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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ina C Jun 21. 2018

출산의 기록

겪어보니 장난 없던 출산의 고통, 그보다 더한 육아의 고통



내 생각만큼 전혀 형식적이지도 숭고하지도 않았다.
글로 배운 출산은 전혀 도움되지 않았고 여기저기 후기들이 올라온 것도 나에게는 적용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월요일 저녁 8시에 입원하여 수요일 아침 11시에 아이를 낳은 나는 완전 다른 상황의 산모였다.


의사님은 양수가 줄어들어 태아가 나올 때 힘들고 위험할 수 있다며 유도분만을 권유했다. 양수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진통이 오길 기다렸다면 100퍼센트 제왕절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자연분만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유도분만을 결정한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


첫날, 저녁 8시에 입원한 후 새벽 6시까지는 수액을 달고 자연진통을 기다려봤지만 별다른 이상 징후가 없었고 촉진제를 투여한 이후 무통 시술을 했지만 6시간 동안 진통에 시달려야 했다. 자궁수축과 태아 상태는 좋으나 자궁문이 안 열려 진행이 더뎠던 나는 지지리도 운이 안 좋았는지 의사는 오늘은 그만 쉬고 저녁을 먹은 후 밤 12시부터 다시 금식해서 시도해보자고 했다. 절망적이었다. 이걸 또 해야 한다니. 하지만 다음 날, 6시간 진통 후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 와야 진정한 진통을 겪은 거란 걸 깨달았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쉬다가 저녁 9시쯤 태동검사를 하러 다시 분만실에 갔다. 태동 검사기를 달고 누워있는데 옆구리가 뜯어져 나갈 듯이 아팠다. 돌아눕지 않으면 숨 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밤새 양쪽을 번갈아가며 뒤척이다 새벽 4시 이슬과 함께 양수가 터졌다. 그때부터 생리통 같은 진통이 서서히 오기 시작했다.

8시 반이 넘어가자 내진 간호사가 자궁문이 2,3센티 열렸다고 했다. 좀 더 아프다. 아프다 못해 밑이 빠질 거 같다. 생리통 제일 심할 때 세기로 진통 간격이 점점 좁아졌다. 1분의 진통 후의 5분의 휴식에는 다음 진통을 기다리는 고역이 있었다. 고통에 숨 쉬는 걸 잊어버릴 정도여서 의식적으로 복식호흡을 하게 됐다. 눈물을 질질 흘리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절망적 이게도 이게 다가 아니었다.


자궁문이 6,7센티 열린 10시쯤부터는 내 몸이 더 이상 내 몸이 아니길 바랐다.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이 아랫배를 스쳐 지나갔다. 모르는 누가 봤다면 뱃속에 에일리언이 있나 생각할 정도로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기는 조금씩 몸을 틀면서 머리를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한참을 시달리고 있는데 간호사가 내진하더니 갑자기 거의 다 열렸다며 자궁경부 마사지를 했다. 그게 10시 30분쯤, 내 시선 정확히 정면에 디지털시계가 있었고 내가 마지막으로 시간을 인지한 때였다. 그때부터 나는 생전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위에 나보다 생리통이 심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정말 심할 땐 온몸을 떨고 헛구역질도 하며 몸에 피가 돌지 않아 얼굴이 새하얘진다. 생리를 더 이상 하지 않는 엄마를 제일 부러워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그 이상이었다. 정말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기차가 배 위로 지나가는 느낌? 사지를 찢는 형벌의 느낌? 다 아니다. 이건 그냥 출산의 고통, 고유의 고통이다.


10분이 10 시간 같은 그때, 내진 간호사가 이제부터 힘을 줘 보잔다. 내 팔이 닿는 곳에 있었다면 싸대기를 때렸을 거다. 이 고통에 힘을 주라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본능적으로 복식호흡은 하고 있었고 그래도 끝은 있겠지 싶어 (사실 살고 싶어 간호사가 하라는 대로 했다) 시키는 대로 대변보는 느낌으로 힘을 줬다. 세상에.. 내 아랫배 밑 쪽에서 아기의 머리가 골반 사이 아래로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 지옥 같은 고통에도 그 느낌이 나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조물주는 정말 희한한 존재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만든 건지.


그리고 의사가 올라와서 세 번만 힘주면 끝난다고 힘내라고 했고 정확히 세 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있는 대로 힘을 주고 나서야 열 달 품은 아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내 품 위로 올려진 아이. 눈을 뜨고 이리저리 쳐다보는게 다 큰 아이같았다.


저 순간의 기분은 뭐랄까. 사실 실감도 나지 않고 단지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시원한 느낌에 취해 아이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땀에 절어있어 빨리 씻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고 기진맥진해서 밥이나 빨리 먹고 싶었다.



지금 아이는 백일이 넘었고 사람다운 모습을 갖춰 가고 있다. 조리원에 있을 때는 그저 내 몸조리와 어떻게 하면 모유가 많이 퐁퐁 나올까 이 궁리만 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수유시간에 좀 더 아이와 교감할걸 더 많이 속삭여줄걸 후회가 드는 건 조리원을 나와 친정집에 와서였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눈만 뜨면 울어대는 통에 내가 밤을 꼬박 새우고 좀비처럼 나와 아침을 먹으면 엄마는 바통 터치하듯 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한 달 동안의 수면 시간은 고3 때의 절반 수준이었고 먹은 미역국은 30년 간 생일 때 먹은 양과 맞먹었다. 친정 조리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끼니 챙기기도 힘들었고 아이에게 매달려 있느라 화장실 한 번 가기도 힘들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임신 때 쪘던 16킬로가 3개월 만에 거의 다 빠져 임신 전 몸무게로 돌아갔다. 입던 옷이 다 들어감은 물론이고 하이힐도 신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뼈마디는 다 붙지 않아 움직임이 굼뜨지만 말이다.


벌써 의자에 앉아 TV 보는 나이가 되었다니.








백일이 넘어가니 이제야 한숨 돌릴 시간도 생기고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아기 수영장에도 다녀올 여유가 생겼다. 지금도 아이의 생활 패턴이 꼬이면 씻지도 못하고 밥도 못 먹은 채로 계속 아이에게 매여 있어야 하지만 그래도 가끔 샤워도 하고 유모차에 태워 산책도 할 수 있으니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이제 잠에서 깨도 울지 않고 멍 때리며 나를 기다리고, 혼자서 놀다가 뒤집기도 한다.

많이 컸다.

그리고

아이가 큰 만큼 나도 큰다.


이 자식이. 왜 울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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