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를 읽는 동안 내 머릿속은 온통 혼돈 그 자체였다. 대체 이 모든 내용들이 실제 상황인건지 아니면 픽션인지, 읽는 내내 긴장감과 몽롱함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페트루스의 존재도 파울로의 경험도, 그리고 그들이 만났던 집시 악마도, 개인 악마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파울로가 자신의 검을 그렇게 절절한 마음으로 찾아다니는 동안 느낀 막막함. 그 막막함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파울로는 ‘검’이라는 목표물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을 찾아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단지 그가 몰랐던 것은 그 ‘검’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몰랐고 생각해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 ‘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인제 알 것 같다. 나에게 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알지 못했는지를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어떤 것을 배우고 학습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데만 열중했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건지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배움이 좋아서 무조건 무언가를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을 뿐. 그 ‘무언가’를 가지고 나는 '어떻게' 삶에 적용하며 살아갈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가지고 과연 내가 내 삶 안에서 하고 싶은 게 있기나 한 건지, 나 스스로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면 내가 찾는 검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소명'이었다. 태어날 때 하느님이 내 안에 심어 놓으신 당신의 뜻, 소명. 아니, '소명'이란 단어는 너무나도 거창하다. 꿈, 하고 싶은 무엇, 꼭 하고 싶은 무엇, 안 하면 미칠 것 같은 무엇. 그것이 바로 나의 검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도 막막하게 느껴지는지.
나는 안다. 어떤 목표가 있을 때 내 안의 들끓는 열망의 에너지가 얼마나 강력한 폭발력을 지니는지. 단지 환경이 다른 지금 그 나의 열망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모아줄 그것이 뭔지를 모르겠다. 파울로가 검을 찾기 바로 직전에 느꼈던 느낌들. 알듯 알 듯하면서 확실하고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던 마음의 상태.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 것일까. 하고 싶은 것은 무지 많지. 너무나도 많아서 토를 달지 않고 단어만 나열해도 몇 페이지는 족히 채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삶의 ‘꿈이나 비전 또는 소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하나하나를 해보았을 때의 순간의 만족만 경험할 뿐, 그런 사소한 성취와 성공이 나의 꿈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나도 내 꿈이 무엇인지를 모르니 그런 모든 열망들은 돋보기가 햇빛을 모아 종이를 태우는 그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산발적이어서 나의 아까운 에너지만 분산시킬 뿐이다.
누군가 자신의 길을 발견했을 때, 잘못된 시도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용기가 필요하다.실망, 실패, 의기소침은 하느님이 길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들이다. - 빠울로 꼬엘
페트루스, 그에 대해 얘기를 안 하고 지나갈 수가 없다. 이성적이고 지적인 매력의 소유자 페트루스. 나도 파울로처럼 페트루스가 안내자 역할을 여러 번 했을 베테랑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이드 역할이 처음였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그는 왜 파울로와의 연락을 피했던 걸까. 전화번호까지 바꾸고. 어쩌면 과거와 현재를 잇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람’에선 그런 관계가 이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걸까. 많은 상상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면 자주 연락을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을 함께 이어가고 싶어 하는 성향이 강한 나로서는 가슴 한쪽에 고통마저 느껴지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그 대상이 고혹적인 매력덩어리 페트루스였으니 그 안타까움이 더 진하게 느껴졌던 듯싶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파울로의 막연한 짐작처럼 페트루스가 순례 여행 동안 파울로와 함께 하면서 그에게 실망을 느낀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페트루스는 평범한 일상에 가장 충실할 때 기적은 일어나고 비범함이 나타난다고 했다. 당대 가장 뛰어난 유럽의 디자이너의 한 명인 페트루스지만 그의 실제 이름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 치열한 전쟁터 같은 패션계에서 명망 높은 디자이너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렇게 깊고 맑은 영혼을 소유한 페트루스. 대체 그는 누구일까.
