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ise Chantal
관계는 함께 한 시간과 상호 신뢰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감으로 형성된다.
2005년 2월 서울, 늦은 저녁을 먹고 들어와 노트북을 열었다.
공연 관련 영문자료를 열어 놓고, 인터넷 전화를 들어 +005 44…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눌렀다.
“Hello, Young lady”
짧은 통화대기음 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Hi, Louise. How are you today?”
나는 매번 같은 인사말로 통화를 시작했다.
날씨에 대한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루이스의 고양이에 대한 안부를 묻고 나서야 우리는 사전에 협의하기로 했던 공연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상의한 얘기들을 윌리엄한테 얘기하고, 의견을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 놓을게. I’ll talk to William about this and send you an email confirmation right away.”라고 말하는 루이스에게, 나는 “그럼, 이메일 보고 내가 다시 전화할게”라고 답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이스의 애정 섞인 잔소리가 시작됐다.
아니, 아니… 기다리면 안 돼. 지금 바로 침대로 가라고.
일은 내일 해도 돼. 알겠지? 엔젤라, 잠 좀 자!
No, no… You don’t wait! Young lady, you need to go to bed now.
It can wait till tomorrow. OK? Angella, Go to bed!
전화기 너머로 루이스의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변태(?) 성향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녀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잊지 않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부를 물어왔다. 루이스가 어셈블리의 프로그래머로 함께 일했던 2005년과 2006년의 에든버러는 단지 그녀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향집을 방문하는 충만한 행복을 주었다.
2014년 6월,
우리는 세인트폴 성당 옆 루꼴레타Rucoletta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다.
당시 나는 런던특집행사추진단 단장으로 53회를 맞은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City of London Festival의 메인 테마인 ‘Seoul in the City’을 주관하고 있었고, 루이스는 2012년 런던올림픽의 문화 올림피아드Festival and Cultural Olympiad의 프로듀서 활동을 마치고 런던에 머물며 작품 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티 오브 런던 페스티벌의 축제위원장을 맡은 폴Paul Gudgin은 50년 역사의 클래식 음악축제를 종합공연예술축제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메인 공연인 ‘지휘자 정명훈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협연’은 기존의 방식대로 세인트폴 성당에 올리기로 했다. 덕분에 우리는 운 좋게도 아름다운 세인트폴 성당에서 미팅을 핑계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해가 긴 영국의 여름은 우리에게 나른한 햇살 속에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비울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여유로운 저녁시간만큼 우리의 수다도 길어졌다.
다음 주에 옥스퍼드 플레이하우스 공연장 인터뷰가 잡혔어…
I have an interview with Oxford playhouse next week…
루이스는 독립 프로듀서로 제작사를 10년 넘게 운영해 오고 있었다.
사이사이 국책사업에 참여하거나 공연장의 프로그래머로 일했지만, 불확실하고 간헐적인 단기 프로젝트성 일들을 진행하는 데에 많이 지쳐 있었다.
공연예술계의 환경은 영국이라고 더 나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빈익빈 부익부가 극명해지고, 민간의 독립제작사들은 로또 당첨 같은 ‘히트’공연이 나오지 않으면 메이저로 올라서기가 쉽지 않았다. 나 역시 10년 넘게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아직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지속적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었지만,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자 하는 루이스를 백 프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인터뷰는 진짜 못 보거든. I’m really bad at Interviews.”
이라고 말하며 의기소침해 있는 루이스에게, 나는
“너를 뽑지 않는다면 그 공연장만 손해지!
You’re more than qualified! If they don’t hire you, it’s their loss!”
라고 말하고는 식사와 함께 그녀가 좋아하는 레드와인을 주문했다.
루이스는 옥스퍼드에서 보낸 대학시절 얘기를 하며 눈을 빛냈다.
자신이 만들었다는 연극동아리 이야기, 공연장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다시 돌아가면 어떤 작품들을 라인업 하고 싶은지, 플레이하우스의 명성을 어떻게 이어갈지 등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2주 뒤, 우리는 같은 자리에 앉아 샴페인을 마셨다.
