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말 수가 적은 나를 깊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지난주의 금요일 오후, 애인을 향해 편지 한 통을 날려 보냈다. 작년 늦가을쯤이었던가- 우리는 <주간 편지>라는 이름으로 매주 일요일 16시에 맞추어 서로를 향해 편지를 보내는 일을 기획했었다. 우리가 편지 작성에 능숙한 편은 아니어도 같은 땅 덩이 안에서도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우리 사이에 작은 소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된 일이다. 그러나 나약한 나는 금세 하루 이틀씩 연체하게 되었고, 지난 늦겨울 크게 앓은 후로 마주 볼 날들이 잦아지면서 우리의 <주간 편지>의 숨은 끊어진 듯했다. 더는 괜히 메일함을 뒤적거리며 맘 상해하던 애인은 없었고 매일 밤 함께 이부자리에 눕는 우리의 웃음보는 늘었지만 내 개인용 클라우드서비스 안에서 나오지 못한 편지들이 자꾸만 밟혔다. 어여쁜 말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차마 보내지 못했던 편지들을 가끔 들여다보면 그 글자들 속 담긴 마음이 불쌍했다.
애인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다는 마음은 못된 심보는 아니지만 헛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헛된 마음은 어떤 모습이든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과거의 상처들을 결합하여 불가능한 이상을 꿈꾸는 마음이 아닐까? 스스로 나는 그 마음을 허황된 꿈이라고 정의하며 나아가는 발전이 없는 무의미한 행위라고 규제했지만 그럼에도 내 편지함에는 부치지 못한 글들이 잠들어 있었고,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 환히 날아갈 마음들이 불안함과 동시에 자유하지 못해 엉겨 붙고만 그들의 해방을 응원해 오던 나는 커다란 결심 없이 자연스레 놓아주었다.
되돌아보면 마음을 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난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과 그를 앎에도 매일 자책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 역시 잘 알고 있다. ‘말을 할까-말까- 할 때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신조를 가진 -말하기를 좋아하는- 애인의 자책을 들을 땐 늘 내겐 해당되지 않는 조언이라고 생각하며 애인과 나를 위로한다.
난 어려서부터 속내를 표현하기보다 사실만을 읊는 아이였다고 한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는 어머니 뒤편에서 조잘조잘 이야기는 곧잘 나누지만 막상 들어보면 스스로의 생각이나 감정은 배제된 이야기였다고- 학교 숙제로 일기를 적어도 어린 마음은 드러나는 일이 없고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정리된 보고서 같은 글들이었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로 내 표현들은 더 죽어갔던 것 같다. 마음은 표현하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기준으로 주변인들을 들이고 내쫓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그 사람의 특정한 모습이 싫었다기보다- 상대의 모습에 무반응으로 반응하는 내 모습들이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애인은 말 수가 적은 나의 표현을 깊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난 애인의 언변을 즐거워한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의 다름을 체감하는데 이처럼 기쁨이 가득한 적이 있었나-싶다. 성장하고 있음을 뼈가 저릿한 것 마냥 깊이 느끼고 그 성장통이 아픔으로 다가오기보다 즐거움이 되어 돌아오는 이 시간이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