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가 비난한 유일한 것, 그것은 독선이요 자만이다.
내가 사랑한 공부의 마지막 학기를 격동 속에 보내고 가장 먼저 집어 든 책은 ‘몽테뉴와 함께하는 마흔 번의 산책’이라는 매력적인 소제목이 붙어있는 앙투안 콩파뇽의 ‘인생의 맛’이었다. 앙투안 콩파뇽이라는 이름은 내게 생소한 이름이지만, 책날개에 소개되어 있는 글을 보니 몽테뉴만큼이나 매력적인 인간이다. 1950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불리는 그는 프루스트 전문가이자 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이 따라붙는데, 재밌는 것은 그가 공학을 전공한 공학도라는 사실이다.
인문학적인 소양을 겸비한 공학도. 앙투안 콩파뇽. ‘공학도’라는 부분에서 ‘혁신의 과학사’ 강의를 주셨던 남영 교수님이 떠올랐다. 인류 역사상 큰 획을 그은 과학자들의 이론과 삶을 풀어내시면서 나를 열광케 했던 수업. 그저 스쳐 지나가며 들었던 이론들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들의 삶을 엿보게 됨으로써 어떻게 과학의 역사가 지금까지 흘러왔는지를 공학도 답게 깔끔하고 논리 정연하면서도 그분의 인문학적 소양이 깊이 느껴지는 매력적인 수업을 주셨던 교수님. 한 학기 동안 얼마나 행복했는지, 앙투안 콩파뇽의 소개를 읽으면서 남영 교수님이 떠올랐음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이다.
프롤로그에 올려져 있는 글이 재밌다.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몽테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변에 누워서, 혹은 점심식사 전에 아페리티프를 홀짝거리며 들었으리라. 당시 프랑스 앵테르 라디오 사장이었던 필리프 발이 여름 동안 주중에 매일 몇 분씩 프랑스 앵테르에서 몽테뉴의 <수상록>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제안을 해왔을 때, 나는 엉뚱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위험 부담이 큰 도전이었기에 차마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변에 누워서 아페리티프를 홀짝 거리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몽테뉴의 <수상록>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들. 재밌지 않은가? 정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림인데, 그 어울리지 않음이 왜려 포인트가 되어 색다른 터치의 멋을 안겨주는 것. 그런 엉뚱함이 콩파뇽의 입맛을 자극시켰을 것이다.
“감히 몽테뉴의 글을 들어내어 부분 부분 인용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그 즉시 조롱을 면치 못했’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 도발적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리고 결론적으로 청취자들은 열광했고,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책으로까지 나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인들 다웠다. 헤밍웨이를 비롯한 많은 미국 작가들이 프랑스를 사랑한 것은 어쩌면 청교도의 보수적인 정신세계를 가진 미국과는 다른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이는 곳이 프랑스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의견으로 볼 때, 몽테뉴가 살아있었다면 아마도 필리프 발 사장과 앙투안 콩파뉴가 작당(?)하고 도발한 이 엉뚱한 아이디어를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동조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수상록을 쓸 때 결코 라틴어로 쓰지 않았다. 여성들도 읽을 수 있는, 어쩌면 몇십 년 후에 없어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는 언어인 프랑스어로 썼다. 그 당시 많은 엘리트들이 지식인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책을 쓰던 시대였다.틀에 박히고 배운자, 있는 자들만이 누리는 특혜를 깨부수며 비웃기라도 하듯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묵묵하게 해 나가는 몽테뉴. 내가 몽테뉴를 사랑하는 이유다.
몽테뉴를 처음 만난 것은 수잔 블레이크웰을 통해서다. 수잔이 몽테뉴의 삶을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풀어낸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으면서 몽테뉴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렇게 학창 시절 권장도서 리스트에 빠짐없이 올려지던 수상록을 만나게 된 것이다.
