르는 채로 그냥 아무런 느낌 없이. 매 순간 새로운 느낌. 새로운 경이로움과 함께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 좋았을까. 그렇게 매일 새로운 역사를 쓰는 헨리. 그는 매 순간 끝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것들로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눈물이 핑 돈다.
l 환원주의의 종류:
환원주의에는 먼저, 생물체와 무생물계는 궁극적으로 원자라는 존재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존재론적(구성) 환원주의가 있다. 원자와 분자 수준에서 기술되는 생물학의 현상과 과정은 물리, 화학적 현상과 과정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생물학적 법칙과 이론은 물리. 화학적 법칙과 이론으로 설명된다고 보는 인식론적(이론, 법칙적) 환원주의가 있다. 심리현상은 생물학적 법칙과 이론으로 설명되며, 생물학적 법칙과 이론은 물리, 화학적 법칙과 이론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론과 법칙은 인식의 눈, 개념 체계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한 체계를 이룬 전체는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구성요소는 다시 하위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며, 그 구성요소들을 분석의 방법을 통해 이해하여 전체를 이해하는 방법론적(설명, 기술적) 환원주의가 있다. 전체의 의미를 구성요소들의 이해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다. 유전현상은 유전자와 DNA의 구조와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방법이 인식의 활동이므로 방법론적 환원주의와 인식론적 환원주의가 구분되지 않는다.
10. 드릴로 뇌를 뚫다 - 20세기의 가장 과격한 정신 치료 (안토니오 에가스 모니즈)
안토니오 에가스 모니즈, 그는 포르투갈 사람이다. 내가 브라질에 살아서 그런지, 왠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이 이 뇌엽 절제술을 처음 시도했다는 사실에 좀 더 개인적인 관심이 더 많은 관심이 느꼈다. 모니즈는 다들 입 밖으로 표현하는 것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던 뇌엽 절제 수술을 단순히 입 밖의 표현만이 아니라 실제로 과감히 수술을 감행했고, 그로 인해 정신병 수술에 커다란 위업을 남기며 급기야 노벨상 수상까지 하게 되고 포르투갈 우표에 당당하게 그 얼굴이 찍히게 되는 만인들에게 기억되는 위인이 된다.
읽으면서 내게 놀라웠던 것은 그가 뇌엽 절제 수술을 시도한 것이 한창 젊은 나이도 아닌, 인제 은퇴를 생각할 바로 그 나이 예순두 살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라틴계 피를 가진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영국에서 열리는 학술회에 참석차 갔다가 베키라는 원숭이의 수술과 그 결과를 듣고는 곧장 포르투갈로 돌아와 시체를 통해 연습을 하고 곧장 실제 수술로 돌입하는 모리즈. 대단한 열정과 탐구심이다. 정신병을 고치겠다는 그의 집념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환자를 골라서 수술을 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더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있는 환자들로만 골라서 했으니 그것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만약 그 수술로 인해서 환자에게 어떤 해가 될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면, 어쩌면 그는 안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더 큰 희생을 줄이기 위해 감행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자신의 업적을 빛나게 하고 자신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추운 병원에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도 느끼지 못할 그런 비참한 모습의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애정이었고 동정이었고 의사로서의 사명을 의식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그는 예순두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뇌엽 절제 수술을 과감히 행했고, 설사 그것에 대한 후기 록이 미비하여 정확한 결과에 대한 피드백을 하지 못했을 수는 있으나, 그의 시도가 정신병 수술에 대한 위대한 결과를 가져다주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의 병은 우리가 가진 용기만큼 낫는 것이 분명하다.
