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절정을 알리는 꽃을 하나만 말하라면, 당연히 벚꽃을 말한다. 벚꽃은 며칠간 눈이 부시게 화사하게 뿜어내고는 이내 사르르 꽃비 되어 내린다. 개화의 화려함 못지않게 낙화의 유수도 벅차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벚꽃을 유난히 좋아했는데, 바람에 주저함 없이 흩어지는 낙화가 주군에 대한 충성심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벚꽃을 좋아한다. 개화와 낙화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내가 특별히 벚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는, 섭리와 조금은 다른 순서 때문이다. 왠지 특별하다고 할까?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푸른 새싹의 봄을 알리기 위해 일생일대의 화려한 전야제를 펼치는 그 무모함이 멋지다.
아들이 태어나던 해에 살던 아파트는 단지 내에 벚나무가 많아 봄이면 벚꽃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 인근 주민들이 벚꽃놀이를 하러 일부러 찾아올 만큼 꽤나 유명한 벚꽃 명소였다. 아들은 바로 옆 동에 있는 어린이 집에 다녔는데, 돌이 얼마 지나지 않은 아이의 걸음으로 가면 5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아들이 어린이 집을 가기 시작한 해부터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해졌다. 아들에게 벚꽃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벚꽃이 만개할 시기에 비바람까지 제법 세차게 몰아쳐서 ‘올해 벚꽃은 예쁘다는 말 한마디 못 듣고 가버리는구나…’ 하고 많이 안타까워했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치고 며칠이 지난날의 아침이다. 오래간만에 쾌청한 볕이 들어 아들과 등원하기 전에 산책을 나갔다. 집을 나서고 걷는 내내, 아들은 주변을 살피고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 나온 후, 자기 발로 딛고 서서 걷는 첫 봄날이니 세상의 모든 것이 얼마나 신기했을까. 나무, 벽돌, 심지어는 아스팔트 바닥에 닿는 제 발이 좋은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였다. 그런 아들을 두어 걸음 앞서서 걷게 하고, 벅차게 귀여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갑자기 아들이 걸음을 멈추더니 바닥을 바라보고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뒤에 서서 아들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다가 ‘무엇을 보는 걸까?’ 하는 호기심이 동하여 아들에게 다가가, “무얼 그렇게 바라보고 있어?” 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들은 새싹 같은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가리키며 “꼬, 꼬…” 하고 답하였다. 아들이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벚꽃 잎 하나가 바닥에 홀로 떨어져 있었다.
아침이면 경비원분들이 간 밤에 떨어진 꽃잎이며 낙엽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한 곳으로 모아 놓곤 했다. 그중 꽃잎 하나가 그 무리에 미처 끼지 못하고 혼자 남겨져 있었다. 평소에 아들에게 꽃 이야기를 많이 해주어서 인지 꽃만 보면 반가워하는 아들이었기에, 꽃잎이 많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키며 꽃이 저기에 많이 있다고 저기로 보러 가자고 말을 했다. 그러자 아들은 내가 가리키는 쪽을 한 번 쓱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바닥의 꽃잎을 바라보며 “꼬, 꼬…”라는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꽃이구나. 나무와 줄기에 매달려 만개했을 때에만 꽃을 예쁘다고 말하고, 시들어 떨어져 버리면 바라보지 않는 어른들과 다르게 아들은 꽃의 모든 순간을 똑같이 바라보고 있구나’.
우리는 대부분 단편적인 모습만을 기억한다. 일시적인 모습만으로 그 본질을 판단하기도 한다. 내가 보고 느꼈던 그 찰나의 모습만으로 ‘그건 그런 거야’, ‘그 사람은 그런 부류야’ 하고 단정 지어 버린다. 많은 것들이 내가 처한 상황이나 입장, 위치에 의해 판단되고 그러면서 본질은 잊히는 경우가 많다.
눈은 항상 열려있고, 귀도, 코도 항상 열려있는데, 마음과 기억은 왜 그렇지 않은 걸까. ‘하나를 보더라도 전체를 생각하고, 찰나를 보더라도 일생을 바라봐주자.’ 아들이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육아(育兒)는 육아(育我)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성숙해간다. 이렇게 아들을 통해 하나 더 배워간다. 꽃잎을 바라보는 아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괜찮아. 떨어졌지만, 넌 여전히 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