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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Aug 11. 2021

불고기 전골

'망필(亡Feel)'이 온다 해도 수습은 해야 하니까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팬이라 그의 작품을 서른 권 정도 가지고 있고 현재도 계속 모으는 중이다.

그의 소설 중에는 추리소설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같은 걸작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도 있다. 최근 나는 <프랑크푸르트행 승객>을 읽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일단 덮고, 다음에 마저 읽기로 했다. 작가의 정신 건강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종잡을 수 없이 산만하게 전개되는 초반부에서 강한 '망필(亡Feel)'이 왔기 때문이다.



일전에 만든 불고기도 그랬다. 같은 마트에서 같은 부위를 사 왔는데, 고기가 덜 좋았나 보다. 양념에 재울 때까지는 잘 몰랐는데, 굽다 보니 아주 미묘하게 저번 고기보다 두껍고 질기다.

이미 약 5 파운드(약 2.5 킬로그램)의 고기를 사 와서 쟀고, 당장 구워 먹을 분량만 빼고 나머지는 소분해서 반찬 하기 귀찮을 어느 날을 대비해 얼려 두려고 밀폐용기에 차곡차곡 나눠 담아 정리까지 한 후였기 때문에, 질긴 고기가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난감해졌다. ‘부지런한 오늘의 내가 게으른 언젠가의 나를 먹여 살릴 거야! 후후.’하고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망했다.

구울 때 가위로 최대한 잘게 잘라 밥 위에 얹어 덮밥으로 주긴 했는데, 아이들이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하긴, 내 입에도 별로였다. 아직 적어도 세 번은 더 먹을 분량이 남았는데 이걸 어쩐다.

수습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원래는 불고기 샌드위치도 아이들이 좋아하는데 이걸로는 안될 것 같고. 불고기를 활용할 수 있는 요리가 또 뭐가 있지?

그러다 불고기 전골이 떠올랐다. 애들이 좋아하는 당면이랑 떡도 넣고, 멸치 다시마 육수랑 같이 푹 끓여 전골로 만드는 것이다. 끓이는 방식으로 하면 굽는 것보다 고기도 좀 풀어져서 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


며칠 후, 별로였던 불고기를 다들 살짝 잊어갈 때쯤 만든 불고기 전골의 결과는 성공이었다. 평가가 어떨지 은근히 긴장되었는데, 아이들은 맛있다고 양손 엄지를 계속 치켜세우며 밥을 싹싹 비웠다. 하마터면 망할 뻔한 것을 수습해 내었다는 생각에 그냥 처음부터 불고기를 맛있게 만든 것보다 조금 더 으쓱해졌다. 으하하, 어디 자랑할 데 없나? 그래, 열심히 궁리하니까 방법이 나오는구나. 내가 생각해도 참 괜찮은 아이디어였어. 엣헴.



인터넷 영화 평이나 댓글란을 보면 가끔 "찍으면서 이 사람들은 망할 것을 몰랐던 걸까요?"라며 안타까워하는 글을 볼 수 있다. 만들면서 촉이 쎄하지 않았을까요? 왜 끝까지 만들고 개봉까지 한 걸까요?

나는 영화 제작 쪽 경험이 없어서 전혀 모르지만, 추측컨대 아마도 중간에 감이 오지 않을까 싶다. 회사에서 보고 자료를 만들다 보면 때로 아, 이건 들고 들어가면 100% 깨진다, 하는 촉이 오는 것처럼. 하지만 완성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시간 내에 최선을 다해 끝을 내야 한다. 그 결과물이 썩 마음에 들지 않게 될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할지라도, 중간에 “이거 보고 안 할래요.”하고 도망칠 수는 없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이다. 리셋(Reset) 버튼을 누른 것처럼 싹 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이번 생은 망했어요.”라고 하지만, 그 말을 하고 정말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최대한 수습해, 어찌 됐든 끝까지 걸어야 한다.

좋지 못한 고기가 걸린 것을 알아챈 지점에서 이미 양념한 불고기들을 싹 다 버려버리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다른 재료를 활용해 조금이라도 더 먹을만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양념한 불고기 따위도 포기하기에 아까운데,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은 얼마나 아까운가.



다시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는 <프랑크푸르트행 승객>을 끝까지 완성했다. 중간에 그가 집필을 때려치웠다면 오늘날 나는 그것을 읽지도 못했겠지만, 그는 그것을 완성했다. 트릭이 매우 꼼꼼하거나 반전의 전율이 있는 작품은 솔직히 아니지만, 나는 그래도 한 편이라도 그의 작품이 더 존재하는 편이 좋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 요즘은 이런 생각도 한다.

대(大) 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도 이런 조금 덜 좋은 작품을 쓸 때가 있는데, 내 글이 허접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어? 그래도 끝까지 집필을 포기하지 않고 완성하는 게 중요한 거야. 얼마 전 읽은 장강명 님의 <책 한 번 써봅시다>에 이런 말도 나오잖아.

...(전략) 무서워서 책을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분께는 세 가지 선택이 있다. 첫째, 책을 쓰지 않고 계속 후회하며 사는 것. 둘째, 졸작을 내고 후회하는 것. 셋째, 멋진 책을 쓰고 후회하지 않는 것.
물론 멋진 책을 쓰는 게 제일 좋다. 그리고 형편없는 작품을 내고 괜히 썼다며 후회하는 것과 책을 아예 쓰지 않고 후회하는 것, 둘 중에서는 졸작을 내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 졸작을 써도 실력과 경험이 쌓이고, '다음 책'이라는 기회가 또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 기회도 없다. (후략)

열심히 쓰다 보면 혹시 알아, 나도 대작을 쓰는 날이 있을지?


… 뭐, 불고기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 나도 퍽이나 산만한 글을 많이 쓰는 작가가 될 것 같지만 말이다.



음식을 두고 사진부터 찍으려 하면, 남편과 아이들은 거의 매번 “아…”하고 불만 가득한, 빨리 먹자는 신호를 보낸다. 그래도 보통은 꿋꿋이 사진을 찍는데, 불고기 전골 때는 맛 평가에 긴장한 나머지 나도 사진을 찍는 걸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헤더는 친구가 찍어준 식당 불고기 전골 사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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