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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mpkin Jun 08. 2020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고

게으름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영혼의 성숙에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하다.


스캇 팩의 개인적인 삶을 좀 더 알고 싶었으나,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인터넷 서점에 올려져 있는 정보가 다였고, 심지어 그의 웹싸이트에도 그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보다는 어느 싸이트에서나 얻을 수 있는 공적인 업적이나 그가 쓴 책을 소개하는 것이 전부였다. 


"스캇 펙은 1936년 5월 22일 뉴욕 시티에서 태어났다. 두 형제중 막내 였으며 그는 1959년 릴리 호와 결혼하여 세자녀를 두었다."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구절은 이게 다였다.


관음증 환자도 아닌데 뭘 그렇게 남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하나 싶겠지만, 좋은 책을 읽으면 이 글을 쓴 작가가 궁금해지고,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떤 꿈을 가지고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좀 더 나가 어떤 사랑을 했고, 어떤 죽음을 맞았는지가 궁금해진다. 그렇게 작가의 개인적인 삶을 들여다보면 그의 작품을 좀 더 깊이 공감하며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알고 싶어지는 것 같다.   

책에서 만난 스캇 팩은 그가 사회 속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는 좀 다른 ‘깨인 사람’으로 느껴졌다. 사적인 부부 모임에서 함께 자리에 있었던 남성들이 아내의 위치 또는 아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내어 놓는 의견에 화가 치밀어 분노하는 스캇 팩은 아내던 누구던 ‘한 인격체’로 존중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은 사랑의 본질이며, 사랑이란 자기 확대고 성장임을 강조하며 논리를 펼친다.


그 당시 당연시되었던 남성 우월주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난 열린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음을 단면으로 보여준 스캇 팩의 행동은 참으로 인상적이었고 매력적이었다.


 

내가 그에게 가장 존경스럽게 느껴졌던 부분은 그의 깊은 학식이나 따뜻하고 자애로운 인품도 물론이지만, 치료대상자에 대한 그의 정신과 의사로서의 자세였다.


의사로서는 드물게 인간 심리와 기독교 신앙의 통합을 지향한 그는
집단 이해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형성을 이론화하는 등.
기초를 다지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캐시와 마르시아, 그리고 태오도르의 사례를 특히 잊을 수 없다. 그는 신앙이 깊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치료에 있어서 그는 자신이 믿고 추구하는 어떤 ‘개인적인 가치나 신앙’ 에서 벗어나 온전히 환자의 치료를 위해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들이 온전히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정신 치료를 도왔다. 그가 의사로서의 깊은 인간애와 진정으로 환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많은 치유가 일어나게 했을 것이다.


많은 우리는 내게 옳거나 좋다고 믿고 있는 것은 마치 누구에게나 그럴거라는 생각아래 권유 내지는 강요를 한다. 만약 스캇 팩이 그런 방법을 썼더라면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스캇 팩은 그렇게 자신이 치료하는 환자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가려 했고,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자 했다. 신뢰할 수 있는,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임을 인식시켜주며 환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열며 참여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기다리며 치료해준 자상한 아빠같은 의사선생님이었다. (마치 내가 그에게 치료라도 받은 것처럼 쓰는 분위기지만, 책에서 분명히 난 그렇게 느꼈다.)


아쉽게도 그는 2005년 9월 25일 지병인 파킨슨 병으로 69세의 아직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정신의학계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내게 치유가 일어났음을 느낀다. 감사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는 나를 온전히 매료시켰다.


그의 주요한 저서로는 위에서 말한 ‘길’ 3부작 <아직도 가야 할 길> <끝나지 않은 여행> <그리고 저 너머에>, 장편 추리소설 <창가의 침대>와<거짓의 사람들>, <영혼의 부정>등이 있다.

 






그의 이론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간결하면서도 분명했다. 역설법을 통해 설명해나가는 그의 글은 어떤 주제를 놓고 역으로 파헤쳐나가는 방식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며 훨씬 더 그 흥미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이런줄 알고 고개 끄덕이며 읽다 보면 다음 장에서는 그것을 일부분 수용은 하면서도 왜 그것이 아닌지를 반박하고, 또 그 다음 장에서는 반박과 수용을 모두 합쳐 ‘합’에 이르게 하는 그의 논리법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그의 인내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극단적인 이론에는 신뢰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스캇 팩은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고 풀어간다. 스캇 팩이 좋았던 이유다. 그의 다각도 시선과 이해에 신뢰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연 한 인간이 온전히 자신의 가치와 문화적 배경을 온전히 떠나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인지. 경직된 신앙생활을 하는 여성이 심리 장애를 겪게 되는 환자를 치료할 때 그가 보여준 헌신과 사랑은 정신과 의사로서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보여준다.  


리는 문제가 생기면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면서 달아나려고 한다. 그러나 문제와 고통을 피하려는 이런 태도가 바로 정신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된다.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사람은 드물며 누구나 어느 정도는 문제가 있는 셈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문제아 고통스러운 것을 피해 쉬운 길을 찾으려다가 오히려 건전하고 지각 있는 길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 만든 환상에만 안주하여 현실을 도피하기도 한다. 카를 융은 이것을 “노이로제(신경증)란 항상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P21)



노이로제가 왜 걸리는지, 신경쇠약이 왜 걸리는지에 대한 스캇 팩의 논리는 아주 간단하고 명확했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책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으름 때문이라는 것. 아담과 이브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바로 하느님께 질문을 하지 않은 게으름. 그러니까 창조주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 용기를 내어 마땅히 물어야 했을 질문을 하지 않고 쉬운 길을 택한 것에 대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우리 인류는 원죄를 갖고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 결국 ‘게으름'이 바로 우리의 '원죄'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다가 나의 게으름은 내 탓이 아니라 아담의 유전자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담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더불어 내가 게으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합당한 대상이 생겼음에 뭔지 모를 통쾌함도 느껴졌다.


