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레지던스 뮤지엄, 뮌헨_Year 2000
예상치 못한 소나기가 내리던 수요일 오후,
우리는 비를 맞으며 알프스 북부에서 가장 큰 르네상스홀이 있다는 레지던스 뮤지엄Residence Museum으로 향했다. 앙드레이가 우리의 버킷리스트에 적어 넣은 곳이었다.
어깨동무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앙드레이와 토우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토우카는 더 편하게 해 주려는 듯 어깨를 살짝 움츠렸고,
앙드레이는 내 손을 잡아내려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웠다. 이렇게 하는 편이 높이의 밸런스가 맞았다.
언제부턴가 나도 유럽사람들처럼 갑작스레 내리는 비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맞고 다니게 되었다.
하루에 사계절을 경험할 수 있는 에든버러에서 예측할 수 없는 날씨에 단련된 나에게 독일의 날씨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젖은 머리를 장난스럽게 털어주며, 빨간 문의 박물관 입구로 들어섰다.
앙드레이가 화가이자 극작가이자 연출이라는 사실은 어느덧 기억의 한편에서 잊혀지고 있던 6월 중순이었다.
그날따라 그의 얼굴은 유난히 생기가 넘쳤고, 큐레이터를 자청한 그는 여느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서의 설명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었다.
어떤 화가가 몇년도에 어디에서 태어나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화풍에서 어떤 화풍으로 변해갔는지,
몇년도에는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고,
당시의 평가는 어땠고 등등 팩트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는 그림 속 인물들에게 직업, 나이, 성격 등 디테일한 캐릭터를 부여했고,
그 안에 펼쳐진 사건에 대해 입담좋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마치 거대한 동화책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카를의 기도서’ 앞에 선 그는,
실제로는 머리숱이 많았으나 태어났을 때 ‘영토를 받지 못했다’는 말이 ‘머리가 없다’로 와전되어 ‘대머리 왕’이라 불렸다는 불쌍한 카롤루스 2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 게오르그 조각상’ 앞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한 드래곤과 공주를 구한 게오르기우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졌다.
(TMI : 호수에서 독을 뿜으며 사람을 잡아먹는 나쁜 드래곤은 도시를 장악하고 왕에게 매일 두 마리의 양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도시에 있던 양은 금세 바닥이 났고, 왕은 어쩔 수 없이 산사람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다고 한다. 작은 도시에서 사람수는 금세 줄어들었고, 이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공주를 제물로 바쳐야 할 지경에 이른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게오르기우스가 드래곤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한다. 물론 그 대가로 모두를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켰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못 박혀 죽었다는 ‘십자가의 성물함’을 지나,
프레스코화가 벽면과 천정을 가득 채운 안티쿠아리움Antiquarium에 들어섰다.
앙드레이는 공연의 인터미션처럼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자고 했다.
60미터가 넘는 거대한 공간이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으니 온전히 자신의 감정에 집중해 보라는 배려 같았다.
우리 주변에 모여 있던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천천히 흩어졌다. 어느새 앙드레이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빗물이 남아 있는 젖은 핑크머리에 키가 큰 젊은 여자와 커플인지 친구인지 애매한 텐션으로 서 있는 모델 포스의 훈남,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귀여운 어린 소년과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누나, 그 옆에 함께 서 있던 금발의 아주머니가 미소를 띄며 말을 걸어왔다.
정말 잘하는데요… He’s really good. You know…
눈을 돌려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스스럼없이 일행이 된 사람들과 기분좋은 대화를 나눈다. 사랑하는 친구는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의 주인공이 된 것 같고, 나의 어깨와 입꼬리는 주책맞게 내려올 줄을 몰랐다.
배낭여행이 유행하던 90년대 초,
나는 시각예술에 대한 다소 박한(Not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도장깨기’를 하듯 박물관을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유럽에 가면 당연히 가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루브르박물관The Louvre, 바티칸박물관Musei Vatican,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 테이트모던Tate Modern Museum,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퐁피두센터Centre Geroges-Pompidou에서 ‘증명사진’을 찍었다.
수많은 세기의 명작들이 나의 오래된 앨범 속 어딘가에 남아 있겠지만 그 당시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나의 모든 경험은 이야기의 형태로 기억된다.
이야기가 없는 단편적 이미지는 기억의 다른 공간에 저장되는 것 같다.
기억나지 않는 형태로 말이다.
앙드레이와 함께 한 박물관에서의 추억은 나를 변화시켰다.
한국에 있을때면, 국내의 박물관, 미술관, 문학관, 아쿠아리움 등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컨텐츠 관련 컨설팅을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팅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이 공간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필요해요’이다.
입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아니 그곳을 방문하기 전부터 ‘꼭 가보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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