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참 애썼다. 사느라, 살아 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책을 보는 순간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제목만을 보고는 어떤 ‘잠언집일까? 사색을 안겨주는 책일까? 깨달음을 안겨주는 생활 철학서 같은 책일까?’ 등등. 제목이 내 눈에 들어온 그 찰나의 순간에 내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책은 마치 학창 시절 이런저런 아름다운 시들을 모아 예쁘게 꾸미던 시집처럼 감성을 터치하는 사진들과 아늑한 그림들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진은 누가 찍었을까? 이렇게 글 분위기에 맞춰 사진과 그림을 넣으며 편집한 이는 또 누구일까?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또다시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도 마음에 쏙 들었던 게다. 사춘기 소녀의 예쁜 시집 노트처럼 꾸며진 느낌 가득한 책이 말이다.
본인은 전라도와 경상도, 서울의 말씨와 억양을 고루 익혀
3개 국어를 할 수 있다고 자부하나,
정작 토박이들에겐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
책날개에 쓰여있는 작가 정희재에 대한 소개다. 그 코믹함과 재치에 얼마나 웃었는지. 이 단 한 구절로 나는 ‘정희재’라는 작가가 무작정 좋아졌다. 사투리를 외국어에 비유한 그 모양새가 재밌기도 했지만, 그 뒷면에는 그녀의 낯선 곳에서의 삶과 그녀가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쳤어야 할 고된 삶 속에 깊은 공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치열한 고백적 글쓰기’라던가 ‘도시 곳곳을 누비며 호기심과 열정, 마음의 평화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고 있다’라는 표현도 참 마음에 들었는데, 우연스럽게도 마침 이 책을 읽는 즈음 ‘열정’과 ‘비움’이 함께 공존하기는 참으로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였기에 어떤 동지의식마저 느껴졌던 것 같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란 제목의 작가의 프롤로그를 읽으며, 어떻게 한 ‘남성’의 감성이 이리도 섬세하고 여릴 수 있다는 것인가. 그 맑고 투명한 표현들에 가슴이 파르르 떨리며 어떻게 이렇게 잔잔한 표현들로 우리네의 설움과 희망을 글로 옮겨놓을 수 있었는지.
하긴 남자라고 감성적이지 못할까나? 그런 여리디 여리고 섬세한 감성적인 터치로 나를 감정의 폭풍 속으로 빠뜨린 남자가 있긴 했다. 이정하 시인. 동갑내기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시대의 정서를 옮겨놓았기 때문인가. 이정하 시인의 시를 읽을 때면 마치 내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한 동안 그의 시 안에서 허우적거리던 때가 있었다. 어쨌든, 나는 책 첫 페이지에 쓰인 작가의 말을 읽으며 눈물을 훔쳐내야 했다. 이렇게 첫 시작부터 나를 눈물 나게 하다니.
나는 이 ‘정희재’라는 작가의 섬세한 터치와 여성적인 감성에 감동에 감격을 하며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는 나는 또 한 번의 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너무나도 놀랍게도 그는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는 것이다.
나는 단순히 남성적인 분위기의 이름 석자 ‘정희재’만 보고 내 직관만을 믿고서는 당연하게 그녀에게 남성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웃지도 울지도 못할 노릇인지. 이렇게 때때로 우리는 명확한 사실 앞에서도 자기 멋대로 착각하고 받아들이는 집요한 이기성을 지니고 있음에 나는 또 얼마나 놀라야 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작가에 대한 여러 가지 느낌이 들다 보니 문득, 그녀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물론 여기서 ‘어떤 사람인지..’는 어떻게 생긴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대체 어떤 분위기를 가진 그녀기에 이렇게 남의 감성을 자기 맘대로 주물럭댈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다른 사이트에서는 구하기 힘들었고, 구글에서 건진 그녀의 소박함과 섬세함과 여린 감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사진을 한 장 어렵게 구했다. 이렇게 생긴 분이셨구나. 그녀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선글라스를 벗으면 어떤 모습일까.. 혼자 상상하면서 일단 호기심의 갈증에 목을 축인 나는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의 글은 그녀의 모습에 풍겨지는 분위기만큼이나 잔잔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다. 감정의 폭풍 속에 휘말리는 거친 열정이 뿜어내는 빨강이 아닌, 그 모든 것을 감싸안는 듯한 파스텔톤의 푸른빛이라고나 할까.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작가 소개 글에서 ‘도시를 누비며 호기심과 열정, 마음의 평화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고 있다’라는 표현이 그대로 느껴진다.
