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상대성 이론, 평등한 사회는 불가능하다
<위험한 생각>은 제목부터 위험스러운 분위기로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체 어떤 내용들이 그 안에 있을까? 책을 펼쳐 들고 목차를 주루루 훑어보니 얼마나 많은 석학들의 글들이 실려있는지. 서문과 입문을 써준 존 브록만과 스티븐 핑거를 빼고도 110명의 글이 실려있었다. 제목을 슬쩍 흝어만 봐도 분위기가 만만찮다. 진지하고 심각한 주제들. 이런 주제들을 놓고 그들은 어떤 ‘위험한 생각’을 펼쳐 나갈 것인지 가슴이 콩닥콩닥.
‘이번 리뷰는 어떻게 써야 할까..?? ’ 하다가 한 챕터를 읽으면서 느꼈던 순간순간의 느낌을 올리는 것이 내겐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챕터를 쓰기는 좀 무리겠지만.. 느낌이 컸던 부분들을 그냥 편하게 적기로 했다. 그리고 챱터마다 전체의 글에 대한 느낌이 더 강한 글은 리뷰에 적었고, 부분적인 글에 대한 인상이 더 깊었던 글들은 초서에다 그 느낌을 적으며 리뷰와 초서의 반복을 피했다.
멀티 라이프 - 우리는 모두 가상이다 (클리퍼드 피코버)
이 시뮬레이션이 현실화된다면, 가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가상이 되는 이 혼돈 속의 삶 안에서 과연 우리는 끈끈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맛볼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이 꿈꾸는 상상의 세계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느껴지는 순간의 행복은 마약을 하며 맛볼 수 있는 순간의 쾌락 같은 것이 아닐까? 이렇게 각자의 세계 속에 빠져 살게 된다면 ‘관계’ 속에 이어지는 삶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 왠지 내게는 ‘환상’으로 느껴지지가 않고 ‘Chaos’가 그려진다. 너무 부정적인 생각일까?
그러면서도 한편, 나는 어떤 삶 속에 들어가고 싶을까. 내가 들어가고 싶은 상상 속의 10가지 삶은 어떤 것일지 궁금해진다.
질주하는 소비주의, 페르미의 역설을 설명한다. (제프리 밀러)
‘질주하는 소비주의’라는 제목과는 무관한 내용이어 좀 의아스러웠다. 아니면 내가 연결을 못 시킨 건가.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많은 테마 중의 하나가 바로 ‘UFO’와 ‘우주인’에 관한 것이다. 학생 시절 UFO와 우주인에 관한 책 속에 푹 빠져 지냈던 적이 있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사강’을 알게 된 것도 그때쯤이며, ET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것은 내가 우주인을 보고 안 보고의 실경험과는 무관하다. 나는 하느님을 본 적은 없지만 그분의 존재를 의심의 여지없이 믿고 느낀다. 억지 비유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유독 ‘지구’에만 지적 생물을 만드셨다는 것은 왠지 하느님답지 않다. 이 지구를 사랑하셔서 이 곳에 지적 생물을 창조하셨다면, 역시 다른 행성 어딘가에도 역시 이런 지적 생물을 창조해놓으시지 않으셨을까.
이 부분에서 굳이 ‘하느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수억만 개의 별들 중에 유독 지구에만 생물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억지스러우며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고 생각한다. 이 조그만 지구에도 얼마나 불가사의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데, 하물며 이 전우주 Universe를 놓고 본다면, 두말하면 숨찬 상황 아닐까.
이 부분은 아주 흥미롭게 읽었는데, 정말 웃기고 배꼽 잡은 부분은 바로 우주인들과의 접촉이 왜 안되는지에 대한 그들의 상상 부분이었다. (그니까, 적어도 내게는) 우주인들의 자폭이라던가,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라는 추측은 너무나도 내게는 황당한 상상처럼 들렸다. '이 방면에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고작(?) 그 정도의 상상력밖에 발휘할 수 없었던 걸까'하는 의아심마저 들고(전문지 식도 없는 내가 감히 이런 표현을 하다니.^^;;). 어쨌든, 내게는 너무나도 설득력 없어 보이는 가설들이었다.
그럼 나의 의견은? 내 생각에는 그들의 주파수와 우리 지구인의 주파수가 달라서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이것은 순수한 나의 생각은 아니다. 칼 사강이 그렇게 생각했고, 아담 스키 박사가 그렇게 생각했고, 기억은 안 나지만 또 다른 학자가 그렇게 생각하며 안테나를 우주에 향해 펼쳐놓고 있다는 글을 읽었는데, 내게는 그 가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분명히 그들도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지적 생물을 찾고 있을 거란 생각. 우리가 그렇듯이. 그런데 서로의 주파수가 맞질 않기에 서로 접촉 시도가 안 되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이 너무 앞서 있거나 또는 그들과 다른 채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
어쨌거나 스티븐 핑거가 얘기했듯이 아무리 황당한 생각이어도, 그것을 밖으로 표현해내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함께 연구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임을 이번 글을 통해 느꼈다.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자의 유전자를 벌하라 (리챠드 도킨스)
앞장에서 여러 번 언급된 리챠드 도킨스의 글을 직접 읽으면서 (짧은 글이지만) 그의 파격적이고 도발적이면서도 계몽적인 사고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컴퓨터가 망가지면 어떤 부분에 이상이 생겼는지 찾아 수리해서 사용하는 우리들. 한낱 사물에 지나지 않는 컴퓨터에는 그런 애정(?)이 베풀어지면서 왜 범죄자들에게는 ‘왜 그들을 수리나 부품 교체가 필요한 결함이 있는 대상으로 볼 수 없는가?’ 그의 물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되새겨보게 하고 되돌아보게 한다.
