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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젤라권 Oct 20. 2022

약속에 담긴 마음

Paul Gudgin

때로 지키지 못할 걸 알면서도 우리는 약속을 한다. 

지금의 이별이 조금은 덜 슬플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기대고 싶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지키지 못할 약속의 말에도 아마 그 약속을 지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을 것이다. 


2013년 8월, 축제 관광객으로 가득 찬 거리를 원하는 속도로 걸을 수 없던 나는 인도와 차도를 넘나들며 죠지 포쓰 브릿지(George Ⅳ Bridge)로 향했다. 폴은 미리 와서 에든버러 성Edinburgh Castle이 보이는 아웃사이더Outsider의 창가자리에 앉아 있었다. 에든버러에서 매년 반드시 방문하는 ‘나의 최애 Top 5 레스토랑’ 중에서도 제일 자주 가는 아웃사이더는 캐쥬얼하면서도 펜시하고, 모던하면서도 클래식한 팔색조 매력을 갖춘 곳이다. 테이블 높이에서부터 층고가 높은 천장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창문들을 통해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은 우드톤으로 깔맞춤한 레스토랑에 따뜻함과 편안함을 더한다. 어둠이 내리지 않아도 테이블마다 켜 놓은 초는 무심하게 촛농이 켜켜이 흘러내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스테이크를 제외한 대부분의 메뉴를 10파운드 내외로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점심과 스타터와 메인, 푸팅(아웃사이더는 메뉴에 디저트라 표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시그니처 메뉴인 푸팅과 아더스Others라 표기한다)으로 섹션을 나눠 와인과 함께 하는 2인 식사에 70~80파운드는 예상해야 하는 저녁 메뉴가 나뉘어져 있다. 

아웃사이더는 와인 1병을 마시기엔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와인을 카라프Carafe(500ml)로 주문할 수 있게 배려해 놓은 와인리스트와 서빙하는 스텝들의 친근한 매너, 눈부신 햇살이 빗겨 들어오는 창가의 고즈넉한 에든버러 캐슬 풍경이 더해지며 식사하는 동안 점증적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와인 1병은 부담스럽고 한잔은 조금 아쉬운 폴과 나는 쇼비뇽 블랑을 카라프로 주문하고, 익숙하게 저녁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축제로 유명한 에든버러라는 도시를 생각하며 바다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섬나라 영국에서 굴과 홍합은 인기있는 요리 재료다. 에든버러에서 홍합요리로 유명한 곳은 1998년 뉴타운에 문을 연 머셀 인 Mussel Inn이다. 축제 초반 매년 방문하던 이곳이 어느 순간부터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라 느껴지기 시작하며 자주 찾지 않게 되었다. 마치 서울에 살면서 삼청각이나 인사동, 남산은 관광객을 위한 장소라 생각하며 가지 않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 머셀인은 에든버러를 처음 방문하는 한국인에게 소개하는 레스토랑이 되었다. 


아웃사이더의 메뉴는 매년 조금씩 변화가 있다.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사라져서는 안되는) 메뉴가 바로 '삶은 홍합요리Steamed Mussel'다. 작은 사이즈의 스타터로도, 큰 사이즈의 메인으로도 주문할 수도 있는 유일한 메뉴이기도 하다. 유독 크림소스가 맛있는 이 레스토랑에서 머셀 크림 파스타를 발견한다면 반드시 주문해야 한다.

스타터부터 메인, 디저트까지 모든 음식이 훌륭하지만, 내가 매번 빼놓지 않고 주문하는 건 사이드메뉴에 있는 믹스드 올리브Mixed Olives다. 작은 볼 안에 가득 담긴 엄지손가락 크기의 탐스러운 그린 올리브는 특유의 풍미와 적당한 짠맛이 절묘하게 입안에 퍼지며 식욕을 돋군다. 


이른 저녁시간에도 테이블은 이미 만석이었고 문 앞의 대기행렬은 눈에 띄게 늘고 있었다. 

우리는 일찍 온 자의 여유를 만끽하며 와인잔을 부딪쳤다. 이내 연례행사 같은 근황 토크가 이어졌다. 


