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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ina C Oct 25. 2016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돌고돌아 KTX로


9월 마지막 주

철도노조 파업이 시작됐다

아시다시피 승무원들은 자회사 소속이라

파업과는 별개로 근무를 계속 하지만

열차팀장 여객전무 기관사 기장

이 분들은 코레일 본사 소속,

파업과 동시에 열차 승무를 접으셨다.

대체 전무를 유용하지 못해 최하위 열차인 관광열차는 전부 운휴되었고 좌석이 제일 많이 팔려 민원의 소지가 있는 G트레인은 운행을 계속한다.


열과 성을 다해 불사른 마지막 풍선아트


9월 마지막 주 월요일부터 10월 첫째주 일요일까지 일주일을 쉬었다. 딱 하루 대기 4시간을 하며 입사 2주된 신입들의 교육을 하고 이벤트를 재정비하며 언제까지 파업이 될까 걱정하고 있었던 개천절에 문득 내가 여태까지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간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이 기회를 누군가는 유럽으로 누군가는 호주로

소중한 경험들을 하고 있는 동료들을 보니

나도 갑자기 뭔가 멍해졌다.

스페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후배님의

지금 당장 떠나라는 카톡을 보고서야

뭔가에 이끌리듯 홍콩 패키지 여행상품을

결제했다.. 동시에 인터넷 면세점도 여행상품 가격만큼이나 털었다..


인천-홍콩 출발 직전


10년짜리 여권이 프랑스 어학연수와 오사카 여행의 흔적만을 남긴 채 만료를 3개월 앞두고 있었고 다행히 얼마 전에 막 갱신을 했다.

개천절 이후 며칠간의 대기를 더 하고 난 후

나는 10월 10일 아침, 홍콩으로 떠났다.

2박3일 짧은 기간동안 편하게 엑기스만 보기 위해 패키지를 선택했고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반나절 자유여행동안 알게되었다. 편한 일정 덕에 반나절 자유가 매우 매우 더 여유롭게 느껴졌다. 그토록 바라던 페닌슐라 애프터눈 티 세트를 두시간동안 즐길 때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잊을 수 없는 사치. 페닌슐라 애프터눈 티 세트.


사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첫째 날 저녁이었다.

첫째 날 가이드님의 매우 효율적인 동선과 시간배분 덕에 유명한 관광지란 관광지는 전부 가서 여유롭게 구경하고 기념품도 사고 제대로 관광을 하고 호텔로 돌아오니 피곤이 몰려왔다. 얽매여 있는 단톡방이 많아 공지라도 확인하자는 생각에 호텔로비에서 와이파이를 잡았다.


멈추지 않는 알림음과 카톡에 떠있는 수십개의 메세지. 그 중에 친한 선배언니의 톡방이 눈에 확 들어왔다.


"너 좋은 일 있는데 말도 없이@'÷'/'@× 축하해!!'÷'^@÷@_'÷"


좋은 일?? 그래서 팀장님이랑 회사에서 전화가 온건가?? 뭐지??

메세지를 전부 읽고 나서야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용산지사 승무2팀 발령, KTX근무로 전환 -


이게 무슨 말이야?왜?

문득 낮에 팀장님의 전화를 받지 못해(로밍은 수신도 돈이 든다) 급하게 룸조이너의 데이터를 빌려 연락한 것이 기억났다. 무슨일이냐고. 그냥 전환근무의 생각이 있는지를 조사 중이라는 메세지를 받고 살짝 갈등했다. 지금은 관광이 너무 좋고 적응하고 있지만 내가 예전부터 전환 의사를 밝혔고 언제까지 관광에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3년차 승무원들은 누구나 한번쯤 할 것이라고. 팀장님은 참고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나를 용산지사로 보내버렸다.

그런 말은 없었는데. 난 지금 가겠다는 말이 아니었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거 같은데!!


네네 고맙습니다. 호랑이띠 선생님.


여행 첫번째 코스였던 웡타이신 사원에서 본인의 십이간지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해서 찍었다. 사원 정원이 너무 예쁘고 좋아서 천천히 둘러보며 사진도 많이 찍고 생각도 많이 하고 점괘를 알려준다는 통 흔들기도 하고 그 곳에서 소원도 빌었다. 일단 아빠의 건강과 그리고 나의 재물운.

근데 신께서는 나의 재물운을 이런 식으로 선물해 주셨고 아빠의 건강은 검진결과로 보여주셨다.


감사의 의미로 쇼핑코스였던 TSL에 가서 십이간지 백금 목걸이를 거금을 주고 샀다.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해서. 나는 호갱이었다기보다는 진짜 인생에 큰 일이 터지고 나니 홍콩 사람들의 인생관을 알게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 그 밖의 것은 신에게 맡기고 흐름에 따르겠다는 마음.

 

전환 신청을 세 번이나 했는데 전부 물 먹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인생의 흐름에 나를 맡기고 적응하고 살아보자 했더니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홍콩 여행 중에! 발령 소식을 접하니 허무하기까지 했다.

뜻하지 않은 때에 일이 이루어졌다.

알다가도 알 수 없는 인생이다.


2년동안 정들었던 DMZ트레인을 떠나려니

가슴이 먹먹했다.

농담처럼 멤버들 사이에서 이 수 많은 단톡방을 나가려면 퇴사아니면 임휴밖에 없냐며 푸념아닌 푸념이 돌았는데 나는 퇴사도 임휴도 아닌 전출이 되었다. 단톡방에 일일이 작별인사를 하고 나가기를 눌렀는데 경의선 방은 쉽게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겨우 장문의 인사를 전송했는데 파업이후 운휴되어 3주동안 뵙지 못했던 직원 분들의 환송 인사가 하나 둘 뜨면서 고작 2년이지만 내가 이렇게 이 일을 사랑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잃은 것과 얻은 것이 공존했던

관광열차. DMZ트레인.

나는 그렇게 그 곳을 떠나 용산지사에서 천사같은 멘토님을 만나 정신없이 열흘 간의 견습을 마치고 내일부터는 단독 승무를 시작한다.



늘 처음은 엉망진창일테지만

늘 그랬듯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당황스럽겠지만 이제 관광열차가 아닌

KTX 승무원에 대해 글을 쓸 예정이다.

관광열차를 나왔다고 해서 이 계정을 없애버릴 수도 없고 앞으로 KTX에 대해 쓰는 것도 다양한 열차 승무를 보여주는 것 같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끔 관광열차에 대해 쓸 수도 있고 이제 주제가 좀 더 풍부해졌다고나 할까.


그래도 당분간은 단독승무하느라 또 바빠질 것 같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진짜 내 인생은 버라이어티 다이나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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