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노인과 바다', 산티아고 노인 그리고 헤밍웨이

난 그저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by pumpkin


18247B394FA741F6301E3D




눈물이 북받쳤다. 폭풍이 지난 후의 고요함.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내려앉는 평화로움.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이 마지막 구절이 내게는 잔을 채우는 마지막 눈물방울 되어 넘쳐흐르고야 말았다. 우리 나이쯤 되면 굳이 말이 필요 없이 이해되고 그대로 공감되어 느껴지는 바로 그것.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84일 동안 아무것도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노인이 큰 물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을 안겨준다. 그렇게 오랜 시간 물고기를 잡지 못한 것에 대한 투덜거림이 아니라, ‘오늘은 다를 것’이라며, 운을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모르니 충실하게 준비를 한다. 매일매일은 새로운 하루라며 겸허히 하루를 맞는 노인의 모습은 경건하기마저 하다.


큰 물고기가 잡히길 기다리며 한없이 바다로 나가는 노인. 기다리는 동안의 혹시도 오늘도 허탕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쌓이지만, 그럼에도 놓아버리지 않는 희망. 결국 물고기가 나타나고 그 물고기를 잡기 위한 사투가 벌어진다. 청새치와 싸우며 상어들과 싸우며 보여주는 처절한 자신의 육체의 고통과 나약해지려는 자신의 정신과의 싸움. 자신이 가진 도구와 배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물고기지만, 그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등으로 밧줄을 팽팽하게 메고 있기에 이미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지만, 그는 위로한다.


“별들을 죽이려고 애써야 하는 게 아니니 참 다행이야.” (P78)


정신이 혼미해질 그는 생각한다.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사나이답게 이 고난을 어떻게 견뎌낼지 생각해.
아니면 물고기처럼 고통을 견디는 거라도. 노인은 생각했다.” (P96)


그렇게 힘들게 물고기와의 싸움에 승리하는 노인의 기쁨은 찰나의 순간으로 끝나고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걸’ 바랄 만큼 상어들과의 고통스러운 싸움이 시작된다. ‘이런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아.” (P105)라고 자신의 운 없음을 받아들이면서도, 노인은 ‘어쩌면 운이 좋아’ 상어들을 죽이고 온전히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렇게 끝없이 상어들은 노인의 영광의 증거인 물고기를 차츰차츰 먹어가며 노인의 희망 역시도 야금야금 먹어간다. 첨엔 4분의 3이라도 가져갈 수 있으니 다행이고 짐이 줄어서 배가 가벼워 빨리 나아간다는 것으로 위로하고 의미를 두며 나아가지만 결국 고기는 대가리와 고리만을 남겨둔 채 앙상한 뼈만 남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죽을힘을 다 해 싸운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어려움 속에 처할 때면 기도를 한다. 평소에는 기도하는 신앙인은 아니지만, 예쁘게 봐달라고 주기도문과 성모송을 외우거나 또는 외운 것처럼 쳐달라며 봐달라고 하느님과 순진한 거래도 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사투를 벌이며 지켜내려 했던 그것을 모두 잃었을 때 초연한 자세로 집으로 돌아가는 일 밖에는 어떤 일도 신경 쓰지 않으며 키를 조종하는 것에만 집중을 한다.


우리를 어떠한 고통에서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것이 ‘희망’이다 히지만 어느 순간 그 ‘희망’이라는 것도 내 안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 욕심을 온전히 내려놓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를 모두 잃었을 때 노인의 보여준 초연함이란.... 어쩌면 마음이 홀가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가장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바로 자신에게 다가온 현실을 탓하지 않으며, 매일매일은 새로운 다른 하루임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희망을 놓지 않는 산티아고 노인의 모습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충실히 지키며 결코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산티아고 노인. 자신이 그리도 간절히 원하던 무엇을 얻었을 때 그는 교만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어처구니없이 잃어야 했을 때도 그는 탓하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이며 초연함을 보여주었다. 변명도 없었고 불평도 없었고 떠벌림도 과장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누가 그를 패배시킨 것이냐는 내면의 물음에 그는 말한다. “아무도 아냐.”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난 그저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이야.” (P126) 그렇다. 우리 삶을 패배시키는 것은 아무도 아닌 것이다 그저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갔을 뿐인 게다. 그렇다. 단. 지. 내. 가. 너. 무. 멀. 리. 나. 갔. 을. 뿐. 이. 다.

어떤 힘든 상황에서든 항상 의미를 부여하고 긍정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승화시키는 산티아고 노인.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존재 자체로 눈물이 그렁대게 하는 아름다운 영혼.


