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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젤라권 Jan 11. 2022

파카글라스

추억이 담긴 물건의 힘이란...

아침 댓바람부터 눈물바람이다.


정리벽을 장착한 딸이 소속감을 잃은 그릇들을 쉽게 버릴 수 없는 이유.

엄마의 손길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애매하게 남은 음식을 담기에 적당한 크기의 둥근 파카글라스는 평소 자주 사용하는 보관용기는 아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유리 제품이 좋다'는 엄마의 말과 함께 이사를 할 때마다 살아남았다.  파카글라스의 한쪽 귀퉁이에는 0.5cm 크기의 알루미늄 테잎이 네모나게 붙어 있었다.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이 그릇의 존재를 인지한 어느 순간부터 반짝이는 작은 테잎도 함께였다. 일 년에 몇 번 사용하지 않기에 긴 시간 무관심했던 파카글라스 덕분에 오늘 생각지도 못한 추억여행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 미지근한 물을 두 잔 마시고 연하게 탄 커피 한잔을 들고 창가로 가 날씨를 확인한다. 다 마신 커피잔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전날의 잔해로 남아 있는 설거지를 바로 할지 반려인이 하게 놔둘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바이브에서 제안해 주는 '나를 위한 믹스' 음악을 랜덤으로 플레이해놓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물기 마른 그릇들을 각자의 자리로 복귀시킨다. 나의 모닝 루틴이다.

 

쿠팡 이츠에서 발견한 연희동 맛집 '궁'의 평양냉면처럼 슴슴하지만 깊이 있는 만둣국이 애매하게 남아 오랜만에 사용했던 파카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짙은 바다색 뚜껑과 합체시켜 찬장의 보관용기 섹션에 넣으려는데, 그릇을 집어 든 손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오늘따라 그릇의 한쪽 귀퉁이에 붙어있는 알루미늄 테잎이 손에 걸린다. 뚜껑을 다시 열고, 손톱으로 테잎을 살짝 밀어보았다. 잘 밀린다. 작은 테잎을 떼어내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순간순간 엄마와의 시간들이 펼쳐진다. 눈앞은 흐려지지만 손은 규칙적인 동작에 이미 익숙해진 듯 능숙하게 테잎을 떼어낸다.

 

다 떼어낸 테잎 자리에는 새끼손톱보다 작은 생채기가 있었다. 얇고 미미한 까짐이 부드럽게 마모되어 유리면을 따라 손으로 만져도 다칠 우려는 없었다. 테잎이 붙어 있던 끈적한 부분을 씻어내려 물을 틀었다. 한참을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얼굴을 씻는다.


파카글라스에 난 작은 생채기에 마음 아파했을 그녀를 떠올린다.

테잎을 작게 오려 붙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

  

엄마는 물을 조금만 틀어놓고 설거지를 했다. 하나의 그릇을 헹구고 옮겨놓을 때마다 물을 끄고 켜는 행동을 반복했다. 환경을 생각하는 그녀에게 조금 길어지는 노동의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46년생. 전쟁을 기억하고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을 살아온 그녀는 파스타 소스나 잼처럼 유리용기에 담겨오는 제품들을 좋아했다. 내용물을 사용한 이후에도 이 용기들은 종이 라벨이 깨끗이 벗겨진 채 수납장 한쪽에 자리잡았다. 그렇게 수납장에는 언제 다시 나오게 될지 기약 없는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엄마와 달리 적당히 버릴 줄 아는 딸의 수납장에는 깔맞춤 해놓은 키친웨어들이 오와 열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소속은 없지만 성격이 확실해 보이는 세월을 입은 물건들도 존재한다.

딸의 정리벽은 무리에 속하지 못한 아이들을 솎아내고 싶어 하지만, 엄마의 손때가 묻어 있는 아이들은 수십 년 굳건히 자리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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