폴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세계멸망을 예언했다며 세계가 들썩이던 1999년에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위원장이 되었다. 나와 축제의 시작이 같다. 가장 변화무쌍한 8년을 축제와 함께 한 폴은 2007년 자리를 내려놓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 후로 7년간 대학에서 페스티벌&이벤트 매니지먼트 전공과 축제전문가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를 운영하였고, 축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혜를 나누는 그는 좋은 멘토이자 교육자였다. 


재밌는 소식이 있다고 운을 띄운 폴은 아직 공식 기사가 나가지는 않았지만 2014년부터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 City of London Festival의 축제위원장을 맡기로 했다고 말했다. 친구가 필드로 돌아온다는 소식만큼 기쁜 소식은 없다. 함께 하는 일 없이도 매년 빠짐없이 안부를 묻고 있지만, 일을 같이 하게 되면 더 자주 연락하고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어 즐겁다. 


폴은 시티 오브 런던에 대해, 축제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시티 오브 런던’은 ‘더 시티The City’라고도 불리며, 세계금융의 중심지이자 런던의 역사적 중심이기도 한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런던시Greater London에 위치해 있지만, 독자적인 자치도시로 경제적, 정치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런던타워에서 성바오로 성당까지, 템스강에서 런던 월까지가 이 곳의 영토로 영국사람들은 이 곳을 ‘더 시티’라는 이름 이외에 ‘스퀘어 마일The Square Mile’이라고도 부른다. 


영국중앙은행과 세계적인 은행이 모여 있는 이곳에는 관광객들이 사랑하는 ‘타워 오브 런던’, ‘타워 브릿지’, ‘밀레니엄 브릿지’, ‘세인트폴 성당’, ‘거킨 빌딩’ 등이 있다. 이듬해 축제 운영을 위해 다시 찾은 런던에서 나는 그 전에는 수차례 방문하면서도 인지하지 못했던 시티 오브 런던의 휘장을 거리 곳곳에서 발견하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언의 산증인이 되었다. 


런던의 시장이 선출직임에 반해, 시티 오브 런던의 시장인 ‘로드 메이어Lord Mayer’는 명예직으로 영국에서의 서열이 여왕 다음으로 높다. 영국 여왕조차 이 곳을 방문할 때에는 형식적일지라도 로드 메이어의 허락을 구한다고 한다. 경찰도 소방관도 런던시와 분리되어 운영되는 시티에서 지난 50년간 매년 여름 클래식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름하여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 로드 메이어가 되면 자연스럽게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의 회장President직을 겸임하게 된다. 


폴은 축제가 지나온 50년의 역사를 공부하며, 새로운 50년을 위한 기획을 고민하고 있었다. 새로 취임하는 축제에 거창하게 변화의 바람을 불러오고 싶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클래식 음악축제를 종합예술축제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음악을 전공한 폴이지만 그가 프린지에서 보낸 8년은 그를 이미 종합문화예술인으로 만들었고, 다양한 쟝르 각각의 매력과 융복합의 매력, 대중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의 매력을 경험한 그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지난 7년간 말 그대로 축제를 연구하고 축제전문가들을 양성해 오지 않았는가.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힘있는 기획이 가능한 그였다. 


폴은 축제의 메인 테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시티 오브 런던’이니 심플하게 매년 메인 시티(도시)를 선정하고 그 도시의 다양한 문화를 선보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물론, 우리는 축제의 첫 메인 도시를 ‘서울’로 정했다. 




같은 해 겨울, 우리는 런던 홀번Holborn에 위치한 축제 사무국에서 메인 프로그램과 쟝르별 초청공연에 대한 협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프로그래밍할 공연의 규모에 맞는 공연장과 스케줄 전반을 논의하고자 방문한 런던은 한여름의 축제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산하고 으스스한 날씨는 영상의 기온에도 뼈속까지 찬 기운을 옮겨온다. 닭살이 올라오는 음산한 추위에 옛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2006년 1월, 나는 한달이 조금 넘는 일정으로 웨스트 앤드 공연을 진행하고 있었다. 공연 초반에 걸린 감기는 일주일, 열흘이 지나도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뒤늦게 시간을 내 찾아간 클리닉에서 담당 의사는 그저 ‘너의 몸이 기침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기침을 하게 놔두라’는 쌀로 밥짓는 이야기를 하며, ‘사람이 많고 먼지가 많은 공연장, 호텔, 펍 같은 곳에 가지 말라’는 처방 아닌 처방을 내려 주었다. 나의 주 생활공간이 바로 이 세 곳이다. 공연장, 호텔, 펍... 

