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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김 Feb 12. 2024

자퇴를 3번 하고도 학생입니다.

학교 밖 청소년이 두 번째 대학의 휴학생이 되기까지


나의 첫 자퇴는 중학생이 되어야 할 열네 살의 2월. 작은 초등학교의 졸업생 중 중학교를 입학하기도 전에 자퇴하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중등 교육까지는 나라에서 하는 의무 교육이라 입학 절차 후 따로 자퇴 의사를 밝혀야 하는 복잡한 구조였음에도 내가 자퇴를 할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의 의지였다. 부모님의 뜻대로 언니를 따라 대안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나는 별 불평 없이 진학해야 하는 중학교를 찾아가 자퇴 신청서를 제출했다.


대안 학교 생활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정규 학교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교복을 입고 아홉 시 전 아침 조회를 하며 점심시간 전까진 1교시부터 4교시를, 점심시간 후에는 오후 수업을 했다. 또 점심시간엔 급식을 먹고 큰 운동장 흙바닥을 뱅뱅 돌곤 했으니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생활과 예상했던 중학교 생활을 완벽히 합친 생활이었다. 그렇지만 그 남은 생활에 적응하고 싶지 않아 그마저도 중퇴했다.


열다섯 여름부터 나는 대안 학교조차 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숨겨왔던 불면증이 심해지고 우울함은 갈수록 늘어갔다. 방 안에 틀어박혀 집 안 가족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으며 낮밤이 바뀐 생활을 한 달여간 지속하던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에겐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나 같은 사람,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으로 분류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나도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 의무감으로 중등 검정고시를 혼자 공부해 합격증을 받았다.


남은 시간엔 필름 카메라를 구해 사진을 찍고 을지로에 가서 필름을 현상했다.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고 전시관을 다니고 서울의 여기저기를 걷고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슬며시 이런 나를 세상 속에 던져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 고등학교 진학 신청을 했다. 지금의 경험을 가진 나라면 좀 다른 선택을 했겠지만 당시 얄팍한 내 경험과 주변 환경은 별 다른 아이디어가 없었다. 학교를 배정받고 교복을 맞추면서 설렘도 가득했지만 과연 이 길이 맞는 걸까, 의문도 많이 들었다. 진학 후 한 달쯤 다녔을까, 나는 마지막 교복을 벗었다.


내가 교복을 벗은 결정적인 이유는 아팠기 때문이다.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새내기들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강압적인 선생님들과 서로를 탐색하다 자신의 무리로 만들기에 바쁜 학생들에게 신물이 났지만 그 정도에 그쳤다면 난 쉽게 학교를 관두진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부적응자인 나를 타인으로 바라봤고 난 그 시선 역시 신물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의 몸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낮에는 배가 아팠고 새벽에는 속을 게워내느라 바빴다. 학교 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간 내 모습에 기대에 부풀어있던 부모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또다시 남은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가끔 아버지의 출장도 따라다녔다. 나는 아무래도 내 일상을 직접 선택해 꾸려나가는 게 즐거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무렵 안 하던 sns도 시작했다. 온라인 세상엔 멋진 공간과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중 하나이고 싶어졌다.


원래 대학을 갈 생각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공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잘 느끼고 공간 분석을 즐겨하시던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나는 물리적인 공간을 다루는 일이 하고 싶어졌다.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면 전공이 건축이 아니라면 난 대학을 뭣하러 갈까, 상상하던 내 모습이 있다. 또래 친구들도 전부 대학을 보며 달려가니 시기도 나쁘지 않겠다, 홀로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학원의 도움 없이 주변 소개를 받아 과외를 받았다. 과외 선생님은 전에 다니던 대안 학교에서 말을 붙여본 적도 없는 3학년 위 선배였다. 입시 과외 경험이 있는 분은 아니셨지만 고등 검정고시를 거쳐 대입에 성공한 본인의 경험만으로 나를 가르쳐주셨다. 그즈음 처음으로 나 스스로를 인복 있는 사람으로 느끼게 되었다.

입시 준비 일여 년 만에 수능을 보고 학교 접수를 하고 합격 발표가 몇 번 나고 그중에 학교를 고르는 시간이 정말 화살처럼 지나갔다. 만족하던 1 지망의 학교는 아니었지만 준비해 온 햇수도 짧고 내 성적과 들인 품에 비해 참 운이 좋다고 여겼다.


무슨 바람이 들었던 걸까. 나는 어느새 다음 입시, 반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시작한 피자집 아르바이트와 학교 생활, 입시 준비를 함께했다. 낮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엔 피자를 만들고 밤엔 입시를 준비하거나 모형을 만들고 과제를 했다. 쉽지 않은 일정들의 연속이었다. 만약 그때의 입시에 합격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좌절을 안고 살아갔을까. 일 년의 노력 끝에 합격 소식이 날아왔다. 엄마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셨다.



내가 다시 학교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난 늘 배움에 굶주린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무언갈 배우며 살아가야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학교는 내게 좌절감과 실망도 많이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배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 배움이 가장 큰 인생의 동력이기 때문이다. 우린 늘 변화하고 그 변화가 자연스러운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유의미한 것임을 자각하기 위해 나는 적는다. 기록하고 회고한다.


내가 또 다시 학교를 떠나도 그 변화는 유의미할 것임을 오늘의 기록을 통해 예상해본다. 나는 변화를 번복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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