인터뷰를 잘 못 본다고 엄살을 부리던 루이스는 옥스퍼드 플레이하우스의 예술감독이자 CEO가 되었고,
런던의 집을 빠르게 정리한 뒤 한 달 만에 옥스퍼드에 안착했다.
2017년 7월,
나는 런던 코리안 페스티벌 공연을 마치고 옥스퍼드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루이스는 벌써 2년 넘게 옥스퍼드에 놀러 올 계획을 세우라고 다그치고 있었고, 8월 에든버러 축제에 가기 전이나, 축제가 끝나고 일주일쯤 시간을 낼 수 있지 않느냐고 구체적인 실행계획까지 세워 독촉하고 있었다.
변경되는 행사와 공연 일정 등으로 계획은 두 차례 불발되었고, 이대로 3년이 넘어버리면 진심으로 화를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우리 둘 모두에게 온전히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루이스에게 옥스퍼드의 집은 의미가 남달랐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 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곳이었고, 꽃을 사랑하는 그녀가 너무나 갖고 싶어 하던 ‘자신만의 정원’을 가꿀 수 있는 주택이었기 때문이다.
G층(한국의 1층)은 거실과 주방, 작은 서재로 분리되어 있었고,
1층(2층)은 침실과 욕실, 2층(3층)에도 넓은 침실과 욕실이 있었다.
주방의 뒷문과 연결되는 정원은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주는 비밀정원이었다.
옆집과 마주한 경계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울타리를 만들어 주었고,
유리 테이블과 철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작은 오솔길이 나 있는 기다란 정원의 중간에는 나무벤치가 놓여 있고,
주변엔 다양한 크기의 화분이 옹기종기 모여 각기 다른 색상의 꽃을 품고 있었다.
루이스는 꽃 이름을 하나하나 말해주었지만, 나는 어릴 적 엄마와 산책할 때와 똑같이 ‘아, 그렇구나’를 연발하면서도 이름을 기억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서울 사람인데도 꽃과 나무와 들풀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함께 산책할 때면 그녀는 늘 애정이 담긴 손길로 식물을 가리키며 이름을 불러주곤 했다.
루이스는 기차역에 마중 나오기 전에 이미 장을 봐 놓았다.
정원에서 직접 가꾼 꽃으로 식탁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고, 솜씨 좋게 만든 가든 샐러드, 연어 스테이크와 구운 야채, 페스토 파스타를 차례로 준비했다. 나는 그녀가 따라 준 와인을 마시며 식탁이 채워지는 걸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풀코스로 준비된 저녁식사는 그녀가 직접 구웠다는 파이 위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올린 디저트로 마무리되었다. ‘술을 줄여야 한다’는 말을 벌써 5년 넘게 하고 있는 루이스는 이미 2병째 와인을 오픈하고 있었다.
지난달에 엄마를 보러 갔었어. 의사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하네.
I went to see my mom last month.
The doctor said she doesn’t have much time…
내가 묵고 있는 1층의 게스트룸을 엄마가 지내기 편하게 리모델링할 계획이라고 했다.
89세의 엄마는 TV 보는 게 낙이고, 볼륨을 너무 크게 틀어놓기 때문에 자신은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며 와인을 들이켰다.
이제 자신의 삶은 없을 거라고… 그래도 엄마를 모셔오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뭐라도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무거워져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2010년 나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인생의 멘토인 엄마는 내 곁을 떠났다.
엄마는 나에게 ‘훨훨 날아가라’고 말하곤 했다.
엄마의 말에는 자신이 접었던 날개에 대한 아쉬움이,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어 늘 아팠다.
‘엄마 때는 다 그랬어’라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가정을 일구고 자식을 키우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한,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을 엄마가 생각나 그 희생이 늘 고맙고도 무거웠다.