잔잔하고 여린 듯하면서도 강한 내면이 느껴지는 정희재. 지난날을 추억하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 담긴 많은 그림들은 참으로 낭만적이었고, 맑고 깊었다. 그녀는 그 안에서 얼마나 깊은 사랑을 했을까. 괜히 내 가슴이 먹먹해지고 뻐근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일상 속의 기억들. 너무나 평범해서 내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그러한 소재들을 그녀만의 따뜻함으로, 그녀만의 섬세함으로, 그녀만의 여린 감성으로 우리에게 꺼내 보여주며 내 일상을 다시 바라보게 해 주었다. 그렇게 때로는 웃음 속에, 때로는 눈물 속에, 때로는 가슴 먹먹해지는 싸한 고통 속으로 우리를 내몰았다.
그녀의 글이 그렇게 한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온전한 공감 속으로 몰고 간 것은 아마도 그녀가 ‘도시’라는 거대한 괴물 안에서 느꼈던 그 일상들이 바로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 평범해서 미처 느끼지 못한 당연한 것들을 ‘정희재’라는 현미경으로 확대시켜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 그녀는 Wallflower처럼 드러나지 않는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 일상은 그녀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는지, 어떤 명상 거리가 되었는지, 그 일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그녀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느낌의 포장 없이 진솔되게 보여주었다. 간간히 나오는 스승님과의 대화는 짧지만 강렬했고, 깊은 깨우침을 함께 안겨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를 감동 속으로 내내 내몰아가는가 하면, 또는 너무나도 웃겨서 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한다.
‘이방인에게는 낯선 풍경들’ 이야기 중 티베트에서 온 친구의 눈에 보인 낯선 풍경 중...
“식당에서 그 많은 반찬을 남기고 가던데요.
처음엔 잠깐 어디 갔다가 다시 와서 먹는 건가 했어요.” (P157)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의 이야기...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막 뛰더라.
불난 줄 알고 나도 죽어라 뛰었잖아.” (P157)
아, 완전 죽음이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유머도 콩트도 아닌 글이 이리도 웃겼던 것은 바로 우리가 그런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가 어느 누군가의 더듬이에 걸려 새롭게 인식될 때,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사실에 겸연쩍은 웃음이 이렇게 거창한 웃음으로 번지는 것이다.
그녀에게 그리움을 안겨주는 수유리는 나에게도 아련한 그리움을 안겨주며 행복했던 한 때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수유리를 우리는 우이동이라 불렀다. 어렸을 때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여 동두촌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터미널’이 그녀에게 주는 의미는 한국을 떠났을 때, 친구들이 그리울 때면 가곤 했던 ‘우체국’이 내게 안겨주는 그 의미와 같았다.
그녀는 말한다. 언제나 도시 때문에 사람들 때문에 지치고 피로에 짓눌린다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도시가 아니었다고. 결국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였다고 말이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세상 그 어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일 것. 행복은 발견의 문제이지 성취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 진정한 여행은 낯선 곳에서 돌아와 내가 살던 집에 다시 짐을 풀면서 시작된다는 것, 이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 그처럼 여러 번 배낭을 꾸렸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렇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바로 이곳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곳에서의 '그곳'은 내가 도착하는 그 순간부터 '바로 이곳'이 될 테니까.
정희재가 그랬듯이, 파울로 코엘료가 그랬듯이, 그것을 느끼기 위해 꼭 떠나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고 싶은 것이다. 돌아와서 바로 지금 이곳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떠나본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도 떠나보고 싶은 것이다. 나 역시 '그랬노라고' 내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녀에게 느꼈던 부러움과 감동 그것은 그녀의 일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이었고, 그녀의 감성 풍부한 표현력이었다. 그녀의 표현력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비유가 글로 표현되어 나오는지. 그녀의 언어 표현에는 ‘한계’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고 표현하고자 하는 그것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그녀의 능력이 내게는 감탄이었고 부러움이었다. 물론 ‘그녀는 작가니까..’라고 합리화를 시킬 수 있지만, 모든 작가가 그런 것 또한 아니니까...
인제 그녀의 책을 읽는 대가로 봇물처럼 터지는 눈물을 제물로 내놓아야 했던 그녀의 말로 끝을 맺으려 한다.
나는 이제 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지쳐, 당신에게 눈물 차오르는 밤이 있음을, 나는 또 감히 안다. 당신이 무엇을 꿈꾸었고, 무엇을 잃어 왔는지를. 당신의 흔들리는 그림자에 내 그림자가 겹쳐졌기에 절로 헤아려졌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갔지만, 끝내 가 버리던 버스처럼 늘 한 발짝 차이로 우리를 비껴가던 희망들, 그래도 다시 그 희망을 좇으며 우리 그렇게 살았다. (...) 당신, 참 애썼다. 사느라, 살아 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그래...
우리 모두 사느라
살아 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우리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그래서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우리의 희망이 계속 타오를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침내
아직 다가오지 않았던 그 행복의 순간이 우리에게 축복처럼 주어지는 날
두 팔 벌려 꼬옥 안아주기를
그동안 애썼다고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말이다.
2012.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