몽테뉴에게 푹 빠졌던 이유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보여주는 글들 가운데 느껴졌던 그의 순수한 인간성 때문이었다. 투명성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중 가장 열광했던 부분은 ‘기억’ 부분이었을 것이다. 나더러 그를 색깔로 표현해보라고 하면 강렬한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이 아닌, 아이보리 같은 무채색이라 표현할 것 같다. 자신을 격하게 드러내지 않지만, 자신의 색을 지니고 있고, 어디에나 어울리지만, 자신의 색을 잃지 않는… 그의 삶을 보면 그렇다.
가톨릭과 개신교들의 전쟁 속에 몇 번의 정권이 바뀌는 동안에도 그 어느 쪽에서도 미움을 받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그가 아부하며 요리조리 붙는 위인도 못 되었다. 자신의 주장을 꿋꿋하게 올리면서도 그는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냈다. 멋지지 않은가
기억력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은 없지만,
내게는 기억력을 찾아 볼 수 있는 흔적이 거의 없다. 나만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기억력이 부족한 사람은 이 세상에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바로 나 자신의 기억력에 대해 느끼고 있는 바로 그 느낌.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마치 나 자신이 몽테뉴라도 된 듯 깊은 공감대가 형성이 됐고, 또한 위로가 되었다. “거봐~ 몽테뉴도 그렇다잖아~” 뭐 이런 억지스러운 합리화랄까.
나는 힘든 일도 잘 견뎌낸다.
그러나 나 스스로 그 일에 관여할 때만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열망을 느끼는 만큼만 견뎌낸다.
뭔가 하겠다는 충동이 일어나면, 그는 정력을 쏟을 수 있었다.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성격적인 부분을 몽테뉴의 입을 통해서 듣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희열을 안겨준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많은 열정을 가졌다고 말을 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든, 어려운 일도 잘 참아내지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열망을 느끼는 만큼’이다. 이러한 나의 정체성에 혼란을 갖고 있었는데,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나는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고 ‘수용’하면 되는 것임을 몽테뉴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이 ‘인생의 맛’에서 가장 내 가슴을 치고 들어왔던 부분은 단연코 ‘대화’ 부분이었다. 내 가슴에 깊이 담고 좀 더 성숙하고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꼭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가르침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늘 깨어있어야 하고, 대화 속에 마음으로 경청하며, 내게 다가오는 비판이나 지적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인격적 수양이 필요할 것이다. 호된 훈련이 되겠지만, 공감적 경청을 하며 듣는 내가 되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잘 들어주는 것인 강점이었던 내가 언제부터 듣기를 놓아버리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하나의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즈음에 이 책을 읽은 것은, 관계 속에 나를 좀 더 성숙게 하고 성장케 하고자 하는 삶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삶의 가르침을 나는 겸손되이 받아들이며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P15 그는 자신을 타인의 생각에 우호적이고 열려 있고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 자기 의견 속에 갇히지 않고 고집스럽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는 누구의 손에서 발견되었건 진리라면 무조건 환영하고 보듬으며, 멀리 서라도 진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면 즐거이 항복하고 무기를 내려놓는다. 또한 지나치게 위압적으로 가르치려는 태도가 아니라면 비판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대개의 경우 수정해야 한다는 필요성보다는 예의상의 이유에서 비판자들의 지적을 수용하는 것이다. 쉽게 양보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나를 마음껏 지적할 자유를 베풀고 보장해주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제2권 8장)
P16 몽테뉴는 진리라면 비록 꺼려지는 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존중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교만하지 않고, 반박당하는 것을 모욕으로 여기지 않고, 틀렸을 시 교정되는 것을 기뻐한다. 그가 마뜩잖아하는 대화 상대는 거만하고 자기 확신에 차 있고 편협한 자들이다. 그러니 몽테뉴는 완벽하게 정직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자유롭고,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걸 주장하는 데 자존심을 걸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 그는 대화를 이겨야 할 전투로 인식하지 않는다.
>> 몽테뉴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몽테뉴에게 빠지 들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P16 그럼에도 몽테뉴는 곧이어 단서를 덧붙인다. 그가 상대의 지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교정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이고, 특히 지적하는 상대가 교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라고. 몽테뉴는 일단 고개를 숙이기는 하지만 신념마저 꺾는 것은 아니다.
