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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Sep 09. 2021

생선찜

엄마라서 할 수 있게 된 것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들 중 하나이다. 물론 이것 외에도 싫어하는 말이 꽤 많지만.


나는 부모가 되어야만 어른이 된다거나, 애를 낳아봐야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다거나 하는 식의 말을 매우 싫어한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도 '꼰대' 같은 느낌이 드는 말이라 싫어했지만, 엄마가 된 지 한참인 지금도 싫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내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그 이유가 '엄마가 되어서', '엄마라서'라고 해석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 가장 크다. 나는 열다섯 살 때나 지금이나 만화책과 게임을 좋아하고 적당히 부지런하고 적당히 게으른 사람인데, 사고 싶은 것을 참거나 경제적 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나이가 들고 경제활동 인구가 되었으며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생겼기 때문이지 ‘엄마가 되어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든 안 되든 나는 이런 사람이 될 재질이었을 거라고, 나라는 인간의 본질은 나 자신 외에는 누구도 바꾸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임신과 출산은 내 인생에 가장 크고 불가역적인 변화 중 하나지만, '엄마'라는 정체성이 나라는 사람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리고 부모 중에도 특히 '모성애' 신비롭고 강력한 무언가처럼 표현하는  말은 질색팔색 한다. 빅토르 위고가 그러라고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성의 육아 노동에 정당한 대가와 인정을 부여하는 대신 "엄마니까 해야 하고 엄마만이   있는 거야."하고 넘겨 버리는 용도로 사용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생선찜을 하다, 내가 엄마가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있게 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아이가 오랜만에 병어찜이 먹고 싶다고 했다.

만 세 살 때까지 주 5일은 나의 부모님 댁에서 보낸 큰아이는 ‘아재 입맛’을 넘어 ‘할배 입맛’이다. 아침으로는 시리얼보다 죽이나 누룽지를 선호하고, 좋아하는 음식은 국밥류. 생당근, 데친 브로콜리나 무가당 요구르트를 간식으로 주어도 아주 잘 먹는, 도저히 21세기가 되고도 한참 후에 태어난 아이답지 않은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한국 갔을 때 할머니네에서 먹은, 넙적한 생선을 촉촉하게 요리한 것'이 갑자기 먹고 싶단다. 하아.


한인마트에서 병어를 팔긴 하지만, 냉동 병어만 판다. 즉, 내가 직접 비늘이나 지느러미, 내장을 다듬어야 한다는 뜻이다. 해동된 생선은 추가 비용을 내고 손질을 부탁할 수도 있지만, 병어는 인기 있거나 유명한(?) 생선이 아니라서인지 거의 매번 냉동만 있었다. 고등어도 아니고, 조기도 아니고, 왜 하필 꼭 집어 병어찜이어야 하는 것이냐, 아들아. 흑흑.

여하튼, "네가 사 먹어."라고도 "네가 해 먹어."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일단 병어를 사 왔다. 꽁꽁 언 특대 사이즈 병어를 냉장실에 며칠간 넣어두었다. 솔직히 병어가 영원히 안 녹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널 위해 병어를 사 왔어, 그런데 안 녹아서 손질을 못 하겠네. 어떡하지, ㅇㅇ아, 미안하지만 병어는 못 먹겠다-라고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당연히 병어는 녹았고, 생선을 다듬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병어의 지느러미와 꼬리를 떼고, 반으로 갈라 내장을 씻어내고, 마지막 단계로 병어 대가리를 다듬는 일이 남았다.


내가 즐겨 보는 <맛있는 녀석들>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네 명의 건장한 코미디언들이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프로그램인데, 그중 가장 덩치가 좋지만 가장 '초딩 입맛'을 가진 유민상 씨가 멸치볶음을 안 먹으려 하면서 말한다.

"얘(멸치)는 얼굴이 있잖아. 얼굴이 있는 건 난 못 먹어."


내 앞에 놓인 병어에도 얼굴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닭백숙을 해주기 위해 처음으로 생 '통닭'을 샀던 날의 기억은 너무도 강렬해서 지금도 생생하다. 그냥 다 요리된 백숙을 살 수도 있었지만, 내 손으로 만들어 먹여주고 싶어서 닭과 각종 재료들을 배달시켰는데, 퇴근 후 냉장고를 연 순간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건 뭐지. 내가 왜 그랬지.

손질되어 조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한 마리가 온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닭의 피부는 색깔도 느낌도 너무 사람의 그것 같았다. 왜 추울 때 피부에 '닭살이 돋는다'라고 하는지 알았다. 다리살만, 가슴살만 구매해서 요리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생경함. 나는 '육식'을 하고 있구나, 내가 먹는 것은 다른 '생명체'였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날이었다.

그래도 그 닭은 최소한 얼굴은 없었다. 생각보다 매우 긴 목이 붙어있어 히익, 하고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더 이상 자르거나 다듬을 필요도 없어서, 그냥 잘 씻어서 백숙을 맛있게 잘해 먹었다, 는 싱거운 결말.


그렇지만 병어 대가리 다듬기는 어나더 레벨로 느껴졌다. 눈을 감고 하고 싶었지만, 무게감 좋고 날카로운 칼을 손에 들고 그러는 건 위험하겠다 싶어서 그냥 눈 뜨고 잘랐다.

자른 대가리 부분도 버리지 않고 쪘는데, 생각보다 먹을 건 없었다. '어두육미'라던데, 병어는 글쎄다.

다행히 요리한 보람은 있어, 아이들 모두 맛있게 먹었다. 생각보다 생선 다듬기가 녹록지 않아서 당분간은 안 하려고 했는데, "또 해 주세요."라고 하는 큰아이의 말에 "그래, 주말에 한인마트 가서 한 마리 더 사 오자."라고 자동반사처럼 대답이 나갔다.


사실, 서른몇 살에 생선 대가리 다듬은 것 하나로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것도 우습긴 하다. 간혹 영화에서 슬로 모션이나 과장된 음향효과와 함께 생선을 척척 토막 낸 후 도마에 칼을 쾅, 하고 내리꽂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드라마틱할 것도 없는 일이다. 생선을 먹으려면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평범한 일.

하지만 단언컨대, 생선을 먹고자 하는 사람이 나나 남편이었다면, 냉동 생선을 사서 다듬는 것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당을 가든지, 최소한 이미 다듬어진 생선을 활용하는 메뉴로 변경했을 것이다. 내 인생에서 생선 대가리를 다듬은 일 하나만큼은 '엄마라서 한 일'의 항목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가 아니라 "앤지는 생선 대가리에 약하다, 그러나 엄마가 된 앤지는 강하다." 정도라면 뭐, 질색팔색 하지 않고 인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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