이 두뇌 수술이 바로 손상된 뇌 부분만 제거를 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이 두뇌 수술은 위험하고 되돌아올 수 없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반면 그 효력이 뇌의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발휘되는지 모르는 프로작은 선호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고 로렌은 지적하고 있다. 동감이다. 그 약이 뇌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알츠하이머 병과 같은 반점을 뇌에 남기며 혼란을 일으킬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적당히’ 눈을 감고 모른척하며 그 약을 복용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가 없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의 현주소다. 로렌의 표현이 너무 재밌다. ‘그것은 끔찍한 진실을 직접적으로 듣는 것보다 에둘러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좋은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시니컬한 유머를 잃지 않은 그녀,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뇌수술은 어떤 곳에서는 금지되어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엄격한 조치가 취해지는 규율 안에서 허용되고 있다. 나 같았으면 어땠을까. 나는 수술에 관한 부분에 대해 읽으면서 내가 갖고 있는 갑상선 문제에 관한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나에겐 갑상선에 두 개의 혹이 있고, 그것은 암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떼어내야 한다. 그것이 빠를수록 좋은 것임을 나는 알지만, 나는 계속 미루고 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미련 곰퉁이~’ 내가 그렇게 미루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혹을 떼어냄으로 인해 호르몬에 이상이 와서 감정적 변화를 방지하기 위해 호르몬 균형을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지금은 혹은 갖고 있을지 몰라도 나의 호르몬 분비는 대체적으로 정상적이다. 그런데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미련 곰퉁이 짓을 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 혹이 암으로 발전할 수 있음에 빨리 떼어 내야 하기에. 글쎄 모르겠다. 발전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안될 것이란 믿음 하에 나의 감정선에 이상을 주고 싶지가 않다. 그것이 내 나름의 이유다.
하지만, 내가 찰리 같은 경우라면 과감히 시행해 보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살면서 고통 속에 지내느니 수술을 받아보고 싶을 것이다. 실패한다 한들 더 나빠질 것도 없을 테니. 가끔씩은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 들어설 때 용기도 더 나고, 또 용기를 내야 하는 그 이유도 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만약 여러 가지 옵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 선택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했을지도 모르지만...
뇌엽 절제 수술은 로렌의 표현 그대로 20세기의 가장 과격하고 파격적인 정신병 치료였음이 분명하다. 그것으로 인해 정신병이 치료되고 그것으로 인해 정신병 학계에는 많은 진보를 가져왔으니. 그러나 성스러운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우리에게는 또 어떤 생각지 않은 결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억지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정말 알면 알수록,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신비로운 우리의 뇌, 정신, 기억. 그 모든 것이 정말 한점 살점에 묻혀 있는 것이 다일까.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10편 ‘드릴로 뇌를 뚫다’까지 읽고 넘겨진 페이지 뒤에 자리한 ‘옮긴이의 말’의 제목을 보고 순간 깜짝 놀랐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냐면 제목이 바로 <“왜’라는 작은 의문에서 시작된 인간 탐사’였다.>였기 때문이다.
신기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 경이로움을 일으키며 놀라게 했던 부분은 바로 이 인류 사회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심리학자들의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음에 그 단순한 외마디의 “왜?”라는 질문이 참으로 경이롭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당연시하며 자연스럽게 또는 무관심 속에 받아들이던 상황이나 사건들을 보며 의문이 들었고, 그들로 하여금 연구하게 했고 실험에 뛰어들게 했고, 때론 그로 인해 인정받고 존중받던 그들을 삶을 상실로 빠뜨리게 했던 한 글자.
”왜..?”
이렇게 같은 생각, 같은 느낌을 가질 때 마치 복권에 당첨된 듯 그런 희열과 반가움이 느껴진다.
2009년 8월 26일에 쓴 리뷰를 정리하여 올렸다.
책을 읽고 전율하는 흥분 속에 리뷰를 쓴 지 벌써 10년이 넘는 이란 세월이 지났다.
긴 리뷰였다.
정리하면서 사진을 추가하는 작업을 하며 긴 텍스트의 지루함을 달래고자 했다.
이 책이 내게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심리학에 푹 빠지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늦은 나이에 심리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실험들을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짜릿한 전율 속에 들을 수 있었다.
로렌 슬레이터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안에 심리학에 대한 열망의 불씨가 심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용기를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4년이란 소중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겐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