P17 그는 뻔뻔한 적수나 타인을 상대할 때 맞서지 말고 예의상으로라도 수긍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상대가 계속해서 몽테뉴 자신을 바로잡고 지적해줄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다. 상대 앞에 무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런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나중에라도 상대가 자기 의견을 주저 없이 피력할 수 있도록.
P17 그럼에도 우리 시대 사람들을 그렇게 하도록 유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은 반박당하는 고통을 견딜 용기가 없기에 남에게 반박할 용기도 없다. 면전에서는 서로가 늘 감정을 숨기며 말할 뿐이다. 나는 비판당하고 거기서 배움을 얻는 것에 커다란 즐거움을 느끼기에 둘 중 어떤 형태라도 무방하다. 나 스스로 내 생각을 반박하고 책망하는 경우도 흔치 않은 터라 다른 사람이 됐건 내가 됐건 매한가지라는 이유에서다. 상대의 비난을 원칙적으로 내가 부여한 권위까지만 인정하는 만큼 더욱 그러하다. 나는 지나치게 강압적인 자와는 연을 끊는다.
P18 몽테뉴는 당대의 지인들이 반박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그다지 반박하지 않은 것을 유감스러워했다. 비판받는 것을 싫어하고 굴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남도 비판하지 않으며 각자의 확신 속에 틀어박힌다.
P18 마지막으로, 다른 식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몽테뉴가 타인에게 쉽게 동의한 건 상대로 하여금 반대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였지만, 또한 그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는 데다 생각이 자주 바뀌고 스스로를 반박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라고.
P18 몽테뉴는 반론을 좋아하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그가 누구보다도 미워한 것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분개하는, 자만심으로 가득한 자들이었다. 몽테뉴가 비난한 유일한 것, 그것은 독선이요 자만이다.
P21 몽테뉴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양성하려는 다른 거의 모든 작가들과 달리 자신의 사상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을 이야기할 뿐이다.
>> 어쩌면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건지도 모른다. 부탁하지도 않은 조언을 들려주려 하지도 않으며, 가르침을 주겠다고 달려드는 것도 아니니, 읽는 우리는 그저 그가 삶을 바라보는, 자신을 바라보는, 관계 속에서 느끼는 생각이나 느낌들을 동참하며 함께 걸어가는 것일 뿐이다.
그런 가운데, 그는 우리에게 조언을 주고자 않았지만, 가르침을 주고자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그를 통해 내게 필요한 조언과 가르침을 자발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정한 스승이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스스로 끄집어내도록 도와주는 이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그를 놓지 못하는 것일 게다.
P23 내 이야기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금방이라도 내 처지뿐 아니라 생각까지 변할 수 있다. 이 책은 다양하고 유동적인 사건들과 갈팡질팡하고 때에 따라서는 상반된 생각들의 기록이다. 나는 또 다른 나 자신일 수도 있고, 그때그때 상황과 판단에 따라 주제를 선택할 수도 있다.
>> 이런 몽테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흐름, 변화를 인지하고 스스로 고집하지 않는, 덤덤하게 자신을 놓아두는 몽테뉴, 고인물이 되어 썩은 내를 내지 않는 삶 앞에 겸손한 그가 너무 좋다.
P90 몽테뉴가 다른 사람의 책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이를 인용하는 것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바로 그거다. 책을 읽고 초서 하고 느낌 단상을 적는 것은, 그 구절을 통해 나를 드러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더욱이 나는 몽테뉴와 같은 지적인 인물도 아니거니와), 바로 그 구절이나 책 속에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P91 타인과 교제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되고, 자신을 알게 됨으로써 타인도 알게 된다. (…) 후안 폴 리쾨르가 말했듯 “자신을 남처럼” 보아야 한다. 몽테뉴의 은둔은 결코 타인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타인을 더 잘 헤아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 공감, 공감, 또 공감하는 부분이다. 타인과 나의 서로 다른 점을 보면서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 책도 마찬가지다. 같은 책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서로 다른 느낌 다른 배움을 얻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좀 더 깊이 알게 되며, 모두가 다 같지 않다는 다름에 대한 존중을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