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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mpkin Feb 26. 2020

데이비드 셀린저와<호밀밭의 파수꾼>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홀든 콜필드의 마지막 한마디. 이 한마디가 남겨준 여운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메아리처럼 아득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누가 죽은 것도 아니다. 절절한 사랑의 이별을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가슴 에이는 슬픈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흐른다. 흐린 가을 하늘에 뿌려지는 가랑비처럼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린다.


변명...


데이비드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나는 이 책을 읽어야 했다. 참을 수 없는 절절함. 이런 애달픈 간절함을 삶 속에 느끼는 순간은 많지 않다. 그랬기에 나는 마음의 소리에 충실했다. 영화 ‘FInding Forrester’를 보고 난 후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들었다.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호기심, 알고 싶었다. 대체 윌리엄 포레스터의 실지 모델인 데이비드 셀린저가 누군지. 그는 왜 글을 쓰기를 거부했는지. 평생을 그렇게 세상에서 숨고 싶어 했는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조이스 메이너드와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사랑 이야기는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세상의 걷잡을 수 없는 관심을 받게 되고.

대체 말로만 듣던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책은 어떤 책이길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책으로 꼽히는 것인지. 평소에는 별 관심 없던 이 소설이 ‘Finding Forrester’를 보면서 나에게 참을 수 없는 갈증으로 다가왔던 게다.

유니컨 축제뿐만 아니라 그 외로 내게 과제로 주어진 책들이 여러 권 있었지만, 나는 잠시 그것들을 옆으로 제쳐놓아야 했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이 책을 영원히 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이 책을 지금 당장 읽지 않고는 그 아른거림에 도저히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린애 같은 나의 변명이다.


‘마치 여운이 영원처럼 이어지는 듯한, 감성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었다’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을 이 느낌. 이런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다. Finding Forrester를 보았을 때와 닮은 느낌. 물론 그 영화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영화화한 것은 아니나, ‘데이비드 셀린저’라는 공통분모가 서로를 떠올리게 했다. 책을 읽으며 영화 속의 윌리엄을 더 이해하게 되었고, 영화를 보았고 윌리엄의 삶을 보았기에 책의 내용이 좀 더 깊이 이해되었다고 말한다면 억지를 부리는 걸까.

데이비드 셀린저가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은 바로 바보 멍청이들이 제대로 이해도 못했으면서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박수를 쳐대고 환호를 질러대는 그것에 구역질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자기들은 평생 가도 쓰지 못할 것들을 하루 만에 이것저것 잘라내고 뜯어고치는 비평가들이 손에 내 작품이 맡겨지는 것이 싫었던 윌리엄 포리스트의 마음이 바로 데이비드 셀린저의 마음이었을 것이란 느낌이 강하게 일었다.




이야기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자신이 다니던 펜시 고등학교를 퇴학을 당하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그가 자신을 만나기 전 몸이 약한 엄마가 학교로부터 먼저 통지를 받고 충격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호텔이나 선생님 집을 전전하는 며칠 동안 겪게 되는 경험들과 그에 따라 전개되는 그의 심리상태를 섬세하게 그려낸 내용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내용은 언뜻 보면 간단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늘 그렇듯, 홀든의 삶도 보이는 것처럼 심플하진 않다. 콜필드의 과장스런 표현을 빌자면 그 안에는 ‘수억만 개’의 갈등과 방황이 공존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왜 미국인들이 (세계인들 포함) 그렇게 셀린저에 열광하고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사랑했는지 그냥 그대로 이해가 됐다. 그의 다음 책을 얼마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을까.