‘나의 위험한 생각은 우리가 마침내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베이절 폴티가 자동차를 매질할 때 그를 비웃는 것과 똑같이, 범죄자 개인을 비난하고, 그에게 책임을 묻는 일을 비웃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 계몽의 수준에 영원히 도달할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더욱 두렵기도 하다.’
그의 이런 두려움은 그 두려움의 깊이만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느껴져 감동이었다. 나는 나 먹고 살 기두 바쁘다. 나하나 제대로 성장하자고 무지 노력하면서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다. 내 우주의 중심은 늘 ‘나’였다. 아니 ‘나’ 다. 나는 내가 내가 원하는 만큼 성장하지 못할까 ‘두려운’것이고, 리쳐드는 이런 인간애가 가득 넘치는 계몽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까 ‘두려움’인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지구에 사는 두 인간의 사고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반성’을 해야겠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좌절감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인간에 대한 지식이 인간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베리 스미스)
참으로 많은 학자들이 ‘마음’, ‘생각’ 또는 ‘의식과 무의식’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분야가 얼마나 ‘미지의 세계’인지를 보여주는 것일 게다. 우리가 느끼는 ‘의식’에서 비롯되는 행동들이 실은 그것을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 전인 ‘무의식’에서 벌써 반응했으며, 그것이 잠시 후 ‘의식’을 통해 행동으로 표현되어 나온다는 사실은 정말 너무 놀랍고 신기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지그 지글러도 그의 책에서 ‘무의식’에 관한 언급을 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위험 속에 놓여있는지에 대해 풀어놓았던 그의 글이 떠오른다. 그는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이 ‘무의식의 세계’를 잘 이해한 사람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한 것 같다. 이 장은 읽으면서 매트릭스가 연상되었다. 가상과 현실에서 정체성의 혼동을 일으키는 앤더슨과 네오처럼 우리는 열심히 우리의 꿈과 이상을 향해 살기도 하고, 또는 그냥 삶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대로 살기도 하지만 결국은 우리는 이미 짜여있는 거대한 프로그램의 한 부분이란 생각. 소름 끼친다. 그러면 여기서 ‘자유의지’라는 것은 우리의 착각인 것이다. 결국은 하느님의 선물인 그 자유의 지조차도 이미 프로그램에 의해서 실행되고 있다는 것. 가설이라고 해도 무섭다.
영혼은 없다. (존 호건)
존 호건의 우려가 이해가 가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뚝배기 배짱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혼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라는 나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다. 아무리 완벽한 Program이라 할지라도 ‘영의 세계’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가설로 세우는 것조차도 내게는 터무니 없는 바보 같은 착각으로 느껴진다. 그 어떤 훌륭한 프로그램도 그것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고, 그 프로그램을 만든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만약, 컴퓨터로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 치더라도 그러면 컴퓨터가 고장 나 프로그램이 손상되었을 때 우리 영혼의 세계도 잠시 휴식을 취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우리의 영혼이 혼돈상태에 들어간다는 뜻일까. 싸이보그를 만들어 인간이 원하는 대로 조정한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영혼’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임으로 여기서 논할 부분도 아니다.
우리는 우주에 홀로 존재한다 (로드니 브록스)
로드니 브록스의 ‘우리는 우주에 홀로 존재한다’를 읽고는 왠지는 모르지만 로드니 브록스의 외로움과 슬픔이 느껴졌다. 옆에 있었으면 어깨를 도닥거리며 말해주고 싶었다. “로드니, 그렇지 않아요, 이 우주에는 절대로 우리만 존재하진 않아요, 어딘가에 ‘그들'이 있지요. 단지 우리는 만나지 못했을 뿐이에요.”라고 말이다..
이 유니버스 전체를 통틀어서 오직 지구에만 지적 생물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만약 '정말 그렇다면…'하고 생각해볼 때 참 쓸쓸할 것 같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형제 종족을 찾는 우리들, 설사 없다고 하더라도 ‘있을'거란‘가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자극을 주고 또한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그들과 만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할 것이고,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발전시킬 것이고, 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과정 중에 지금껏 알지 못한 또 다른 많은 신기한 것들 접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없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모든 것은 중단될 것이고, 인간은 그쯔음에서 멈춰버릴 것이다.
어쩌면, 다른 행성에 지적 생물이 살고 있는지 아닌지는 정작 중요한 사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우리가 잡을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란 글이 떠오른다. 그렇듯이, 그들이 존재한다는 희망을 갖고 준비하는 삶을 사는 생 안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존재 내부에 존재한다 (키스 데블린)
키스 데블린은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을 극단적인 표현이 아닌 좀 더 따뜻한 인간의 본질적인 입장에서 다루며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의견은 찬성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그렇게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그 이면을 되짚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내가 ‘위험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같은 그이 유로 그는 그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본질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며 외부의 힘에 기대지 않게 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의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깨닫는다는 것. 그럴듯한 이론이다. 그가 펼친 이론은 부드럽게 와 닿는다. 표현 방법이 맘에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관한 어떤 방법론에 관한 부분인 것이지 그렇다 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곳곳에 폭탄이 존재한다. (프랭크 티 플러)
그가 쓴 제목처럼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는 연료와 장치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고, 또한 물질 100kg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1000메가톤의 핵폭탄에서 방출되는 것과 맞먹는 양이라고 한다. 그래서 행여라도 테러리스트들이 그것을 사용하여 인류의 존재가 멸망에 이르게 될까 봐 걱정이라는 프랭크 티 플러. 그러한 그를 보면서 ’ 우띠~ 그러면 그런 방법이 있다고 가르쳐주지 말지. 다 말해놓고선..’하는 투덜거림이 나왔다. 하긴, 그가 얘기 안 한다 하여 그쪽의 전문가인 테러리스트들이 모를까마는. 오싹한 상상이다.