" 다 너때문이잖아~" (아담 할아버지 때문이잖아요...우하하하하~^^;;)







보통 우리는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내어준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자식이 부모인 우리에게 보내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커가면서 부모들로부터 '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게 된다는 것. 스캇 팩의 말을 들으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을 콕 찔러주는 스캇 팩.


어렸을 때 부모들의 성숙치 못한 행동으로 아이들이 받는 상처와 고통이 어떻게 어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지에 대해 스캇 팩이 보여준 사례는 너무나도 충격적이다. 신앙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 갖는 느낌은 바로 부모가 아이들에게 보여준 그 모습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 역시도 내게는 일깨움이었다.


겉으로는 따뜻한 부모지만 아이들이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지 않는 부모. 겉으로는 사랑이 많은 듯 하나 그 안에 들어있는 엄격함. 부모 자신도 감당 안되는 스스로의 성향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깊이 영향을 끼치는지, 그리고 그것이 아이들의 정신 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치며 어른이 되어서까지 계속 이어짐을 사례로 보여주었다.


무서웠다. 혹시 내가 그런 엄마가 아닐까. 겉으로는 부드러운데 실질적으론 엄한 엄마, 나 아닐까. 우리 딸들이 어쩜 그런 정신적으로 절름발이 어른으로 크는 것은 아닐지 겁이 덜컥 났다. 일을 핑계로 늘 빈자리가 많은 엄마였다.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로 할 때 나는 함께 해주는 엄마였나. 머리 속에서는 나를 위로해줄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바쁘게 돌아갔다. 싸한 통증과 함께.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것들 모두 그냥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 없다. 그 모두가 언젠가 내가 경험했던 그 무엇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결과적인 행동임을 볼 때, 마치 감정의 팽팽할 실낱 위를 걷는 듯한 두려움마저 들었다.


 여러 사례들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나도 보았고, 남편도 보았고, 또한 우리 딸들이 맞게 될지도 모르는 어른이 되었을 때의 정신 세계도 보았다. 과연 나는 어떤 역할로 아이들의 정신 세계에 영향을 주는 엄마일지 그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게 있어 하느님은 늘 감동을 주시는 하느님이고 따뜻하고 포근한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느님이라고 생각을 해왔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음은 바로 엄마 아빠의 사랑 가득한 지난 순간들이 있었음을 느끼며 뭉클했다. 우리 딸들도 하느님을 떠올릴 때 벌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신 따뜻하게 감싸주고 감동을 주는 하느님으로 느껴졌음 좋겠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치료자가 객관적인지 그리고 참으로 환자가 의미하는 그대로를
이해할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 제대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거짓 열망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흥미가 있고 열정적인 관심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심리학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가 심리학자가 될 것도 상담 치료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상상 속에 나를 그려 볼 때, 과연 나는 내가 가진 사고의 영역을 벗어나 온전히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왜냐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 사고의 울타리는 너무나도 두껍기 때문에. 정말 '이런 사람은 이해할 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얘기할 때 나는 온전히 순수하게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이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감정과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잣대로 두지 않았다. 심지어 신에 관한 부분에서도. 캐시와 마르시아, 그리고 테오도르의 사례는 다시 언급하지만, 내게는 감동 그 자체였고 놀라움이었다. 온전히 '나'를 분리 시켜 온전히 환자들을 위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임하는 그의 모습. 어떻게 존경심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책에서 그가 경험하고 보여준 여러 사례가 이해하는데 무척 많은 도움을 주었고 재미있었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부분은 바로 ‘은총’ 편이었다. 그가 은총부분에서 다뤘던 엔트로피와 원죄에 대한 이야기. 그 중 사랑의 반대말은 게으름이라고 말하는 스캇 팩의 게으름에 대한 그의 정의는 새로우면서도 다채롭다.


그는 원죄는 게으름이며, 또한 게으름이란 단지 일을 열심히 하거나 다른 이를 돕지 않는다는 차원이 아닌 ‘두려움’이라고 해석한 그의 주장은 참으로 이색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게으름과 연결시켜 보여준 두렵게까지 느껴졌던 악의 개념,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과 하느님을 연결시켜 보여준 부분은 특히나 내게 아주 깊이 다가왔다. 때때로 무서움과 두려움마저 느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게으름’에서 시작됨을.


읽으면서 즐겁고 재밌었다는 느낌보다는 놀랍고 경이로웠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 싶다. 좀 더 우리의 의식세계를 이해할수 있었고, 부모의 일치되지 않는 행동들이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알게 된 고마운 책이었다.  


칼리 지브란의 '분리되어 있음의 지혜'로 리뷰를 마친다.


칼릴 지브란의 ‘분리되어 있음의 지혜 (일심동체가 아닌 이심이체)’

그러나 당신 부부 사이에는 빈 공간을 두어서,
당신들 사이에서 하늘의 바람이 춤추도록 하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서로 포개어지지는 마라.
당신 부부 영혼들의 해변 사이에는 저 움직이는 바다가 오히려 있도록 하라.
각각의 잔을 채워라. 그러나 한 개의 잔으로 마시지는 마라.
서로 당신의 빵을 주어라. 그러나 같은 덩어리의 빵을 먹지는 마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라. 그러나 각각 홀로 있어라.
현악기의 줄들이 같은 음악을 울릴지라도 서로 떨어져 홀로 있듯이.
당신 마음을 주어라. 그러나 상대방 고유의 세게 속으로는 침범하지 마라.
생명의 손길만이 당시의 심장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서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붙어 서지는 마라.
사원의 기둥들은 떨어져 있어야 하며,
떡갈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2009.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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