홀든 콜필드는 자기 앞에 생각지 않게 전개되는 상황들과 맞닥뜨리게 되는 사건들을 이야기해 나가다가 그와 유사한 지난날 어느 시점에서 일어났던 기억을 떠올리고 마치 구슬을 하나하나 꿰어가듯이 그렇게 맛갈스럽고도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이어나간다. 문득 눈에 띄는 야구 글러브 속에 자전거를 보고, 수녀들의 값싼 가방을 보고, 여드름을 보며, 잘난 체 피아노 치는 어니를 보고, 피아노 연주나 연극을 보다가 열렬히 반응하는 온갖 멍청이들을 보면서 지난날 속에 만난 많은 바보 멍청이들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떨 때는 마치 끝말잇기 하듯이 문득 하나 떠오른 이야기로 인해 다른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도둑맞은 장갑을 생각하다 내가 겁쟁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점점 더 절망스럽게 느꼈다

정말 우리는 그런다. 한 가지를 떠올리다 그에 따라 연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로 나중엔 엉뚱한 곳으로 결론이 이어지는 경우 말이다. 이런 섬세한 부분까지 터치한 셀린저에게 반하지 않을 독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말 진정한 스토리 텔러였다. 그 연결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당연히 그 이야기로 이어져야 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를 가장 미치도록 열광케 했던 부분은 그의 시니컬하면서도 억지스러운 과장된 묘사법이었는데 그런 그의 특유의 과장법은 정말이지 넋이 나가게 했다. 그 이미지나 그 냄새가 그대로 느껴지고, 그 상황이 사진처럼 찍혀서 영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영화 같은 책을 ‘보았다’라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 85번쯤 이야기를 했다.

- 1번만 더 들으면 천 번이다.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이다’ 우리 때 유행어이기도 했다. ^^)

- 손가락을 마흔 개가량을 부러뜨려야만 직성이 플릴 것 같은

- 오천만 대의 시가 꽁초를 모아놓은 것 같은 냄새

- 어느 노부부의 50만 년은 될 것처럼 긴 인생에 관한 내용

- 시베리아에서 하는 기침 소리도 들을 정도

- 오십 년쯤 전에 내가 어렸을 때도 이 음악이 나왔다. 등등


그의 다소 과장된 표현은 그 상황을 더 시니컬하게 느끼게 하고, 그 상황에서 콜필드의 느낌이 어떤지 그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좋았기도 했지만, 더 좋았던 것은 그 음울한 상황이 유머러스하게 느껴져 나로 하여금 킬킬거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겨우 16살인 콜필드, 오십 년쯤 전에 자기가 어렸을 때라니.





데이비드 셀린저의 재밌는 점은 어떤 상상 속의 가정을 쓰더라도 꼭 현재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난 예수님이 유다를 지옥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데 천 달러라도 걸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내가 천 달러를 가지고 있을 때 얘기지만 말이다” 이런 콜필드의 정직성과 순수성이 그에게 있어 가장 강한 매력으로 느껴졌다. 그는 ‘가정’ 속에서도 가식과 거짓을 싫어하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품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한 가지 상황을 두고 이쪽저쪽에서 느낄 수 있는 관점을 다 느껴보고 배려하는 것. 물론 '나(콜필드)'는 그 의견과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는 식의 사고가 참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홀든 콜필드에게 빠진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고의 폭이 넓은 것. 우선은 배려가 앞서고 비록 자신의 의견과는 다를지라도 상대방의 신을 신어보고 그 느낌을 느껴볼 줄 아는 존중의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 그지만 거짓과 가식과 겉치레에 대해서는 구역질을 느낀다. 그러한 그가 너무 좋았다.


책 전체를 두고 흐르는 그 모든 이야기가 홀든 콜필드가 퇴학을 당하고 난 후 고작 며칠 동안 겪게 되는 사건들과 그에 대한 심리의 흐름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것이 놀라웠다.



리뷰를 마치며...


가끔씩, 정말 나는 아무도 웃기지 않는 부분에서, 왜 웃어야 하는지 모르는 부분에서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왜 그 부분에서 눈물이 나야 하는지 갸우뚱거려지는 부분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곤 한다. 나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나도 모른다. 그냥 그 부분에서 미친 듯이 웃겼고, 그 부분에서 그렇게도 눈물이 났을 뿐이다.


콜필드가 앤톨리니 선생과 통화를 끝내고 귀여운 동생 피비와 춤을 추는 장면에서 울컥하며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피비가 오빠 홀든에게 자신의 용돈을 빌려주는 장면에선 급기야는 꺼이꺼이 울음이 터졌다. 동물원에서 피비가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분에선 연민과 그리움과 슬픔 같은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복합적인 감정이 어우러져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혹시 홀든 콜필드가 죽는 것은 아닐까? 중간중간 그가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 이 글을 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불안했다.


