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음악으로 아침을 채운다
‘커피를 내린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부드러운 향기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아침에 연한 커피를 내리며 폰에서 음악 앱을 열고 랜덤으로 음악을 플레이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몇만 원이 넘는다는 서울의 꽃등심보다 맛도 없고 비린지는 몰라도~… 내가 지켜온 수많은 가족들의 저녁 밥상~’ 루시드폴의 ‘고등어’에 이런 가사가 있었구나. 내가 기억하는 가사와 멜로디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이 부분이다.
가사 전체를 집중해서 듣다 보니 감미로운 목소리와 꽤나 날 것의 가사가 머릿속에서 싱크를 맞추지 못하고 겉돈다. 노래가 나온 지 십여 년이 지났고, 싸비를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곡인데, 가사가 너무 낯설다.
랜덤으로 플레이하는 음악은 나의 선택이 아니기에 가끔 의외성의 재미와 새로운 가수와 음악을 발견하는 기쁨을 준다. 아침에는 모험하듯 랜덤으로, 저녁에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듣고 싶은 곡을 콕 집어서 듣는 편이다.
그렇게 같은 노래를 두 번 반복해 들으니 연하게 내려 마신 커피가 바닥을 보였다.
코로나 이전 나의 아침을 채우는 건 음악이었다.
지난 2년여의 아침은 유튜브 경제방송과 함께 시작되었다.
경제방송도 음악도 버즈를 끼고 두 손 두 발 자유롭게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음악을 들을 때는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리듬에 몸을 맡기곤 했었다. 가벼운 움직임은 스트레칭이나 요가를 해야겠다는 내 몸을 위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옮겨가곤 했다.
경제방송을 들을 때는 설거지, 청소 등 생각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기계적인 일을 하곤 했다. 가끔 요가매트를 깔고 동작을 이어갈 때면 귀와 뇌는 경제방송에 지배당해 몸과 호흡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한 동작에 의미 없이 멈춘 채, 애널리스트가 준비한 자료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중요한 자료라 생각되면 다시 앞으로 돌려 캡처를 시작한다.
어느새 엎드리거나 눕는 편한 자세로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언제 생긴 강박인지 모를 ‘생산성을 중시하는’ 성격 탓에 두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며 머리는 늘 산만하다. ‘멀티 태스킹이 가능하다’고 자랑처럼 얘기한 자신의 말에 갇혀 스스로 집중하지 못하는 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경제방송을 들을 때의 나는 스스로에게 집중하지 않는다. 얼굴은 무표정하고 목소리는 굳게 잠겨 있으며 주변의 소리에도 귀를 닫는다. 실시간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접하고, 여타의 비즈니스 시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으니 얻은 것도 분명 많았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끝을 알 수 없는 지식과 애매한 학구열은 스스로를 탓하는 시간을 늘리고 자존감을 낮췄다.
나는 문득 내가 나의 일에 온전히 집중했던 시간을 그리워한다.
일에 집중했을 때의 나는 뉴스에 민감하지 않았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잘 몰라도, 속보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지 않아도 나의 세상은 잘 돌아갔다.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들은 자존감을 높여줬다.
2020년 국경이 닫히고 축제와 공연이 취소되면서 시작된 나의 경제공부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꿈을 먹고살던 나에게 개인의 삶을,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현실감을 장착시켜 주었기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준비하지 않았고 준비되지 않았던 미래를 위해 공부하면 할수록 불안은 더 큰 불안을 가져온다.
피아노를 친다는 건, 피아니스트가 되어 무대에 선다는 목적을 가졌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골프를 치면 프로골퍼를 목표로 해야 하고, 글을 쓰면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냥 한다’는 말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목표지향적 사람이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더 많은 정보에 매달렸지만 불확실성 가득한 세상에 공부의 끝은 없다. 하루 한두 시간을 투자하며 수동적으로 듣는 경제방송과 뉴스가 나를 전문가로 만들 리 만무하다.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으면서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으로 자존감만 낮아진다.
목표지향적 인간은 목표를 정할 수 없는 남의 분야에서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
나는 게으름을 죄악시하며 부지런한 사람을 칭찬하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가난과 게으름은 동의어 같았다.
현재의 게으름에 면죄부를 주고 싶은 나의 자아는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아래의 문장을 찾아냈다.
‘현실 자아는 이상 자아에 비하면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로 나타난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사색과 게으름의 부재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생각하는 인간이 아닌, 생존을 위해 잠시도 길게 생각할 수 없는 야생 동물과 같은 처지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게 없다’는 과도한 긍정성의 강요가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저자의 해석에, 게으른 사색에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준 저자의 글에 감사하며 잠시 위안을 얻는다.
좋아하는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과 피아노 반주로 부르는 행복,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과 소소하게 게임비 내기를 하며 골프를 치는 즐거움, 일상을 기록하며 나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과 나누는 작은 공감과 위로.
피아니스트, 프로 골퍼,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가 없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 시간에 행복했냐고, 즐거웠냐고, 좋은 시간이었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렇게 하루를 채우고, 머리와 가슴을 채우고, 주변 사람들과의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작지만 밝은 에너지를 선물했던 나의 일상에 가치를 부여한다.
나는 다시 아침 루틴을 바꾸고 있다. 2년간의 시간에 루틴이 되어버린 경제뉴스를 듣지 않으려니 마음이 불안하다. 살짝 메스꺼운 느낌은 금단증세와 비슷하다.
커피를 내린다. 생각을 털어내듯 머리를 한번 털어내고 바이브를 연다. 다시 음악으로 아침을 채운다.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으니 하루의 작은 감사가 보인다.
따뜻한 엠버빛 햇살이 창문 깊이 들어온다. 해가 길어졌다. 봄이 오고 있다.
현실의 외면일 수도 있다는 자책을 완전히 없애진 못했지만, ‘나의 오늘도 나의 미래만큼 소중하다’고 되뇌며 자존감을 높여 줄 감성에 물을 준다. 작은 행복이라는 물을.
by Angella K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