나의 호기심은 결국 가만 있지 못하고 Fundación Prinicipe de Asturia 사이트를 찾아 들어갔다. 파울로가 말한 브라질 져널리스트 호베르또 마리뉴가 상을 받은 기사를 찾아다녔다. 호베르또 마리뉴가 상을 받은 연도를 찾으니 1986년이다. 혹시나 하여 인터넷을 구석구석 뒤지며 사진을 찾아다녔으나 페트루스로 여겨지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호베르또 마리뉴가 상을 받은 사진은 찾았으나, 그가 상을 받았던 것은 아녔던 듯싶다.
어쨌거나 페트루스가 파울로와 함께 하는 순례길 동안 파울로에게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나를 향한 가르침이었고 깨달음이었다. 그의 말은 마치 잠언 말씀처럼 내 가슴 깊이 파고들며 영혼을 건드리는 떨림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대체 누굴까.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좀 더 오랜 시간을 나를 괴롭힐 것 같다.
처음에 나는, 책에 나오는 산티아고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인줄 알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도 어떻게 프랑스 스페인을 거처 칠레까지 '걸어서' 순례를 가는 건지 궁금해서 돌아가실 뻔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칠레의 산티아고가 아니라 갈리시아 땅에 있는 산티아고였던 것. 오~ 나의 무지함이여~!!
<순례자>는 사소한 하나하나 까지도 나의 생각을 어지럽히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지뢰가 군데군데 묻혀있다가 여기저기서 폭발되곤 했다. 글을 옮긴 박명숙은 왜 ‘신’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예수님을 언급할 때조차도 그녀는 '하느님'이나 '하나님'이라는 표현 대신 ‘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왜 God가 아닌 god로 표현이 되었던 걸까. ‘신’이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마다 나는 자꾸만 그것이 자꾸만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종교적인 색채를 지우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고 해서 페트루스나 빠울로의 깊은 신앙심이 가려질 것 아녔을 것이다. 의문이 들었다.
이렇듯 쓰나미처럼 달려드는 궁금증을 그냥 넘기기엔 그 폭발력이 너무 강했다. 급기야 원본을 보고 확인하고 싶어졌다. 어떻게 쓰여있을지 너무나도 궁금해진 나는 책을 주문하려고 Livraria Cultura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포어 버젼이 없는게 아닌가. 이럴 수가. 의아스러웠다.스페니쉬, 불어, 영어 버전은 있는데 유독 포어 버전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스페니쉬 버전으로 책을 주문했다. 책을 주문하면서 연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라고 연발하는 나에게 딸아이가 하는 말, “엄마, 이해는 내일하고 나한테 컴퓨터 넘겨주면 안 돼?” 숙제를 한다고 컴퓨터를 쓰고 있는 딸아이를 “잠깐만~”하고 뺏고는 엉뚱한데 멈춰서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옆에서 보면서 속이 탔었나 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다른 모든 언어는 '순례자'란 의미의 El Peregrino, The Pilgrim, 또는 Le peregrin 등으로 번역이 되어 있으나, 포어 제목만큼은 'O diário de um mago' (마법사의 일기)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 아이구야~
순례자는 내게 가장 필요한 순간에 절묘한 타이밍으로 다가온 책이었다. 나의 검을 찾으러 가는 여정은 누구에게나 혼돈과 모호함의 갈등 속에서 방황한다는 것은 내게는 위로였고 위안이었다. 나침반이 정북향을 가리키면서도 떨림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목표가 분명하게 있을 때 조차도 우리는 갈등과 두려움을 겪게 된다고 했다. 하물며 아직 분명한 자기만의 정북향을 찾지 못한 나야 오죽하랴.
하지만 이제는 예전과 다르게 스스로를 다구치며 실망하거나 몰아세우지 않는다. 내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다 보면 길을 만나게 될 것테니. 길을 만나지 못하면 또 어떤가. 내가 걸은 그 길 안에 나의 역사가 있고 삶이 그려져 있는 그 길이 바로 나의 길일테니..
2009. 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