밤새 바튼 기침을 하며 뜬 눈으로 한달여를 보낸 후, 나의 감기는 스페인의 눈부신 햇살을 받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장황한 설명을 한 이유는 ‘나는 (가능하면) 겨울에 영국에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이 날도 유독 걷기를 좋아하는 영국의 축제 친구들과 함께 뭔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회색빛 하늘 아래 스퀘어 마일을 언 발을 달래며 걷고 또 걸었다. 홀번 비아덕트를 따라 스테이셔널스 홀Stationers’ Hall을 둘러보고, 축제의 상징이 될 Bowler Hat이 세워질 Paternoster Square를 지나, 세인트폴 성당으로 향했다. 

3시반, 아직 사전답사를 진행해야 할 장소의 1/5도 둘러보지 못했는데 주변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렇다. 영국의 12월에는 운이 나쁘지 않아도 3시 50분경 해지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해가 뜰지 안 뜰지 알 수 없는 겨울의 한중간을 지나고 있는 영국이기에 다음 날도 8시는 되어야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할 것이다. 짧은 낮이 지나 길고도 긴 밤이 찾아왔다. 

같은 일정은 일주일간 반복되었다. 언 발을 달래며 공연장에서 공연장으로, 혹은 공연장이 아닌 시티 오브 런던의 멋진 공간들을 축제기간 공연장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며 우리는 회색빛 하늘 아래 추위로 움츠러드는 어깨에도 생각과 마음을 열고 상상을 현실화시켜 나갔다. 


이듬해 여름, ‘서울 인 더 시티’는 축제의 메인 공연으로 세인트폴 성당에 지휘자 정명훈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올렸다. 티켓은 오픈하자마자 매진되었고 세인트폴 성당에 울려 퍼진 베토벤의 합창은 표현이 불가능한 감동과 함께 10여분간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마음을 듬뿍 담아 기획한 프로그램 중에서도 '더 기프트The Gift'는 기획자의 가슴을 엄마 개구리처럼 뿌듯함과 감동으로 부풀어 오르게 만들었다. 영재Gifted Children라는 단어 그대로 선물Gift이라는 제목을 붙여, 14살의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빈과 16살의 첼리스트 최하영을 메인으로 트리니티 음대의 챔버 앙상블과의 협연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목표가 있을 때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무대위에서 너무도 당당하고 멋진, 웅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솔리스트들은 관객 모두에게 그 자체로 빛나는 선물이었다.   

손열음 리싸이틀, 김선욱 리싸이틀, 금호아시아나 솔리스트의 무대 등 기존 축제의 아이덴티티를 살려 클래식 프로그램으로 절반을 채우고, 앙정웅 연출의 연극 햄릿과 퓨전국악 앙상블 시나위, 현대무용 안데르센의 시선, 그리고 갬블러 크루의 화려한 비보잉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프로그래밍한 시티 오브 런던의 첫 종합예술축제는 그렇게 한국문화로 물들어갔다.  





2017년 8월, 우리는 써머홀Summerhall의 야외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지나가던 친구들이 나에게 인사를 해 올때마다 나는 폴을 소개했다. 프린지의 레전드라고 불리는 사람이자 최장기간 축제위원장으로 있으며 축제의 규모를 2배로 키워 놓은 그를 나의 새로운 친구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매년 에든버러 축제에서 코리안 시즌을 운영하는 나는 축제 관계자와 공연장의 스텝들, 새로운 공연팀과 아티스트들을 만나게 되지만, 2007년을 마지막으로 에든버러 축제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난 폴을 알아보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축제 사이트의 기사나 온라인에서 에든버러와 연관되어 나오는 그의 이름을 본 사람은 있겠지만 10년이라는 시간동안 축제는 서서히 그를 잊었다. 


1999년부터 2007년까지 최장수 축제위원장을 지낸 ‘레전드’. 

당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전세계의 다양한 언론이 세계 최대 규모의 축제를 지휘하는 그의 인터뷰를 싣고자 했고, 참여해야 하는 행사도, 봐야 하는 공연도,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던 그다. 