그렇게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산티아고 노인이지만 밀려오는 그리움으로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아내의 사진은 옷 밑에 놓아둔다. 자신이 힘겹게 싸울 때 소년을 떠올리며 자신이 살아있는 의미가 되어주는 소년을 그리워하는 부분에서는 어찌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있을까. 노인을 그토록 사랑하고 노인의 외로운 공간을 따뜻한 관심으로 채워주며, 사랑으로 지켜주는 소년. 깊은 상처로 피범벅이 된 노인의 손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소년을 보며 어찌 눈물을 함께 흘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조마조마하며 읽어 내려갔던 ‘노인과 바다’의 결말은 나로 하여금 안도의 숨을 내리쉬게 했다. 혹시나 노인이 잠을 자다 죽는 건 아닐까. 마지막 부분을 읽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으나, 사자 꿈을 꾸는 그의 모습에서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내게 주어진 삶에 자신의 몫을 다하고 최선을 다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평화로움. 그래. 노인에게 운을 가져다주는 이는 소년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삶에 행복을 느끼게 하는 존재. 어쩌면 노인과 소년은 서로에게 그런 의미 일지도 모르겠다.




헤밍웨이 3.jpg



내 안에 함께 한 여러 가지 의문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나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바로 노인의 이름이었다. ‘산티아고’. 빠울로 꼬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양치기 이름도 ‘산티아고’였다. 그리고 ‘순례자’에서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의 여정이 담겨있다. 그런데 헤밍웨이도 그 이름을 썼다. ‘산티아고’라는 이름에는 어떤 신성함이 묻어있는 것은 아닌지.. 물론 ‘성 야고보’를 뜻하는 것이야 알고 있지만, 혹시 그 이름이 안겨주는 또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졌다. 많은 훌륭한 작가로부터 사랑받는 이름이니 말이다.


두 번째로는 ‘왜 이 책을 어린 중학생들에게 읽으라고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어린아이들이 이 책의 의미를 얼마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의 지성의 수준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좀 더 삶의 연륜이 쌓이고 나야 헤밍웨이가 독자들로 하여금 느꼈음 하는 그것, 바로 헤밍웨이가 말하고자 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노인의 기다림에서 느껴지는 삶의 메타포. 물고기와 상어들과의 싸움을 보여주면서 현실과 이어지는 비유. 그리고 싸움에서 돌아오며 그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겸허한 모습이 우리 삶 속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과연 13-4살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게다.


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던 것은, 왜 헤밍웨이는 이렇게 강하고 인간미 넘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인간상을 우리에게 그토록 감동적으로 심어주고는 자신은 ‘자살’이라는 비겁한 행동을 취했던 걸까. 물론 글을 그렇게 썼다고 해서 글과 작가를 동일시할 수야 없지만, 그는 다분히 산티아고 노인과 닮은 부분이 많았던 작가가 아닌가. 그를 스스로 죽음을 몰고 가게 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우울증이라는 병이 합당한 이유라며 갖다 붙일 수 있는 걸까. 마음이 착잡해졌다. 산티아고 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는데, 왜 그는 삶의 끈을 스스로 놓아야 했던 걸까. 내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고 먹먹한 슬픔이었고, 아픔이었다.



헤밍웨이 2.jpg


대충대충 보내고 있던 요즘이어서였는지, ‘노인과 바다’는 내게 삶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며 깊은 성찰을 하게 해 준 작품이었다. 산티아고 노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스러운 현실을 어떤 모습으로 그렇게 아름답게 승화시켰는지. 그가 매 순간 자신의 힘이 바닥으로 내쳐지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그렇게 당당하게 싸워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 속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포기하지 않았는지.. 그의 모습이 안겨주는 감동이 절정에 달할수록 그만큼 나는 작아졌다.


과연 나는 하루하루를 그렇게 새롭게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나은 날’이 될 것임을 믿고 신뢰하며 불평하지 않고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는지. 나는 내게 추구하는 목적과 꿈을 향해 그렇게 온몸과 열정과 최선을 다해 기꺼이 부딪히며 도전했는지. 그리고 내가 그것을 내 손에 쥐었을 때 나는 팔딱되지 않고 겸손되이 받아들였는지. 또한, 그것을 잃었을 때 나는 최선을 다했음에 그 모든 것을 순리대로 받아들이며 그래도 내게 아직 남겨진 그것들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느끼며 감사히 받아들이는 그런 초연함을 가졌는지. 그 모든 것이 내겐 뜨거운 감동이 함께하는 숙제였다.


나는 지금 내 안에서 자꾸만 울컥거리며 울먹되며 나오려 하는 눈물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정말 나는 모른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지.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느끼는 그 거대한 감정들을 모두 글로 쏟아부어낼 재간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그것. 잔잔하고도 깊은 여운이 내 안에 강렬한 불꽃이 되어 남아 있다. ‘삶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침묵’으로 가르쳐준 듯한 그런 느낌. 침묵 만이 보여줄 수 있는 깊고도 깊은 여운...



1424DB394FA741F9306A56

.

.


책과 함께 떠오른 음악...

Alan Parsons Project의 Old and Wise


2012. 05. 06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