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와 중독의 모호한 경계에서_Ep.3

#03. 네델란드 스키폴공항에는 카지노가 있었다_영국감기

by 엔젤라권

해를 보기 힘든 런던의 어느 겨울, 나는 심한 감기에 걸렸다.


밤이면 기침이 더욱 심해져 잠을 잘 수가 없었고, 낮에는 몽롱한 정신으로 미팅과 공연을 이어갔다.

초창기 ‘난타’의 해외 공연으로 유럽 도시의 병원을 대부분 경험해 본 나는 가능하면 병원엔 가지 않으려고 했다. 길고 긴 기다림 이후에 처방받는 건 똑같은 ‘진통제painkiller’일 경우가 많았다.

영국의 병원에 갈때마다, 군대에 가면 배가 아파도 빨간약, 머리가 아파도 빨간약을 줬다는 옛날 한국군대 얘기가 떠올랐다.

일주일을 뜬 눈으로 보낸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병원에 갔다.

의사는 ‘너의 몸이 기침을 하고 싶어 기침을 하는 것이니, 기침을 하게 놔둬라’ 라는 철학적인 말을 하며, 공연장과 펍Pub 등 먼지가 많은 곳에 가지 말라고 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런던에서 공연하는 2월 한달간 나의 체력은 바닥을 보였다.


3월 초 런던공연을 마치고 마드리드로 향했다.

스페인의 강렬한 햇살을 보는 순간 나의 몸은 그동안의 허기를 채우려는 듯 급하게 비타민D를 흡수했다.

태양의 힘인지, 스페인친구가 준 독한 감기약 덕분인지, 아니면 영국의사의 말대로 ‘하고 싶은 만큼의 기침을 모두 한 것인지’ 기침은 이틀만에 잦아들었고 공연도 순조롭게 올라갔다.


유럽투어를 오면서 사전에 조율해 놓은 일정대로, 나는 스페인 공연을 올려놓고 함부르크로 출발했다.

이듬해 초청공연을 진행하기로 한 공연장과의 미팅으로 1박2일의 짧은 출장이었다.

여느 때처럼 KLM항공은 스키폴공항에 멈췄다. 나는 트랜짓 시간동안 공항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는 남은 시간을 한적한 카지노에서 보내기로 했다.


주중 점심시간의 카지노는 생각보다 더 한적했다.

나는 룰렛 테이블에 앉아 아직 회복되지 않은 체력을 고려해 좋아하는 샴페인 대신 오렌지주스를 부탁했다.

주스와 함께 감기약을 먹고는, 이내 지갑을 꺼내 정해놓은 ‘게임머니’를 칩으로 바꿨다.

돌아가는 휠을 보는 나의 눈은 식후의 노곤함 때문인지, 퍼지기 시작한 약기운 탓인지 깜빡이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몇 분이 지났을까.

나는 ATM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몇번의 게임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독한 감기약 덕분에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머리는 사고를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손에 들고 있는 지갑과 신용카드를 보니 뭘 하려고 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스스로 세워놓은 규칙을 더 잘 지켜내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제어가 안되는 상황이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지갑을 가방에 넣고 서둘러 카지노를 나왔다.


그 후로 10년간 스키폴공항의 카지노는 나에게 ‘없는 공간’이었다. 스스로의 치부를 지우려는 듯 그렇게 철저히 무시(?)하며 시간이 흘렀다.


스키폴공항의 카지노는 적자로 2016년 문을 닫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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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젤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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