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와 스텝들이 이용하는 카페테리아텐트에는 점심, 저녁으로 바뀌는 메뉴와 밀향이 강한 독일맥주, 화이트와인, 레드와인, 스파클링 와인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한꺼번에 100명이상 식사할 수 있을 것 같은 큰 텐트에는 15명은 족히 앉을 만한 긴 목재 테이블과 4~5명이 앉기에 적당한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가 랜덤으로 놓여 있었다.
토우카는 매번 같은 음식을 담아왔다. 샐러드, 소시지, 빵.
그의 고향인 핀란드 탐페레에는 무스타마카라Mustamakkara라는 소시지가 있다고 했다. 돼지고기와 선지, 호밀을 섞어 내장을 채워 익히면 검은 색의 소시지가 된다고 하는데, 말을 듣다 보니 우리나라 ‘순대’가 떠올랐다.
이 소시지를 링곤밸리 잼과 같이 먹는다고 하니… 순대에 딸기잼을 발라먹는 느낌이랄까.
시도해 보고 싶지 않았다.
토우카와 달리 앙드레이는 잡식성이었다.
못 먹는 게 없어 보였고, 주는 대로 먹고 눈앞에 있는 대로 먹곤 했다. 식탐은 없는 그가 와인을 마실 때는 텐션이 달랐다. 천천히 향을 느끼고 한 모금 마신 뒤 과하지 않게 호로록 소리를 내며 음미한다.
나는 그를 유심히 관찰하며 와인을 입에 머금고 호로록 소리를 내보았다.
사래가 들렸다.
토우카는 연신 괜찮냐고 물어보며 테이블 위에 내가 뿜은 와인을 닦아냈고, 앙드레이는 어느새 물잔을 가져와 한 손으론 머리를 받치고 조금씩 물을 먹여주었다.
천천히 조금씩 삼켜 봐… Sip it slowly…
처음 하루이틀 낯가림을 하는 것처럼 말수가 적다고 느껴졌던 앙드레이는 말없이 필요한 걸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스위스계 엄마와 러시아계 아빠를 둔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유년기를 영국에서 보내고, 독일에서 연극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의 표정, 옷차림, 손짓 하나하나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의 편안함과 불안함, 자유로움과 외로움이 묻어 있었고, 나는 그의 묘한 단절감이 자주 마음에 걸렸다.
친구들은 언제나 나의 느린 식사 속도를 맞춰주었고, 식사 후에는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훌라, 포커, 블랙잭 등 카드게임을 하곤 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한국의 게임들, 특히 술자리 게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 중 ‘무언의 공공칠빵(Double Zero Seven이라고 불렀다)’은 인기가 많았다.
게임을 할 때마다 토우카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가운데 따라놓은 벌주(맥주)를 5번 연속으로 마시곤 했다. 악순환이었다. ‘걸리면 마시고, 마시면 취하고, 취하면 또 걸리고…’,
승부욕이 강한 나는 재미로 하는 게임에서도 웬만하면 걸리지 않으려 기를 썼지만, 빨간 얼굴로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토우카의 표정을 보고는 그만 소리내서 웃어버렸다.
나는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토우카에게 ‘너 때문이야. It’s your fault’라고 말하며 벌주를 들어올렸다.
입으로 가져가는 잔을 앙드레이가 가로챘다.
나는 웃음을 멈추고 벌주를 들이켜는 그를 바라보았다. 벌주인 맥주가 싫어서 안 걸린 건지,
나보다 승부욕이 강해서 게임 따위 절대 질 수 없다는 주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때까지 앙드레이는 게임에 한번도 걸리지 않았다.
파인트pint 잔을 가볍게 비운 그는 와인을 가져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게임을 하던 스텝들이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와인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 앙드레이는 갑자기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뮌헨에서 함께 하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걸 하나씩 적어보자고 말했다. 이미 수차례 뮌헨을 방문했던 둘은 이런저런 장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이 모든 게 한국동료를 위한 배려 넘치는 제안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고마운 마음과 술기운에 둘을 꼭 끌어안았다.
우리에겐(아니, 나에겐) 세번째 공연에 대한 징크스가 있었다.
긴장 가득한 첫 공연을 끝내고, 두번째 공연도 사고없이 마무리되면, 공연이 안정 궤도에 진입했다고 판단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면 꼭 사고가 발생했다.
우리의 요청으로 현지에서는 공연진행을 돕기 위해 상수stage left와 하수stage right에 각각 2명의 현지 무대크루를 배치해 주었다.
그 날도, 나와 극장 무대감독인 앙드레이는 공연 중 무대, 조명, 음향 큐를 날리기 위해 하수의 SM desk(무대감독 데스크)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 공연에는 공연 중 배우들이 자신이 사용하던 테이블을 각각 상수와 하수(Off-stage)로 밀고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 일반적인 프로시니엄 무대에 오프 스테이지가 넓은 공연장이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이 장면은 축제기간내내 텐트극장의 무대스텝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세번째 공연.
나는 다리막 끝선까지 다가가 배우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즈음, 배우들에겐 ‘실수로 자신의 칼에 찔리거나(혹은 베이거나)’, ‘실수로 옆사람을 찌르거나’ 하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고, 나는 배우들을 데리고 각 도시의 병원을 이미 여러 차례 방문한 상태였다.
숨죽이고 바라보던 장면이 끝나고 마음을 놓은 순간,
배우가 밀고 들어오는 테이블이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바퀴에 뭔가 끼었는지 방향을 바꾸지 못한 상태에서 가속이 붙었다.
짧은 찰나에 나는 고민했다.
내가 피한다면 다리막을 뚫고 객석으로 돌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 힘으로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순간, 테이블이 내 앞에서 멈춰 섰다.
아니, 테이블 한쪽이 공중에 들려 있었다.
앙드레이는 들고 있던 테이블을 크루 2명에게 넘기고 무대 뒤쪽으로 옮기도록 했다.
괜찮아? Are you OK?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가 물었다.
나는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시 무대에 눈을 고정시켰다.
잠시 옆에 서 있던 앙드레이는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 SM desk 앞에 앉혀 놓았다.
다음날부터 그는 내 머리에 '유선' 인터컴 헤드셋을 씌우고 SM desk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