선하고 옳은 말만 하는 사회 (대니얼 길버트)
대니얼 길버트의 ‘선하고 옳은 말만 하는 사회’는 아주 짧은 텍스트지만 콩트처럼 재밌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곱씹게 하는 글이었다. ‘생각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 지껄임이나 수다스러움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어리석음이나 소외감을 느끼게 하지만 그런 다양한 생각들이 거래되는 시장으로 입장하는데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고 말하는 대니얼. 또한 ‘상스럽고 모욕적이고 무식한 의견들이야말로 자유로운 사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같은 것’이라는 대니얼 (너무 다정하게 부르는 분위기다..^^;;)의 표현은 너무나도 재밌었고 맘에 쏙 들었다.
‘공적인 대화에서 사용하는 모든 말들이 공정하고 선하고 옳기만 하다면, 그때야말로 그 사회로부터 도망쳐 나와야 할 때이다.’ 그럴 것이다. 우리 인간 내면 속의 진정한 감정을 숨기고 겉으로 포장되어 나와져야 하는 사회는 이미 인간미를 잃은, 순수함을 잃은 가식적인 사회로써 우리는 이미 우리 감성의 자유로운 표현이 용납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물론 꼭 욕을 하고 상스러운 소리를 해야 자유로운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쯤은 모두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여건에서 그래야 한다면 그것은 감성이 살아있는 사회가 아닌 이미 죽은 사회나 다름없을 것이기에 우리는 그곳에서 도망쳐 나와야 한다. 우리의 감성표현이 자유로울 바로 그곳으로...
지구 온난화에 대한 투쟁은 패배했다 (폴 데이비스)
폴 데이비스의 지구 온난화에 대한 투쟁 이야기는 참 포용력 있게 다가왔다. 회색의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현재의 우리의 자세에 대해 신중한 언급을 하는 그의 글에는 믿음이 갔다. 어두운 미래를 그려놓음으로 우리를 암울한 삶으로 몰아넣고 싶지 않은 희망적인 메시지가 들어있어서 읽으면서 푸근했다. ‘그래. 만의 하나 지구의 온난화가 발생되어도 우리 인간의 멸망을 뜻하는 건 아닌 거야.”하는 희망적인 메시지...
우리는 우주의 유일한 생명체가 아니다 (로버트 샤피로)
로버트 샤피로의 ‘우리는 우주의 유일한 생명체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이유가 신에 대한 부정으로 연계시킨 그의 주장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문득, 신부님께 우주에 다른 생명체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것인지 여쭤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우주 진화론은 빅뱅 이래 일어나 일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생명의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한다.
생명이 시작되는 데는 어떠한 기적이나 커다란 행운의 손길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점들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우리는 지구 너머에 있는 생명체를 찾는 데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의 우리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체가 아니다.(P179)
나의 생각은 간단하다. 전문가의 지식을 가진 나는 아니지만, 상상을 하는 데 있어서 꼭 박사학위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첫째. 이 수억만 개가 넘는 별들 중에 오직 지구에만 생물이 산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옹졸한 생각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환경적인 요소’를 운운하는데, 그 수억만 개를 다 조사하고 연구했나. 아니잖은가. 어딘가 과학자들이 발견하지 못한 몇 억 광년 저편의 거리에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별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어느 별에서는 새로운 생물이 그런 악적인 조건에서도 견딜 수 있는 적응력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이렇듯, 내게 수많은 ‘If’가 꼬리를 물고 튀어나온다.
둘째, 하느님은 절대 옹졸한 분이 아니시라는 점이다. 전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유독 지구에만 생물을 만들어놓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너무 작은 틀 안에 가둬놓는 행위다. 하느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셨듯이, 온 우주를 사랑하시는 분. 그런데 왜 유독 지구에만 생물을 넣어놓으셨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런 단순한 상상이 내가 다른 행성에 지적 생물이 살고 있다고 믿게 하는 배경이 되는 나름대로의 이론이다.
내가 그러한 주장을 하는 그들을 볼 때 답답해 보이듯이, 하느님의 창조 운운하며 반대 의견을 펼치는 내가 그들에게도 답답해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일 거란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슈퍼 거울 - 합리적 자율성을 의심하라 (마르코 야코보니)
마르코 야코보니의 ‘슈퍼 거울 – 합리적 자율성을 의심하라’는 여러 가지로 내게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다가왔다. 폭력적인 영화나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변하게 되고, 또한 범죄영화를 보고 흉내 내는 모방범죄들도 종종 일어나는 것으로 볼 때 그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고, 동시에 희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폭력적인 것을 보면서 폭력적이 되어가는 사람들도 있다면,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을 보면 그런 폭력적인 것도 부드럽게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내게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다가왔다. 훌륭한 위인전을 많이 읽으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였구나. 모방하고 싶어 지니까. 닮고 싶어 지니까.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여정에 들어서게 되니까. 그래서 '역할 모델이 중요하다고 하는 거구나' 하는 수많은 이유들이 떠올랐다.
읽으면서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미국 동화 ‘큰 바위 얼굴’이 떠올랐다. 큰 바위 얼굴에 대한 전설을 들은 전설로 전해져 오는 것처럼 꼬마 아이는 마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번창시켜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는데 매일매일 산 위의 큰 바위 얼굴을 쳐다보며 동경하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바로 ‘큰 바위 얼굴’을 가진 바로 그 전설의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 우리 딸들에게 그 아이들의 꿈과 연결되는 역할 모델이 필요하듯이, 내게도 앞으로 남은 삶을 나의 꿈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 모델이 필요함을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느꼈다.
사이버 횡포를 막을 수 없다. (데니얼 골먼)
조절 기제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즉 상대의 응답을 실시간으로 피드백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터넷은 그러한 실시간 피드백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우리 뇌 속에 있는 충동 억제 회로를 당황하게 만든다.
