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anto da Paz로 쉬러 오는 길, 내 가방엔 다른 휴가때보다 책이 몇 권 더 들어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쉬고 싶었기 때문에 생각을 많이 해야하거나 깊은 내용의 책보다는 쉽게 공감 속에 읽을 수 있는 책들이나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집어넣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온 책이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와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 였다.
알랭 드 보통이 히드로 공항에서 일주일 동안 상주하며 그의 눈에 비친 느낌을 기록한 <공항에서 일주일을>은 사실 벌써부터 읽고 싶은 책이었다. 알랭의 <불안>을 읽으면서 그에 대한 저자 조사를 하다가 접한 기사가 나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공항은 특별한 곳 같았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알베르티나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클로이지만, 알랭 드 보통이 순진하고 이 귀여운 미소를 가진 그녀를 만난 곳이 바로 공항이다. 어쩜 그래서 '공항'은 알랭에게 특별한 의미를 안겨주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뻘쭘한 기억이지만 지난날 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공항이나 박물관, 또는 음악회 같은 곳에서 멋진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런데 왜 그런 멋진 사랑은 소설 속이나 이렇게 멋진 작가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인지. 나는 나를 프렌드로만 생각하는 친구를 줄곧 10년을 짝사랑하며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야 했으니. 운명이란 것이 이토록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알랭 드 보통을 미치게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윗트 넘치는 시니컬한 비유를 사랑하기 때문이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평소 너무나 당연하게 스쳐 지나가는 일상 속의 장면들이 그의 더듬이에 걸리면 그것은 클로즈업되며 갑자기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 되고,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시크릿 가든으로 톡 뛰어들게 된다. 그러면 특별할 것 없는 회색 톤으로 가득한 나의 일상이 컬러링 되는 황홀한 느낌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나는 그 느낌을 너무나 사랑한다.
책을 읽다 보면 가끔씩 현란하게 펼쳐지는 언어의 향속 속에 숨어있는 섬세한 터치를 놓쳐버려 몇 번씩 같은 문장을 되풀이하여 읽곤 한다. 그가 한 단어 한 단어 세심하게 그려놓은 단어들을 놓치지 않고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다. 그의 책을 천천히 읽어야 하는 이유다. 진지하게 읽어 내려가다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웃음이 빵 터지게 하는 알랭. 하지만 정작 본인은 너무나도 진지해서 더 웃기는 코미디 같은(그의 조용하면서도 지적인 진지한 눈빛에서 느껴지는 개구 끼). 바로 그런 휴식 같은 쉼표를 찍어주는 알랭의 섬세하면서 시니컬한 위트를 정말이지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나의 은근한 유머와 농담이 표현 안 될까 봐 겁난다.
엘르지와의 인터뷰 중 나의 시선을 끌었던 부분이다. "나비 수집가의 성공은 원하는 나비가 망에 잡혔을 때이듯이, 작가로서의 성공은 작가가 원하는 나비, 즉 단어가 망에 잡혔을 때다. 그렇게 신중하게 단어 하나하나 선택해 쓴 책인데 오역된다는 것 자체가 공포다."라고 말하는 보통. 그에게 알려주고 싶다. 내가 얼마나 그의 은근한 유머와 농담을 사랑하는지.
그는 접근, 출발, 게이트 너머, 도착이란 평범한 타이틀 속에 공항의 모든 것을 담았다. 공항의 외적인 건축 모습에서 내적인 구조까지.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을 담았다. 그 표정 속에 숨겨진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행복도. 그리고 먼 훗날,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을 아버지의 모습도.
기대감과 설렘 속에 여행을 떠나는 이들. 그리스의 멋진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우주를 가고 공기를 가르는 하이 테크놀로지의 절정인 비행기로 하늘을 날지만 열심히 일한 만큼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함에서 오는 갭으로 서로에게 주는 상처에 대한 치유 방법을 알지 못하는 우리 현대인들의 고뇌. 그 아픔까지도 품에 안은 공항, 그렇게 꿈과 불안과 두려움과 설렘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 그가 말하는 공항이다. 화성인이 온다면 공항을 보여주고 싶다는 알랭의 기발한 제안에 반대 손을 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브라질 상파울루 과룰료스 공항
두 성인 남자가 묘하게 만나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은 객실에 비치된 드레싱 가운 밑은 알몸이었다. 또 한 사람 (에스토니아의 작은 도시 라크베레에서 영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근처 힐링턴에서 네 명과 방 하나를 함께 쓰고 있었다)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제복에 앞치마를 두르고 명찰을 달고 있었다. 이렇게 만난 뒤에 벌어지는 의식에 주목할 만한 점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한 사람은 늘 하는 말처럼 약간 짜증스럽게, “텔레비전 옆에”하고 내뱉으면서 계속 서류를 정리하는 척한다. 이런 능력은 국제적 회의에 참가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발전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나의 휴식처에서 알랭과 함께 했고, 그와 함께 공항의 구석구석과 그의 눈에 비친 온갖 여행객들의 사생활과 고민들, 그리고 기쁨과 행복과 슬픔과 두려움도 만났다. 그리고 일반인인 나에게는 출입이 허가되지 않는 금지 구역에도 그를 쫓아 들어가 보기도 했다. 또한 가운 속의 알몸의 남자와 유니폼에 앞치마를 두른 두 남자의 묘한 만남에도 함께 했다. 앞으로 가운 두른 남자를 보면 알랭을 떠올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한 알몸일까 아니면 속옷을 입었을까 하는 기이한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그렇게 공항은 ‘떠남과 만남’이 주는 우리 인간이 가진 모든 느낌과 감성을 뿜어내기도 하고 품에 안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잊고 또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이미 습관처럼 익숙한 일상으로. 또 언젠가 나의 ‘행복’을 찾으러 떠나고 싶은 바람과 함께.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지금 ‘이곳’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왜 그리도 어려운 것일까. 어쩌면 여행은 우리가 가보지 않은 또 다른 길에 대한 막연한 꿈을 대리만족시켜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공항이 그리 끈끈하고도 복합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것도 역시, 공항은 ‘여행’으로 이끌어주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휴가지에서 만난 섬세하고 매력적인 알랭의 눈을 통한 ‘공항’이란 공간을 어깨너머 구경하는 것은 참으로 묘한 즐거움이었다. 그가 비행일지를 쓰게 되는 날을 나는 아마도 목을 내밀고 기다리게 될 것 같다.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 되어 그 고고한 기다림이 그리움으로 질퍽되지나 않을런지....
2011.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