그 후로 2~3년은 축제기간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다가와 인사하던 친구들이 있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 그를 알아보는 건 나 같은 옛날 친구와 극장운영진 정도다. 대부분의 축제 스텝들과 공연장 프로듀서들은 에든버러에서 커리어를 쌓아 다른 국가나 지역의 좋은 포지션으로 옮겨가는 게 지극히 일반적이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 


그는 나의 눈빛을 읽었는지, 이내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든 편히 다닐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데~”


그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이 어딘지 공허하고 슬프게 들렸다. 

폴은 활동적인 사람이다. 지금도 다른 지역 축제의 축제위원장으로 일하며, 문화예술전문가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 특강을 위해 전세계를 누비고, 자신의 전공을 살려 주기적으로 연주자이자 지휘자로 변모하기도 한다. 

나의 주제넘은 측은지심은 자주 그 방향을 벗어난다. 그렇게 방향을 벗어난 생각은 멋진 백발의 신사를 보며 은퇴를 떠올렸다. 나의 20년지기 친구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다. 나이를 물어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처음엔 정확히 알 수 없었던 나이도 함께 하는 시간 속에 직관하게 되는 케익 위의 50, 55, 60, 70이라는 선명한 숫자와 함께 명확해진다. 


몇년전부터 '내년에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다른 국가나 지역의 축제나 공연장을 운영하게 되어 못 오는 경우는 후일을 기약할 수 있기에 슬프지 않다.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건 근황을 알지 못해 궁금해 하던 친구의 부고를 접하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업계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할 때이다. 몇몇은 시장의 척박함에 지쳐 스스로 떠나기도 하고, 몇몇은 경제적인 문제로 다른 진로를 택하기도 한다. 

'내년에 만나자'는 약속이 반드시 지켜지길 바라며 우리는 매년 같은 약속을 반복하지만 점점 더 다양한 이유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친구들이 늘어간다.


문화예술계에서 은퇴라는 말은 꽤나 낯설다. 

요즘 일부러 더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비자발적 조기퇴직 상태’라 부르고 있는 나는 비자발적 재택근무 상태로 서재에 홀로 앉아 은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을 생각해 본다. 

사전적 의미로 ‘은퇴’란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이라고 나온다. 

모든 해외일정을 내년으로 미뤘지만 회사의 회계 사이클이 돌아가고 있으니 ‘사회활동에서 손을 뗀’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한가히 지내고’ 있다.

나에게 은퇴는 너무 간단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 일도 벌이지 않으면 자연 은퇴상태가 될 것이다. 매년 진행하는 에든버러 코리안시즌을 포함해 올해 계획되었던 루마니아, 이집트, 멕시코, 라트비아, 홍콩, 일본 등지의 해외공연은 대부분 내년으로 미뤘다. 일부는 잠정 보류상태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며 읍소할 상대도 없다. 이에 더해, 여전히 그 누구도 2021년엔 모든 것이 정상화될 것이라 말하지 못한다. 그저 이 불확실성이 안개 걷히듯 사라지길 기도하는 마음이다. 

주변 사람들은 뉴노멀에 적응해야 한다고 한다. 무대공연 제작과 영상콘텐츠 제작을 병행하거나 아니면 영상으로 완전히 돌아서거나, 넷플릭스 같은 OTT와 계약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게 답이라고 말한다. 글을 쓰겠다는 나에게 유튜브를 병행하라고 조언한다. 


나는 폴처럼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않아 ‘편히 다닐 수 있는’ 축제를 상상해 본다. 

우리 중 일 없이 만날 수 있는 사이, 공통 관심사없이 만날 수 있는 사이는 몇이나 될까. 

내가 일하던 곳에서 더 이상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일반 관객들과 같이 보고싶은 공연만 골라 티켓을 구매하고 관람한다. 어떤 공연을 꼭 관람해야 하는 이유도 없고, 공연을 분석할 필요도 없다. 나는 축제를 즐기고 있는가? 나는 관계자가 아닌 상태로 객석에 앉아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인가? 잘 모르겠다. 상상만으로 닿을 수 없는 느낌이다. 


에든버러에 방문했던 조카는 신기한 듯 물었다. 어떻게 에든버러에서 사람들을 다 아냐고. 

“그러게, 고모가 여기서 오래 일해서 그런가 보지.”

에든버러 축제는 문화예술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60여개국의 사람들이 한달동안 한 도시에 머물며 같은 루틴으로 생활하는 곳이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무슨 얘기를 해야 할 지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를 감싸고 있는 축제의 아우라로 우린 모두 하나라는 묘한 소속감을 받는 곳이다. 