감시 신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탈 억제, 즉 속박에서 풀려난 충동으로 나타난다. (P187)
대니얼 골먼의 ‘사이버 횡포를 막을 수 없다’를 읽으며, 이 사이버 횡포가 바로 실시간 피드백이 되지 않음으로 인해 뇌 속에 있는 충동 억제 회로의 불균형으로 탈 억제 현상을 통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흥미로우면서도 놀라웠다. 그렇다면, 이 사이버 횡포를 막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우리는 너무나도 위험 속에 노출되어있고, 인제는 ‘인터넷’이라는 괴물(?)로 인해 우리는 소중한 ‘도피성’마저 잃어버렸다. 내게는 참으로 고마운 인터넷이 사이버 테러에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는 바로 고문 그 자체였을 것. 가까이 우리가 사랑했던 ‘최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녀가 살아있을 때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라곤 ‘질투’밖에 본 게 없다. 내게는 그냥 좋다 싫다도 못 느끼는 그냥 ‘텔런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죽음은 나의 감정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괜찮아요' '사랑해요’라는 말 한마디를 못해준 것이 한으로 남을 것만 같은 그런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나를 가슴 아프게 했다.
이렇게 사이버 횡포는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그런데,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또 다른 그들은 조금의 감정의 동요를 느끼고나 있을까. 그들이 한 짓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아주 작은 뉘우침이라고 갖고나 있을까. 최진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또 다른 그녀는 ‘그날’ 등산을 하며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을 그녀의 사이트에 올렸다는 소식은 경악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무감각하고 모든 것이 ‘나’만 중요하고, 모든 삶의 중심인 ‘나’이 세상. 너무 무섭고 슬펐다. 싸이버 불링에 시달리는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너무나도 안타까운 죽음들.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제대로 피워보기도 전에 삶을 스스로 놓았다. 어린 청소년들을 삶에서 벗어나고 싶게 만드는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들이 커서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았을 때, 그 아이들이 그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칠까, 아니면 자기 자식만 중요하다고 기를 쓰고 달려들까. 과연 ‘느낌’이나 ‘뉘우침’이라는 단어가 그들의 사전에 있기나 할까 하는 다소 극단적인 상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열명을 구하진 못해도. 지구의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내 아이, 내 가족을 깊은 관심 속에 사랑을 하면서 그것이 주위로 뻗어나가게 하는 것. 그것만이 세상을 바꾸게 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오프 세상에서도 이미 많은 고통을 겪으며 생존해가는 우리들, 싸이버 상에서 마저 그런 횡포 속에 고통을 겪는다면 과연 우리의 도피성은 어디란 말인가. 슬픈 일이다.
익명성은 통제되어야 한다 (케빈 켈리)
‘프라이버시는 믿음에 의해서만 얻어지며, 믿음은 일관된 정체성을 요구한다’는 케빈 켈리의 말에 동의한다. 익명은 가면과도 같아서 커튼 뒤로 살짝 숨어 나는 하고 싶은 얘기를 다하지만 상대방은 내가 누군지 모르기에 따르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함께 따른다. 케빈 켈리가 언급했듯이, 힘이 약한 비주류파에게 힘을 주며 자신들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장점도 있지만, 이 익명을 가장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피해를 주는지. 사회성은 결여되고, 인간성을 잃어버린 오프 사회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들을 단지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이 내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횡포를 부린다. 인터넷의 발달 속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고 있으며, 우리의 안식처이며 피난처마저 잃어가고 있는지 시간을 더해감에 따라 강도 깊게 느끼고 있다.
대니얼 골먼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사이버 횡포를 막지 못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익명이 계속될 때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지겠지. ‘익명은 가능한 한 계속 제로에 가까워야 한다”는 케빈 켈리의 주장에 절대 찬성이다. 외국은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체면 중시의 한국사회에서는 실명제가 많은 통제력을 발휘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참으로 비겁한 행위다. ‘나’가 나타나는 상황에서는 감히 말 못 하고 우아한 척 온갖 고상 다 떨면서, 인터넷에서는 온갖 욕설과 도저히 인간의 소리라고는 말할 수 없는 황당한 글을 올리는 무리들. 온 세계의 중심이 ‘나’인 이기와 아집으로 찌든 무리들. 치졸한 비겁함과 극도의 이기심이 이런 행위를 불러오는 것인 게다.
의학 황금시대가 건강을 위협할 것이다. (폴 이왈드)
폴 이왈드의 의학에 관한 글을 읽는 내내, 브라질의 보건부 장관을 지낸 조세 세하가 떠올랐다. 쌍파 울 시장을 역임하였고 대통령에도 출마했지만 룰라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던 조세 쎄하. 누구나가 그렇듯이 그 역시 정치를 잘한 적도 있었고 약점을 드러낼 때도 있었지만, 아마도 세계 의학 역사상 (브라질이 아닌 ‘세계’) 그처럼 훌륭한 ‘보건부 장관’을 뽑아보라고 하면 모래알에서 다이아몬드를 찾는 것만큼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그가 보건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그 당시 에이즈 환자 보유국 1,2위를 다투고 있던 브라질 국민들을 위해 ‘무상'으로 에이즈 약을 배포한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결론만 보면 ‘뭘 그 정도를 가지고.. ’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을 방해하려는 세계적인 제약회사와 그 뒤의 보이지 않는 큰 힘들을 상대로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정면 돌격하며 싸웠다. 그리고 비밀리에 부쳐진 에이즈약을 브라질 자체 내에서 생산하는 데 성공시켜 자국민들을 보호하고 치료하기 위해 몇 년이란 세월을 끝까지 싸워 이겼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브라질 인들이 치유되었고 제 삶을 되찾았는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참 멋진 나라에 살고 있구나 하는 감사함에 뜨거움이 올라왔다. 그래서 그가 대통령 출마했을 때 내게 투표권이 없는 게 너무 속상했었다. 분명히 그를 찍었을 건데.
그때 알았다. 제약회사의 횡포가 얼마나 크고, 또한 그들을 움직이는 그 뒤의 그림자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우리가 쉽게 구할 수 있는 약들도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브라질에서는 그런 약들의 성분과 같은 제네릭 약을 판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다.