엄마의 아낌없는 사랑과 지원으로 나는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탑재한 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때로 삶은 녹록지 않고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내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건 엄마가 바라던 인생을, 엄마가 응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책임감을 안고 살아간다.
뮤지컬 <서편제>의 넘버 ‘살다 보면’에는
‘… 돌아가신 엄마 말하길,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라는 가사가 있다.
우리네 엄마들의 삶이 그랬을 것 같아 더 서글픈 노래.
20대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다 보니 좋은 날도 슬픈 날도 있었지만
그렇게 살아지더라는 먹먹한 삶의 노래.
영국에서 4남매를 키운 ‘루이스 엄마의 삶도 우리 엄마와 다르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흔이 훌쩍 넘어서도 부모가 되지 않은 우리는 밤늦도록 엄마들의 인생에 대해, 그들의 사랑과 희생으로 자란 우리의 인생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취해갔다.
지극히 주관적인 우리의 생각에 엄마는 벌떡 일어나 ‘너희들을 키우는 게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었는지 알아? 얼마나 행복했는지?’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본인 좋아하는 일 한답시고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늘 해외로 나돌았던 딸들은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
그해 가을, 루이스는 리모델링을 마치고 엄마를 모셔왔다.
엄마와의 마지막 동거는 1년을 채우지 못했고, 2018년 8월 3일 루이스는 장례식을 준비해야 했다.
루이스의 엄마는 요크셔의 아름다운 공원묘지에 그녀의 엄마와 할머니 곁에 묻혔다. 영국의 공원묘지는 산책길처럼 동네의 가운데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1평 정도의 공간에 비석을 세울 수 있게 되어 있다.
장례를 마치고 2주 후, 나는 에든버러에 방문한 루이스를 데리고 죠지 스트리트George St.에 있는 더 돔The Dome으로 향했다. 이 아름다운 레스토랑은 중세시대 아테네 신전에 있을 법한 기둥 사이를 지나야 내부로 들어가는 정문이 나온다. 백합 향기 가득한 입구Foyer를 지나 메인룸으로 들어가면 지붕 위의 돔Dome으로 들어오는 신성한 빛에 기분이 정화되는 곳이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 루이스에게 잠깐이라도 숨 쉴 수 있는 시간과 맛있는 저녁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녀의 기분을 환기시키려, 올해 에든버러 분위기는 어떻고, 선정한 공연들은 어떤 반응을 얻고 있고, 올해 이슈가 되는 공연은 어떤 작품이고 등 두서없이 얘기를 해보았지만 루이스의 슬픈 눈은 자주 초점이 흐려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How can they do that?!
그녀는 평소 자주 언급하지 않던 자신의 언니와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긴 한숨과 함께 꺼내 놓았다.
셋째인 루이스는 그동안 엄마의 병원비와 생활비, 장례식 비용 등을 혼자서 책임지고 있었다. 병원에도 찾아오지 않던 그녀의 언니는 장례식이 끝나자, 엄마의 계좌에 남아있는 현금을 어떻게 나눌지 얘기를 하자고 했다고 한다. 오빠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그저 방관자처럼 언니의 얘기에 동의했다며 슬픔이 가득한 얼굴에 실망과 외로움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 묻어났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 상속 다툼은 만국 공통인 건지…
어른이지만 어른이 아닌 우리는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을 끌어안고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그리고는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주어야 할 가족이 각자의 다른 이해관계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며 영영 멀어지는 결정을 내린다.
나이가 들면서 가족관계는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누군가의 상식이 모두의 상식은 아니기에…
떨어져 산 시간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는 좁아져만 간다.
나는 같이 욕을 할 수도, 누군가를 두둔할 수도 없어서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움이었는지 서러움이었는지 한참을 울던 루이스는 꼭 잡고 있던 내 팔을 놓고,
나의 눈을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나도 그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 잃은 딸들만 알 수 있는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과 함께 켜켜이 쌓여가는 감정들로 그렇게 우리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가 되어간다.'
by 엔젤라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