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기운을 빌려 한껏 들뜬 목소리로 애써 서운함을 감추며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지만, ‘오늘 이 자리가 마지막일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나는 적응이 빠른 편이다.
빠르게 현지화된 나의 일상이 내일이면 무너진다. 한달동안 매일 마주치던 얼굴들을 내일부터 보지 못한다. 불안인지, 슬픔인지, 집을 떠나올 때 경험한 온갖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꼴랑 한달 생활한 공간을 떠나면서 느끼다니…
우리 중 앙드레이가 가장 먼저 떠났다.
유럽 여름축제에서의 짧은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그는 이내 스위스, 영국 혹은 중국이나 북미로 훌쩍 떠나 작품을 구상하거나 글을 쓴다고 했다.
토우카와 나는 수면부족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을 한 채로 뮌헨 중앙역까지 배웅을 나갔다.
가는 동안, 우리는 공기중에 흩어질 내용없는 말들과 실없이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공기는 가벼워지지 않았고 누구도 웃지 않았다. 한여름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힐 것 같을 때마다 앙드레이는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플랫폼에 멈춰서자, 토우카는 앙드레이의 손을 잡고 입을 열었다.
“잘 지내고… 연락해야 해. Take a good care of you. Keep in touch. OK?”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긴 포옹을 나누던 토우카는 이내 멀찍히 떨어져서 시선을 피했다.
우리가 매일 나누던 비쥬는 그날따라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졌다.
왼쪽, 오른쪽, 왼쪽, 이제 그의 얼굴이 내 볼에서 떨어져야 하는데,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작은 울림처럼 들려왔다.
물어보고 싶었어. 만약에… I wanted to ask you if you want…
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고, 서서히 내 얼굴에서 멀어져 갔다.
입을 굳게 다문 채, 나의 눈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그날따라 더 진한 녹색이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로 기차가 곧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 듯 주변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앙드레이는 어깨에 메고 있던 화통을 내려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연출하는 공연의 포스터를 직접 그린다고 했고, 나는 그의 사진첩에서 본 포스터 중 하나를 유독 좋아했었다. 우리는 ‘Keep in touch’, ‘Take care’같은 일상적인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왠지 그 편이 앙드레이에게 어울렸다. 그는 꽤나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한국어로도 ‘이별’이라는 단어가 번쩍 떠오를 정도로 선명하게) ‘Good bye’라고 말했다.
앙드레이는 내 뒤로 물러서 있던 토우카에게 큰 손을 한번 들어 보이고는 빠르게 기차에 올라탔다. 군더더기없는 움직임이었다. 토우카가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연인의 이별도 아닌 이 이별이 뭐가 그리 절절한 건지,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토우카와 나는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앙드레이가 끝맺지 않은 문장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문맥상 “I wanted to ask you if you want to come with me”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 if you want me to stay’라는 문장으로 끝날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그가 문장을 끝맺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해, 독일공연에 연이어 잡혀 있던 7월 한달간의 영국투어와 8월에 참가하는 두번째 에든버러 축제, 그리고 가을부터 잡혀 있는 국내 지방공연까지. 난 일을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이유보다, 막내딸을 해외에 보내 놓고 밤잠 설치고 있을 엄마아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현실을 살아간다.
아쉬움 가득한 추억으로 남은 이야기는 나의 상상속에서 더 매력적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을까?
글쎄… 적어도 후회는 없다.
2000년의 뮌헨을 떠올리면... 젊음이, 손도 내밀지 못한 풋풋한 설렘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우리의 생이 ‘유한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가끔 초여름 저녁바람이 기분좋게 얼굴에 와 닿을 때면 6월의 달콤한 추억이 떠오른다.
운명은 타이밍이다.
누군가의 ‘운명’이 되려면, 각자가 계획한 인생의 스케줄 안에서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해야 한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 While you were sleeping’의 OST에 담긴
‘It’s you’라는 곡의 가사가 입가에 맴돈다.
‘Cause you’re the right time at the right mo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