뻑하면 파업에 들어가는 한국의 의사와 약사들과는 참으로 다른 면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노동자들이라면 또 몰라도. 바로 그들의 손에 한 인간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데,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던 그들이 어떻게 파업에 들어갈 수 있는 건지. 이미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린 행동이다. 브라질은 비록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 사는 나라고 치안마저 불안해 우리 모두 불안 속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의사가 모자라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적어도 ‘의사나 약사들의 파업’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료받기를 기다리다가 우리 눈앞에서 죽어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태아 성별검사를 합법화하라 (다이앤 헬펀)
다이앤 헬퍼의 글은 찬성 반대를 떠나 참 많은 복합적인 문제를 동시에 짚어보게 했다. 그가 짚은 장단점은 현실적인 면에서 상당히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태어나고 난 다음에 아기를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전에 미리 구별을 하여 갖는 것. 또한 딸만 가득하고 아들이 없어 슬픔 가득한 집안에 또 딸을 안겨주어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낼 딸아이에게나, 아들을 기다렸다 딸을 또 갖게 됨에서 오는 고통들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딸만 둘 가진 나지만 의아스러울 정도로 한 번도 아들을 갖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토록 아들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내게는 조금 의아스럽다. 이조시대도 아닌 현대에 사는 우리임을 볼 때..)
이 글에서 너무나도 흥미로왔던 것은, 남아선호 사상이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녔다는 것이었다. 놀라웠다. 하지만, 그렇게 대체적으로 남아를 선호하는 세상에서 구별하여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성의 불균형 속에 사회구조가 바뀌게 될 것임에 역시 위험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생각이다. 정말 이 위험한 생각들은 뭐가 이 리 두 복잡한지. 이런 위험한 생각을 알기 전에는 난 참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위험한 생각들을 접하면서 삶이 무지 복잡해지는 분위기다. -_-;;
우주 너머에 여러 우주가 있다. (브라이언 그린)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너머에 또 다른 많은 우주가 있다는 생각, 즉 우리 우주는 다중 우주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실험이나 관찰이 뒷받침되지 않은 사변적인 생각이지만, 지적으로 자극적이고, 우리 우주만이 유일하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겸손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다중 우주론은 현재의 과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새로우면서도 모험적인 접근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P243)
나는 이런 가설을 참 좋아한다. ‘인간에게 영혼은 없다’ 같은 황당무계 하다 못해 ‘무식이면 용감하다’라는 표현을 절로 떠올리게 되는 그런 무모한 가설 말고, 브라이언 그린이 말했듯이 지적으로 자극적이고, 우리 우주만이 유일하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겸손하기까지 한 가설. 맞고 그르다의 승패 관계를 떠나서 마음껏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며 나름의 이론을 펼쳐볼 수 있는 가설들이 참 좋다. 너무 재밌지 않은가..
다른 별에 지적 생물이 있다는 것에는 많은 생각도 해보고 한때 관심도 많아서 그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보기도 했지만, 우리가 속한 우주 외에 다른 우주의 존재에 대한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의 첫 구절을 읽으면서 “와우~”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읽으면서 ‘Lost’가 생각났다. 우리 한국 배우 김윤진이 출연해서 우리에게 더욱 친근한 시리즈. 그들이 속해있는 세계와 또 그들을 보고 있는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 구성은 마치 우리가 속한 유니버스와 또 그 유니버스가 한 부분으로 속해져 있는 또 다른 슈퍼 유니버스.. 정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여러 개의 거울 속에 무한대로 반사되어 비치는 사물처럼 유니버스란 무한의 무한을 거듭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차고 두근거리는 일이다.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해도 괜찮다. (마르첼로 글라이거)
그의 글의 첫 시작과 마지막 끝은 마치 성서의 창세기의 첫 시작과 끝을 읽은듯한 느낌이었다. 인간들이 그렇게 모든 의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교만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 많이 닮았다. 만약에 ‘그들이 그렇게 증명하여 보여주려고 애쓰는 그 모든 것이 허위라면..’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맥 빠지게 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면 어떤가, 그것 때문에 과학이 더 약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더 인간적이 될 뿐이다.’라고 도닥거린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언젠가 보았던 ‘관객모독’이란 연극이 떠올랐다. 정말 ‘관객모독’이라는 타이틀대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관객들에게 온갖 모욕을 다하고 열 받게 해 놓고는 정작 자신은 매력적인 음유시인이 사랑을 남겨놓고 떠나듯 유유히 휘파람 불며 사라졌던 그 연극배우가 떠올랐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 연극이 떠올랐던 것은 분위기가 닮았던 때문이었다.
