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몰입’은 요즘 들어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애정을 갖고 사용하는 단어이다. ‘몰입의 즐거움’. 내 책들 틈에 껴서 내게 읽히기를 기다리며 예쁘게 앉아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얼마나 두근대며 행복했는지...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내가 갖고 있는 책부터 책 순서를 바꿔서 과제를 제출하면서까지 이’ 몰입의 즐거움’을 마지막으로 남겨둔 것은, 가장 좋아하는 것을 가장 늦게까지 두고두고 아껴두고 싶은 마음과 함께 읽는 동안의 황홀함과 즐거움을 마지막 순간까지 남겨두며 '기다리는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황홀함과 행복감을 어디서 찾아 느껴야 하는지 읽는 동안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막연하게 기대했던 내용과는 조금 달랐던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책을 읽기도 전에 글 쓴 분의 의도를 느끼기도 전에 내가 먼저 울타리를 쳐놓는 순수하지 못한 나의 이기심이 문제였음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럴 때 글을 쓰는 분들은 가장 속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작가의 의도를 읽기도 전에 제멋대로 저울질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독자의 자세. -_-;;
아마도 그것은 내가 막연하게 기대했던 내용과는 조금 달랐던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책을 읽기도 전에 글 쓴 분의 의도를 느끼기도 전에 내가 먼저 울타리를 쳐놓는 순수하지 못한 나의 이기심이 문제였음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럴 때 글을 쓰는 분들은 가장 속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작가의 의도를 읽기도 전에 제멋대로 저울질하는 독자의 자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이분 책은 처음 접하는 거지만 이 분이 ‘몰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분의 내놓으시는 주장과 이론에 대한 분석과 또 그 주제들의 예를 사회 각계층에서의 반응과 느낌을 ‘여러' 각도가 아닌 ‘모든' 각도에서 바라보면서 편협적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모든 걸 포괄적으로 감싸 안으며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분석들과 설명들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같은 상황이어도 보는 사람의 시각과 관점과 환경에 따라 다르게 비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었고, 그에 대해 아주 성실하고 충실하게 당신의 주장을 펼쳐나간 것이 마치 따뜻하고 자상한 선생님 같은 그런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주장을 펼 때 쉽게 편협적인 되는 것이 일반적인 성향인데, 미하일은 모든 상황을 숲 속의 일정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한 숲을 이뤄짐을 보여주어 그가 펴는 주장은 넉넉한 포용성이 느껴져 포근함마저 들었다.
심리학자답게 예로 들은 일반적인 사례 안에서도 예리한 심리분석으로 우리가 ‘자아’에 대한 인식을 좀 더 깊이 알고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 한 것이 참 재밌었는데,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과 내가 남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설명한 부분(P 30)은 명쾌했다.
‘몰입’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내부에서 오는 자발적인 것이던 외부에서 오는 것이던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그 목표를 추구하게 하기 위한 원동력 즉, 선명한 ‘동기 부여’가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 얼마 전 이곳 브라질에서 강연을 하신 ‘강영구’ 박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 축구공에 맞아 시력을 잃게 된 당신이 어떻게 지금의 그 자리까지 올라왔는지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며 강연 내내 강조하신 말씀은 바로 ‘꿈과 선명한 비전’이었다.
그렇게 확실한 목표가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하는지. 바로 그것이 우리를 ‘몰입’의 상태로 들어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과 에너지와 영혼을 쏟아부어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 바로 차동엽 신부님의 ‘무지개 원리’에서 말씀하시는 ‘쉐마 이스라엘’의 정신과 일치된다.
내가 몰입을 하며 그렇게 매 순간을 온 정성과 온 정신을 다 쏟아부었던 때가 언제였나 가만 생각에 잠겼다. 역시 유학시절이 아녔나 싶었다. 지금 죽어도 후회 없다고 생각했던 그때. 그때의 열정이 사무치게 그리워 순간 코가 찡하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온전히 공감했다. 결국은 바로 그 ‘몰입’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게 됨을 나 역시 지난 경험 속에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내가 모든 것을 풍요롭게 갖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난’이란 환경 속에 친구들은 당연하게 밟고 올라가는 계단들 조차 내게는 삶과 투쟁을 해야만 그 기회가 얻어졌던 시절, 그때의 매 순간은 내게 있어 투쟁이고 도전이었기에 숨을 쉬고 있는 모든 순간이 ‘몰입’의 상황에 잠겨있었던 것 같다.
그랬기에 몰입의 일상을 살았던 그때의 그 시간이 내겐 그렇게 잊을 수 없고 그리운 시간이고, 그때의 열정을 다시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지만, 이 책을 통해 확실하게 알았다. 그리운 것은 '단순한 열정'이 아닌 내 온 에너지와 영혼을 쏟아부었던 '몰입의 순간'이었음을. 뚜렷한 목표 아래 내 개성을 지키며 열심히 달렸던 그때의 나를 나는 사랑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나이가 들고 성숙해져야 하는 나이에 외려 더 미숙하게 행동하는 나 자신를 보았다. 남의 눈을 의식하며 미처 느끼지 못했던 내 안에 깊이 숨어있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를 엉뚱한 경쟁 속으로 던져버렸다. 한창 민감한 나이에도 그러지 않았던 내자신 였기에 그런 스스로도 용납되지 않는 생소한 내 모습이 나를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는지. 참으로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런 나를 되돌아보니 쓴웃음만 나왔다. 내 삶의 나침판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지내온 지난 몇 년, 나의 모든 집중이 쏟아져야 할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니 나의 집중력은 내 주위 산만한 곳으로 분산되어 쓸데없는 안테나만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수면 위의 신선한 공기와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쩌면 긴 광야의 시간이 내게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바오로 사도처럼, ‘뒤는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을 향해 달립니다.’는 못되어도, 내게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길 잃음에서 오는 깊은 성찰과 고뇌의 시간이 필요했음을 이제야 알겠다.
여기서 칙센미하이가 덧붙여 말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온전한 ‘몰입’의 상태에 빠져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사심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정말 순수하게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순수한 몰입의 즐거움을 맛보기 힘들다는 설명은 참으로 공감 가는 부분이었다. 칙센미하이가 인용한 리처드 스턴의 말처럼 ‘가장 큰 장애물은 나 자신이다’. 백번 공감 가는 말.
미하이가 마지막으로 맺는 부분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전체 현실을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의 일부분으로서 영원히 남으리란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미래에 더 많은 정력을 투자할수록 우리는 그 생명의 일부분으로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육체가 죽고 썩어 없어져 그냥 먼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우주를 구성하는 생명의 일부분으로 남는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열심히 사랑하고 몰입을 하며 내 안에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 사회의 인정과는 관계없이 내가 숨 쉬는 순간의 삶이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임을. 그것이 내게 주어진 내 삶에 대한 나의 임무이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것은 나의 지혜이며 그것이 바로 내가 눈을 감는 그 순간 ‘나는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는 것 아닐까. 행복한 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