오빠를 따라가겠다고 가방을 싸들고 오는 피비. 자신을 몰래 만나러 온 오빠를 보호해주느라 빨리 엄마를 방에서 내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피비. 오빠에게 자신의 크리스마스 용돈을 빌려주며 결국엔 오빠를 울리고야 마는 피비. 하지만 마냥 아기 같고 만만한 피비도 아니다. 한번 화가 나면 오빠를 쩔쩔매게 하는 피비이기도 하다. 오빠가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힌 피비. 그런 동생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어 하는 오빠 홀든의 마음은 사랑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보다 더 강렬했고, 더 본질적이었기에 내겐 그리도 깊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건지도 모른다. 콜필드의 엘리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은 또 어떤가.


만약 홀든이 셀리나(물론 그럴리는 없겠지만), 제인과의 이별을 이렇게 그려냈다면 나는 이런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홀든의 말처럼 바보 멍청이 같단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하게 강렬한 사건이나 장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늪처럼 깊이 빠져들어 그에게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깊고 깊은 여운을 안겨주는 아주 묘한 소설이었다.




홀든 콜필드


비록 다른 과목은 낙제일지라도 작문의 귀재 홀든 콜필드. 내게 비치는 그를 표현하는 키워드는, 자유로운 영혼, 섬세한 감성, 따뜻한 인성, 순수함 그 자체, 가식에 대한 거부, 지적 갈망, 권위에 대한 소극적 반항, 동생에 대한 깊은 사랑, 상황을 바라보는 포괄적 시선, 배려로 표현할 수 있겠다. 


그의 가식에 대한 반발은 여러 군데에 나타나고 내 안에 깊이 묻혀있던 기억을 꺼내 올리게 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홀든 콜필드와 비슷한 나이에 나를 가장 많이 휘둘러댄 주제가 “가식과 순수’였기 때문이다.

돈 좀 있어 보이는 학부형들에게만 상냥하고 굽실거리는 구역질 나는 가식적인 펜시 고등학교 교장, 친구들에게 느꼈던 가식, 잘난척하는 어니, 그 교만스러운 연주를 보고 좋아라 하며 손뼉 치는 멍청이들, 이해도 못했으면서 연극에 아는척하며 떠들어대는 어느 아이비리그 학생, 화려하게 화장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이 ‘고귀한 자선사업’ 임을 알아주지 않으면 시들해질 귀부인 셀리 엄마 등등에게서 느껴지는 가식을 홀든 콜필드는 ‘토할 것 같다’로 표현을 한다.


그는 그런 사회 분위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대로 반항을 한다. 그리고 그 외로운 반항에 대한 결과는 슬프게도 ‘퇴학’이다. 하지만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책을 통해 가장 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그나마 앤톨리니 선생 정도일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 형 D.B가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할리우드로 가서 ‘멍청한’ 이들 속에 함께하며 그가 가장 싫어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실망을 느끼는 콜필드.


이 병원에 있는 정신과 전문의가, 이번 9월부터 학교에 가게 되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인지를 연신 물어대고 있다. 정말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질문이 있을까? 실제로 해보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지만, 실제로 어떻게 될지야 알 수 없는 일이다. (P276)


왜 우리는 콜필드가 가진 그 사고의 여유를 남겨두는 공간을 가지지 못한 것일까? 맞는 이야기니까. 실제로 해보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하게 될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누군가가 있다. 내가 아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읽히는 것이다. 매번은 아니지만 종종 그렇다. 콜필드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며 나는 우리 막내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똑같은 질문을 나에게 해대는 아이이기에. 무언가 약속을 해주기를 바라는 나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진지하게 대답을 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는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싶지만, 정말 자기가 지켜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때 상황이 되어봐야 알지 않겠느냐는 것. 콜필드도 나의 둘째 딸아이도 단순한 듯 복잡한 정신세계를 가졌음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자유로운 영혼도, 글을 잘 쓰는 것도, 얽매이고 싶지 않은 많은 것이 닮았다.