암튼, 마르첼로 그 라이저의 결론은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통쾌했다. 그래.. 모든 걸 다 알지 못하면 어떤가, 그것 때문에 과학이 더 약해지지도 않으며, 단지 더 인간적이 될 뿐일 뿐…
모든 물체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루디 루커)
루디 루커의 ‘모든 물체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찬반을 떠나 내가 듣고 읽고 배운 것들과 접합시켜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식물에도 사물에도 생명이 있다, 아프게 하지 마라고 들어왔다. 그러니 책상을 칼로 상처 내거나 하지 말고, 바위나 나무에 이름 같은 것 새기지 말라고. 읽으면서 생각했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루디 루커는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일까. 또는.. 그들에게 작용되는 에너지를 그는 ‘마음’이라고 표현한 걸까..?? 우리는 여러 실험을 통해 알고 있다. 심지어 밥을 두 개의 병에 넣어놓고 한쪽엔 예쁜 말을, 다른 쪽에겐 나쁜 말(욕)을.. 하며 일주일을 보냈을 때 그 밥이 어떻게 변했는지.. 하나는 노란 예쁜 곰팡이가, 욕을 들은 병의 밥은 시커먼 더러워 보이는 곰팡이가 생겨있었음을.. 뭐.. 꼭 이 실험 말고도 그런 유사한 실험은 무지 많다. 화분이나 꽃 이야기들도 그들에 속할 것이다. 그런 사물에도 우리가 발하는 에너지는 우주의 에너지를 불러 모아 그것들에 영향을 끼친다니. 말로 표현되는 에너지가 얼마나 강렬한 생명력을 갖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그것을 ‘에너지’라고 생각했다면, 혹시 루디 루커는 그것을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과 ‘에너지’는 차이가 있지 않나. 마음은 자율적이고 주도적이라면, 에너지는 반응적이고 반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모든 물체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라는 그의 생각은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자극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특정 신이 존재할 확률은 상당히 낮다. (필립 앤더슨)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내가 아는 모든 논리 체계를 동원해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의 확률 계산법으로 볼 때 신은 존재할 가능성이 극히 적다. (P275)
미처 느끼기도 전에 “FxxK~!!” 욕이 먼저 튀어나왔다. 글 첫 시작 부분을 읽으면서 그의 무모할 정도로 당당한 확신에 혀가 내둘러졌다. 계산법.. 과연 그는 마음의 느낌 정도를 계산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영혼의 세계의 무한함을 계산할 수 있으며, 우리의 정신세계를 그의 계산법으로 측정할 수 있는지..
그가 설명한 피라미드 공식을 사용한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의 주장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노벨 물리학상까지 수상한 사람의 지적 능력과 영적 능력의 언발란스에서 오는 이런 이론은 참 많이 안타깝다. 많은 과학자들은 연구 중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그 뒤에 존재하는 초자연의 힘을 보게 됨으로 인해 무신 교자도 신을 의식하게 된다는데.
그의 ‘위험한 생각'에 대한 견해를 읽으며 내게는 그의 생각이 더 위험스럽게 느껴졌다.
과학은 종교를 파괴해야 한다. (샘 해리스)
‘과학은 종교를 파괴해야 한다’ 샘 해리스의 글 제목은 놀라우리만큼 과격하고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그는 어떤 주장을 펴려고 이런 제목을 달아놓았는지. 그가 보는 ‘종교와 과학의 불일치’ 마치,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전처와 후처 사이의 갈등처럼 영원히 화합이 보이지 않는 관계. 마지막 장까지 읽고 보니, 왜 그가 그런 이론을 펼치는지 그 깊은 뜻을 알 것 같았다. ‘과학은 종교를 파괴해야 한다’보다는 차라리 ‘종교를 초월한 인류애’가 그 밑에 깔려있음이 느껴졌다. 굳이 종교에 의지하지 않아도 우리는 나약하지 않고 강해지고, 종교적인 불화에서 벗어난다는 것.
그가 그렇게 과격한 제목을 선정한 것은 종교를 초월한 사랑과 평화를 원하는 그의 간절한 바람에서 온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글엔 간절함이 묻어있었다.
과학은 신을 침묵시키지 못할 것이다. (제시 버링)
‘지금 여기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의 로버트 프로빈, ‘과학과 종교의 통합-신의 과학’의 스트빈 코슬린에 이어 ‘과학은 신을 침묵시키지 못할 것이다’의 제시 버링의 글을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왜 과학자들은 그토록 신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
‘ 그들은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
그들이 갖다 대는 온갖 이유들과 온갖 모함과 온갖 증거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 그들이 느끼는 ‘신에 대한 두려움’이 보인다. 뭐가 그토록 두려운 걸까. 어쩌면 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느끼는 ‘인간의 한계’때문이 아닐까. 증명할 수 없기에 인정을 하게 되는 신의 존재.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이유도 답을 줘야 하는 이유도 없고 그 누구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벨탑을 쌓던 인간들처럼 자신의 고도의 지적 수준을 나타내고 인정받기 위해서 스스로 찾아 나선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들, 우주의 신비, 자연의 비밀들. 그들은 안다. 자신들이 이 모든 것에 확연한 답을 줄 수 없음을. 그때 느끼게 되는 절망감, 막막함. 왜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신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오만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너무 어린애 같은 고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다 하다 안될 때 울며불며 떼를 쓰는 어린아이들 같은. 그러고는 결국엔 게임이 안 되는 상대에 대한 반박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겸손치 못한 오만함에 안타까움을 넘어 안쓰러움마저 느껴진다.
부모 면허 시대 (데이비드 리켄)
데이비드 리켄의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그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 깊은 우려에 내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그가 내세운 의견에 뭐라 딱히 동조한다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방법이 너무 의외여서.)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기회를 마련해주고 싶은 그의 의지와 염려는 우리 주위에 그야말로 ‘널려있는’ 집 없는 아이들. 학대받는 아이들, 노동착취를 당하는 아이들.. 또는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은 수많은 다른 학대를 받는 아이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자극하는 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특히, 이곳 브라질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거리의 아이들’이다. 아직 엄마품에서 젖 만지고 놀아야 하는 아이들이 거리에 버림을 당하고, 스스로 생존하며 마약과 온갖 범죄에 노출되어있는 것을 떠올리면 ‘부모 면허’는 바로 이 브라질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우리 모두 좀 더 깊은 관심과 사랑과 경각심을 가지고 ‘생각’만이 아닌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현실참여 - 응용 역사 (스튜어트 브랜드)
역사 가사이에선 미래에 관해서 결코 언급해서는 안되는다는 것이 불문율이라는 사실은 정말 놀라웠다. 스튜어트 브랜드가 이어 설명을 해주었듯이 역사란 지나간 것을 다룬 학문인데 거기에 미래를 논한다는 것이 역사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새로운 사실였다. 하지만 살짝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역사는 물론 과거를 되돌아보며 과거의 시간 속에 벌어진 사건들을 공부하는 학문이지만, 과거의 역사를 알아야 오늘을 이해할 수 있고, ‘오늘’로 이어지는 역사들이 바로 내일로 향해지는 사건이라면, 엄밀한 면에서 옳은 자세는 아닌 것 같다.