지구상 어느 도시가 이와 같을까. 하루에 수십명의 친구를 약속없이 마주치는 곳, 거리를 걷다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백프로인 곳, 바로 내가 사랑하는 축제도시 에든버러다.  




2020년 6월, 나는 서울에서 노트북을 켜고 반가운 친구의 얼굴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 우리는 페이스북 메신저로 다음날 영상통화를 할 시간을 정했다.

“내일 영국시간으로 오전 10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애. 메신저로 할까? 줌으로 할까? Tomorrow at 10am UK time would be great. Messenger or Zoom, what do you prefer?”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외 친구들과 소통할 때, 우리는 페이스북 메신저, 왓츠앱, 위챗, 그리고 구글 행아웃을 자주 사용한다. 예전엔 스카이프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소통 앱이 영상통화를 지원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페이스북 영상통화로 인사를 나누며 서로 잘 보일 수 있게 각도를 잡아갔다. 에든버러 근교에 사는 폴과 서울에 사는 나는 각자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다. 코로나 덕분에 집에서 하는 영상통화로 우리는 20년만에 처음으로 노트북을 들어 한바퀴 돌리며 각자의 서재를 소개했다. 

삼면이 하얀 벽과 하얀 문으로 둘러쌓인 폴의 서재는 키보드와 헤드폰,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지런히 정돈된 CD들과 일반 서적보다는 두툼한 업무용 파일들로 가득한 흰 책장, 조금은 사무적으로 보이는 업무용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의 서재는 쟝르가 다른 서적과 각종 공연과 축제의 프로그램북으로 알록달록한 4개의 우드 책장이 한쪽 벽면을 빼곡히 메우고, 길다란 우드 테이블과 짙은 밤색과 블랙으로 통일하지 않고 톤앤매너만 맞춘 가죽의자들, 앤틱한 스탠드와 각종 소품들이 오와 열을 맞추고 있다. 에든버러 근교라고 말했을때 느껴지는 따뜻한Cozy 이미지는 나의 서재에 더 잘 어울리고, 서울하면 떠오르는 도시의 이미지는 폴과 잘 맞는 듯 했다.       


언제나처럼 우리는 서로의 근황과 가족, 친구들의 안부를 묻고, 한국과 영국의 문화예술계 상황에 대해 서로 질문과 답을 번갈아 주고 받았다. 영국은 3월 락다운Lockdown이 시작된 이후부터 전국의 모든 공연장이 예외 없이 문을 닫았다고 했다. 한국은 확진자가 가장 많았던 3월에도 일부 공연은 예정된 공연일정을 한번의 취소도 없이 진행했다고 말하자 폴은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전체 일정 또는 일부 일정이 취소된 공연도 많지만 강제성은 없었기에 전국의 공연장이 한꺼번에 문을 닫는 일은 없었다고 부연 설명했다. 


친구들이 전해오는 소식과 뉴스로 이미 유럽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 폴의 얼굴을 보며 얘기를 들으니 그 심각성이 현실로 다가왔다. 2019년 여름, 우리는 올해 8월 에든버러 축제에서 진행할 특별한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었다. 축제와 도시, 공연장, 아티스트, 그리고 소수의 관객을 참여시켜 각자의 전문적인 혹은 객관적인 의견을 나누고 네트워크를 강화시킬 프로그램을 말이다. 

“그니까. 준비할 시간이 훨씬 많아졌네. 잘됐다. Well, we have more than enough time to prepare the programme now. Even better!” 

배려심 넘치고 다정다감한 폴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려 노력한다. 

요즘 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강하라Stay Healthy’는 말과 함께 나는 ‘내년 여름엔 꼭 만나자, 거기 레스토랑 내가 예약할께~’라고 말하며 영상통화를 마쳤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긴 일년이 지나 우리가 약속한 내년인 2021년 여름이 돌아왔지만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2021년은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가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추월했다는 기사와 함께 길어야 1년이면 끝나겠거니… 막연히 비자발적 퇴직상태의 데드라인을 잡았던 우리에게 터널의 끝이 어딘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공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2021년 우리는 다시 똑같은 약속을 반복했고, 2022년 3월 축제 조직위는 Full-Festival(팬데믹 이전의 축제)를 개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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