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브라질 할머니의 방문

<참 소중한 당신> 2016년 5월호에 실린 글

by pumpkin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일들 속에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는 날들이 많았던 요즘, 오늘 역시 그런 하루였다. 새로운 제품이 들어온 지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직 진열되지 않아 담당 직원에게 “새 제품이 들어오면 빨리 진열대에 올려놓아야 하는 것을 왜 잊었죠? 어제 일 시작했나요?”하며 감정을 넣어 날카롭게 지적하고 말았다.


부드럽게 타일러도 좋았을 일인데. 그때였다. 지팡이를 짚으신 브라질 할머니께서 들어오신 것은. 그분의 머리는 거의 다 빠져있었고, 어떤 남자분의 도움을 받으며 들어오시더니 가발을 보자고 하신다. 직원 중 한 명이 여러 스타일의 가발을 보여드렸고, 그중 마음에 드는 몇 모델을 골라 할머니는 직원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셨다.



대체적으로 가발을 사러 오시는 분들은 암 투병 중으로 화학치료를 받고 계시거나, 탈모와 같은 문제를 가진 분들이기에 공개적인 공간에서 써보기를 꺼려하신다. 한참이 지난 후에 할머니께서 힘들게 올라오시더니 그중 하나가 마음에 드신다며 미소를 지으셨다.


할머니와 함께 온 남자분이 자동차를 대기시키기 위해 나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들이 다섯인데 모두 죽고 지금 아드님 한 분만 남았는데, 바로 함께 온 남자분이 바로 마지막 남은 아드님이었다. 할아버지는 9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우셨지만 잘 이겨내셨다는 말씀도 들려주셨다. 그러시면서 혼잣말하듯 말씀하셨다.


“나는 며느리를 아주 사랑하는데 그 아이는 어떤지 모르겠어요.”


가만 듣고 있던 나는 위로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분명히 며느님께서도 할머니를 사랑하실 거라고 말씀드렸다. 그때 할머니의 말씀에 그만 울컥해져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그 아이가 나를 사랑하고 안 하고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바로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지요. 난 아주 행복해요. 내가 내 가족들, 친지들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죠. 남편과 아들들을 잃은 충격으로 6년을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한 번도 내가 일어나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한 번도 Fé(믿음)를 잃은 적이 없지요. 그리고 일어나 걷게 됐죠.”


할머니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셨다.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어놓은 여러 신들의 이야기, 종교야 항상 좋은 것을 지향하지 않느냐며 결국 다투게 되는 원인은 그걸 받아들이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마음 때문이라는 이야기라는 말씀. 그렇기에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가치는 우리가 의무와 책임감을 갖고 꼭 행해야 하는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이었다.


한참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아드님께서 오셨다. 아쉬웠다. 좀 더 계시면서 이야기를 계속해주셨음 하는 마음이었지만, 나만의 바람이었을 뿐이다. 좋은 말씀 해주셔서 많은 걸 배우게 되어 감사드린다는 나의 인사에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치신다. 젊은 사람들이 더 똑똑하고 많이 알지 않느냐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서 좋으셨단다. 그러고는 살포시 다정한 포옹을 해주고 가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에는 눈물이 그렁대고 있었다.


짧았지만 할머니와의 대화는 내게 주어진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함께 성장을 꿈꾸는 사랑하는 남편과 반듯하고 예쁘게 자라주고 있는 두 딸아이. 때때로 문제를 안겨주긴 하지만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 나가며 열심히 일해 주고 있는 직원들과 함께 하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느끼게 해 주셨다. 내 안의 어두움이 밀려나고, 차갑고 냉랭했던 내 가슴에 따스한 온기가 물무늬처럼 퍼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사실, 생각지 않게 닥쳐온 극심한 브라질의 불경기로 매출은 떨어지고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 부정적인 영향들은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게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규모를 떠나 사업을 하는 이들에게 경기의 흐름은 일상이건만 새삼스럽게 날카로워지고 예민하게 반응하며 마치 내가 가장 힘든 삶 속에 있는 듯 행동했던 내가 많이 부끄러웠다.


할머니께서는 지금의 내게 몹시 필요했던 깨달음을 주셨다. 덕분에 일상의 소중함을 발견했다. 천사의 방문이 아니었을까. 온통 회색빛이었던 나의 일상이 갑자기 밝은 파스텔 빛깔로 채색되며, 살아있음 자체로 행복이 밀려오는 느낌! 일상의 의미와 감사를 일깨워주신 할머니께 감사드린다. 하느님의 은총 속에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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