분명 ‘과거만’의 역사도 ‘오늘만’의 역사도, 또한 ‘내일만’의 사건도 없다. 모두가 진행 선사에 벌어지는 사건들의 연속임으로 분명 역사가가 미래에 대해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불문율인 것 같다. 스튜어트 브랜드의 의견에 나는 찬성표를 던진다..
어떤 것도 무보다 더 위험할 수 없다.
찰스 자이페의 ‘어떤 것도 무보다 더 위험할 수 없다’는 짧은 글이었지만 그 함축된 내용이 너무나도 시적이고, 철학적이라 그냥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거라도 ‘끄적거려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한 번도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뭐..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그렇듯이..^^;;) 그 지적은 참 흥미로왔다. 우리는 ‘무’를 두려워하여 공허를 싫어하는가..??
신학자들의 주장도 참 재밌다. 신이 최초로 한 행위가 무에서 우주를 창조한 것으로, 공허를 몰아내는 것이었다고 주장한 것 또한 재밌다. 신이 뭐가 아쉬워서 공허를 몰아내려고 무에서 우주를 창조했을까..?? 이 ‘우주’라는 개념을 어떠한 특정한 크기로 한정시켜놓은 부분도 재밌었고 (답답하긴 하지만) 신이 마치 심심해서 적선하듯 우주와 생물을 창조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겨 그것 또한 재밌었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은 이 현대의 내놓으라는 학자 들으리 모습을 보며 이조시대 유교학자들의 공리공담으로 죽으라고 싸워대던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결국엔 이조를 망하게 했던 장본인들.. 난.. 우리는.. 지구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는 학자들을 높이 올려놓고 마치 우리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선정해놓고 그들의 사상이 우리를 물들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의 이런 생각들이 정말로 ‘위험한 생각들’이 아닌가 싶다.
위험한 생각들을 조장하려는 생각이 위험하다. (랜돌프 네시)
랜돌프 네시의 생각은 옳다고 본다. 긴가민가하는 확실치도 않은 상태에서 ‘조장’을 하는 것은 때때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파장이 큰 위험한 결과를 불러온다. 그리고 말은 밖으로 내뱉어지는 그 순간에 생명력을 발휘하게 됨을 믿는 나로서는 생각이나 말이나 똑같이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 글에서 재밌었던 부분은 바로 랜돌프의 말 게임 같은 표현들이었다. 문장을 여러 번 읽게 했다. 마치 ‘간장공장 공장장은 장공 자장이고~’ 같은 그런 류의 게임. 무척 멋있게 그럴듯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읽는 동안 헷갈리게 쓴 글로 여러 번 다시 읽어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긴 했지만, 위험한 생각들을 조장하려는 생각이 위험하다.라는 그의 주장엔 동의한다.
반중력 – 너무나 실용적인 의미에서의 카오스 이론 (카이 크라우제)
카이 크라우제의 ‘반중력’에 대해 쓴 글을 읽으며 ‘위험한 생각’에 대해 묻는 그들을 향한 따끔한 일침이 일단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글을 읽어가는 동안, 글보다 그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와 결론은 바로 ‘개미탑은 각각의 개미가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할 때 설 수 있다. 각각의 개미는 사회적 행동이나 역할, 정해진 일을 완수한다.’ 즉, 다른 환경, 다른 나라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있는 곳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낼 때 (이것은 꿈을 가지지 말란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사회는 바로 사회가 가야 할 바로 그곳으로 굴러갈 것이라는 것. 옳고 옳은 이야기다.
인도의 아이들에게 미국의 소비주의 사회를 동경하게 하고, 남미의 빈민촌 아이들이 ‘킬빌’을 열광하게 하고, 보루네오 아이들이 미국에서 야구를 하기를 원한다면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다양성은 각자의 다양성을 충실히 살리며 제자리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때 다양성의 Union이 이뤄지고 하모니를 이루게 되는 것. 카이 크라우제가 차근차근 신중하게 펼쳐나간 논리는 우리가 깊이 되새겨보며 우리의 현주소를 다시 짚어보게 하는 일깨움을 주는 글이었다.
사회 상대성 이론 - 평등한 사회는 불가능하다 (토르 노레 트렌더스)
토르 노레 트렌더스가 말한 사회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그가 표현한 ‘평등과 불평등’의 의미는 내가 느끼는 ‘평등과 불평등’의 의미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평등’과 ‘불평등’이 함께 섞여 살아지고 있다
그럼 어떤 게 평등하고, 어떤 게 불평등한 걸까.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과 빈둥빈둥 게으름을 피운 사람들 중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면 이것은 평등한 걸까. 불평등한 걸까. 물론 평등한 거다. 그러면 우리는 사회 속에 잘살고 못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불평등이라고 받아들인다. (물론 여기서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게을러서라는 말은 절대 아님을 알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정작 심각한 문제는 평등과 불평등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상대적 빈곤’이라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아무리 내가 여유로운 안정적 위치에 있어도 상대적 빈곤을 느끼면 우리는 늘 뭔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에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충만감을 느끼기는커녕 벌어도 벌어도 또 벌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과 늘 뒤처지는 느낌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행복을 느끼지 못하며 불만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되는 것.