암튼, 홀든 콜필드의 꿈은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어린아이들이 호밀밭에서 달리기를 하며 놀다가 절벽에서 떨어지려 할 때 나타나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호밀밭의 파수꾼’ 그것이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인지 물어보는 피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그런, 어린이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 말이다. 홀든 콜필드답지 않은가?


가방과 영화


싸구려 가방뿐만 아니라, 싸구려 가방을 든 사람까지 싫어하는 홀든 콜 필드. 그가 만약(리뷰를 쓰면서 이렇게 많이 ‘만약’이란 가정을 해보기도 첨이다) 실제 현실 속의 인물이어서 나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나를 혐오했을 것이란 생각에 조금 씁쓸해졌다. 그가 말한 ‘싸구려 가방’이 ‘명품 가방’의 반대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나, 나는 콜필드와는 반대로 고가 브랜드 네임의 명품보다는 비싸지 않고 실용적인 가방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실 '명품 가방'이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내 안에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내면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열등감을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어떤 화려한 것으로 채우며 과시하고 싶어 한다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다. 


명품을 든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님을 잘 안다. 내적 품위와 외적 품위가 잘 어울려 자연스러운 은은한 멋이 느껴지는 분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명품 가방을 손에 드는 그 순간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품위가 가 높아진다고 착각하는 이들도 많다. 명품 브랜드가 아니어도 질이 좋은 제품은 많다. 꼭 그 브랜드를 들어야 내가 품위 있어지고 높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명품을 걸쳐서라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 초라함에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콜필드의 ‘싸구려 가방을 든 사람까지 싫다’라는 표현 속엔 나와 같은 공감대가 있음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그가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싸구려 가방을 들면서 비싼 가방을 든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거지근성이지 ‘싸구려 가방’ 그 자체가 그의 경멸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을.


어쨌든, 그가 영화를 싫어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도 모든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를 좋아합니까?”라고 물으면 내 대답은 단연코 “물론이죠~ 미치게 좋아합니다~!!”일 테니까.





데이비드 셀린저


“밤 기차를 타고 갈 때면, 이따위 잡지에 실린 지겨운 기사들도 그럭저럭 읽을만한다. 그런 기사들은 대부분 데이비드란 이름에 턱이 길고...” (P77)


자신마저 시니컬한 비아냥의 대상으로 삼는 그가 참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 책 ‘호밀밭의 파수꾼’이 그렇게도 좋았던 것은, 이야기의 흐름이나 사건의 전개가 너무 자연스러웠고, 16세 소년의 눈에 비치는 사회적 분위기나 그를 통해 반응하는 그의 정신세계와 심리가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홀든 콜필드의 세계 안으로 끌려들어 가기 때문이 아녔을까.


셀린저는 특별한 표현을 쓰지 않았다. 테크닉에 뛰어난 작가들이 쓰는 기교나 멋진 단어들을 쓰지 않았다. (아니면 옮긴이 공경희가 쓰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상황 속에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느낌이나 감성들을 섬세하면서도 리얼하게 그 스쳐 지나가는 느낌까지도 모두 잡아서 그 안에 집어놓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놀라웠다. 그래서 홀든 콜필드가 느끼는 그 미세한 감정 하나하나까지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는 것. 마치 “감정이란 이럴 땐 이렇게 느껴지는 거야.” 하며 감정을 느끼는 방법을 배우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한치의 미세한 놓침도 없이 모든 각도에서 우리가 한 상황 속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세계를 그대로 그려놓았다는 것이 내게는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이었다.


그 어린 조이스 메이너드가 시대의 대작가 데이비드 셀린저와 사랑에 빠지고 그를 신앙처럼 여기며 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해서 누가 그녀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훗날 엘리아 카잔 감독이 영화화하고 싶었으나 ‘홀든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은 셀린저. 너무나도 많은 부분에서 데이비드 셀린저를 닮은 홀든 콜필드. 홀든 콜필드는 곧 데이비드 셀린저였을지도.


어쩜, 그는 내가 이런 느낌을 올리는 것조차도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해 그것이 칭송이던 비평이던 언급되는 자체를 좋아하지 않으니. 부디 관대한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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