‘상대적 빈곤’은 우리 현대인이 앓고 있는 정신적인 Epidemic인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로저 생크)
학교를 폐쇄하라는 강력한 구호를 외치며 펴 나간 그의 주장은 참 일리가 있었다. 그가 조목조목 따져간 학교의 비판적인 부분은 마땅히 짚어보아야 할 사안 들였고, 그가 그리도 분개해하는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어쩌면 그래서 요즘 홈 스쿨링을 하는 부모들이 점점 늘어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장단점은 다 있는 것. 우리 아빠도 늘 말씀하셨다. 학교에서는 사회에 나와서 전혀 소용없는 것들만 가르친다고.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신 아빠가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 나로선 이해가 가질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아빠는 우리에게 한 번도 공부에 대해서 닦달하시지도 추궁하시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공부를 놀이처럼 즐겁게 하며 정작 사회에 나와 사용할 수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을 배우는 마음은 모든 부모가 갖는 바람일 것이다. 만약 그런 좋은 프로그램이 생긴다면 우리 애리와 리예가 아직 학생일 때 그런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길 바라본다.
맺으며...
읽으면서 정말 이 책에 들어있는 ‘위험한 생각들’로 많이 황당하고 많이 답답해하기도 하고 경악해하면서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견에 대한 토론을 하는 분위기가 되어 아주 흥미롭고 재밌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에 대해 또 하나 알았다. ‘어떤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것을 재밌어하는구나.. ’ 하지만, 좀 더 젊었을 때 내가 가졌던 객관적인 시선이나 자세는 퇴색되었음을 느꼈다. 그때는 내 주장과 틀린다 하여도 ‘화가 나거나, 열 받거나’하는 일 없이 순수하게 내 의견을 말하며 상대방의 반대의견도 열린 마음으로 들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어떤 부분에선 울화통이 치밀고 화가 나는 걸 느끼며, 못 말리는 아줌마의 무댓보 혈기가 느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가진 ‘위험한 생각’ 외로 또한 가지 놀란 것은. 그 유명한 학자들이 가진 분야별 타이틀이다. 심리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과학자, 철학자, 또한 과학 져널리스트 등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을 불러 모은 이 책에 듣도 보도 못한 분야를 보고 그것 또한 놀라웠다. 그런 새로운 분야를 살짝 맛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전체적으로 묶어서 리뷰를 쓰기엔 너무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역시 숲을 보기보다는 나무에 더 익숙한 나의 성향 때문일 거다. 숲을 보고 싶다고 외치면서도 실은 나무가 더 친근하고 익숙한.. 그래서 나는 내게 익숙하고 편한 방법을 취했다. 느낌이 컸다거나, 그냥 한소리 안 하고는 못 넘어가겠는 챱터는 따로 리뷰를 하는 방식.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험한 생각들>은 좋고 안 좋고를 떠나 지금껏 어떤 책보다도 참으로 진지하게 읽으며 (맨 끝 몇 부분만 빼고) 성실하게 실시간으로 초서를 해나간 책이었다.
덧붙이는 말씀
오래 전, 인터넷에 올린 이 글에 '둘기'라는 닉을 가진 분이 느낌을 올려주셨다. 이 리뷰는 2008년도에 읽고 올렸던 글로, <위험한 생각들>을 읽으면서 각 주제에 대해 느꼈던 나의 생각을 올렸던 글이다. 주관적인 생각들이니 당연히 여러 부분 편협적인 주장이 언급되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이 댓글을 읽으며 놀랐던 것은 과제를 하시던 중에 내 글을 발견하셨다는 걸로 보아 학생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는데, 상대방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느껴졌고, 하나하나 조목조목 풀어가는 그의 깊은 이해와 사고, 그리고 신과 과학에 대한 시각이 읽는 내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느 한 '부분'이 아닌, '전체'를 포용하는 모습이랄까.
이 돌기님의 글을 읽으면서 글을 읽으면서 <태양을 멈춘 사람들>을 쓰신 남영 교수님이 떠올랐다. 교양 과목으로 남영 교수님의 ‘혁신의 과학사’를 들었을 때 그때 교수님께서 돌기님과 같은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이 편협적이었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시간이었다.
이번 리뷰를 올리며 돌기님의 댓글을 같이 올린다. 미리 허락을 받아야 했을 것이나 연락 경로가 없어, 좋은 말씀이라 함께 나누고 싶어 올린다.
돌기님과 같은 과학도가 있으니, 우리 나라의 미래가 조금 더 밝겠구나, 흐뭇한 미소를 지어졌던 멋진 경험이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ㅎㅎ 학교 과제를 하던 중 이 책에 대해 찾아보다가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쓰신 글 내용 중 의문이 드는 점이 있어 댓글 남깁니다.그런데 쓰신 글 내용 중 의문이 드는 점이 있어 댓글 남깁니다.
(매우 오래전 글이라 생각이 바뀌셨을수도 있겠지만..ㅎㅎ) 글쓴이님 생각대로 과학자들이 '신'과 종교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종교에 무작정 반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종교를 적대시하는 것은, 종교계에서 과학적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전적(예를 들어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 종교가 과학적 사실을 왜곡시켜 악용한 사례들, 그리고 종교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잔혹하고 비이성적인 악행들에 대한 반발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과학자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것들에 대한 것일테지요.
그리고 사실, 오히려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두려운 것입니다. 신의 존재는 삶에 의미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걸로 여겨질 수도 있죠. 철학은 신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매혹되는 이유가 자신을 더욱 거대한 존재와 합치시키며 안정을 얻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신이 있다고 밝혀졌을 때 가장 흥분할 사람들은 과학자들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저도 기독교적 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떤 형태로든 신이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며 신이 있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인간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므로, 신을 믿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누가 종교를 가진다 해서 그 사람한테 뭐라 하는 사람은 좀 이상한 분이죠. 오히려 종교의 긍정적인 효과가 많습니다. 다만 마찬가지로 신이 있다는 증거도 없으므로 종교적 교리를 바탕으로 남을 해치거나 기분 나쁘게 하거나 영적으로 무식한 불쌍한 사람 취급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글이 좀 길어졌네요 아무튼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과제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ㅎㅎ
*돌기님, 혹시라도 나중에 이 글을 읽으시고 내리시길 원하시면 알려주세요.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 2008.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