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조심성이 많은 편이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신기한 물건을 보거나 호기심이 생기는 물건을 발견하면 무작정 달려들지 않고, 일단 조용히 바라본다. 그리고 서서히 다가가 살며시 만져본다. 그다음에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좀 더 지켜보다 다른 아이들처럼 만지고, 던져보기도 한다. 일단 잡은 장난감은 쉽게 버리지 않고, 움켜쥐고 꽤 오랫동안 가지고 다닌다. 꼭 양손에 하나씩은 쥐고 있어야 적성이 풀리는 아들이다.
처음에는 이런 아들의 모습이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내아이가 왜 이리 소극적인지, '이러다 다른 아이들에게 다 뺏기는 건 아닌지, 좀 더 용감해도 좋을 텐데...' 이런 조바심들로 속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는 조금 다르게 말했다. '겁이 많은 게 아니라 조심성이 많은 것이고, 소극적인 게 아니라 신중한 성격이에요. 그리고 난 저런 아들의 성격이 좋아요'. 역시 아내는 나보다 넓고 깊다. 용감하고 적극적이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소극적'이란 말에 꽤 민감하셨다. 나를 보며 '손들고 앞장서라', '더 크게 말해라'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를 웅변학원도 보내셨다. 당시에 학습의 결과는 실패라고 생각한다. 웅변학원을 다녔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이런 말을 못 했다. 웅변대회에 나간 사진이 있는데, 내 표정은 두려움과 하기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렇게 초등학교 동안은 다소 소극적인 아이였었다. 우리 세대의 많은 부모님들이 그러하듯, 우리 부모님도 남자다움을 굉장히 강조하셨다. 그래서, 남자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 앞에 나서고,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맘 속에도 굳게 자리를 잡았다.
솔직히 저런 성격은 좋은 성격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은 요즘 말로 '핵인싸'가 될 수 있고, 무리를 이끄는 리더의 자질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가 다 저런 성격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 아이가 저런 성격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성격을 인정하는 것이다. 부모의 기준으로 성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의 기질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우리 아들처럼 신중하고, 감정적으로 예민한 아이에게 부모가 적극적인 성격을 강요하는 것은 아이에게 굉장한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겠지만, 본연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이 많아질 수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지금 이루고자 하는 바가 진정 자기가 원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본인의 모습에 고민하는 날이 분명 올 것이다.
물론 기질과 무관하게 누구나 그런 고민을 한다. 스스로 선택한 길에 대해서, 추구하는 행복에 대해서, 그리고 존재에 대해서.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기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서른이 넘어서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마흔이 된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지금의 나를 인정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긴 했지만, 솔직히 아직도 고민하고 갈등한다. 나는 아들이 나보다는 이른 나이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그보다 더 깊이 있게 했으면 한다. 그러면 나보다는 훨씬 단단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의 기질과 마음을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먼저 해보라고, 권유하거나 재촉하지 않고, 가능하면 혼자 할 수 있도록 두어 발짝 뒤에서 바라보며 기다리려 노력한다.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만이 아들을 인정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에게 스스로를 인정받은 아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갖게 되고 자라서 이는 자존감 형성에 큰 도움이 된다. 자존감을 가진 아이들은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가 수월하다. 또, '회복탄력성' 이 강하다. 자신을 믿고 아낄 수 있기에 회복이 빨라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이겨내고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게 쉽다. 돈이나 명예, 세속적인 성공의 문제가 아니라, 행복의 문제이다.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부모의 인정은 매우 중요하다.
전에 어디서 봤는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북유럽의 육아와 한국의 육아를 비교한 기사가 있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북유럽의 부모에 비해 한국의 부모는 주변의 정보과 이야기에 육아관이 쉽게 흔들리고 바뀐다고 했다. 이는 한국의 부모들이 스스로 하고 있는 육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물론 '확신'을 갖기에 육아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렵다. 나도 아빠가 처음이라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그래도 고민하면서 하나씩 원칙을 세워가고 있다. 첫 번째는 '아이도 인격체이다', 두 번째는 '아이의 그대로를 인정하고 사랑하자' 입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을 세우는 데에만 3년이 걸렸다. 아직도 스스로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지만, 그래도 꾸준히 노력 중이다. 이런 노력을 해도 아들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단단한 아빠로 자랄 거라는 확신은 있다.
육아를 하면서 오늘도 하나 더 배우고, 한 뼘 더 자란다. 육아(育兒)는 육아(育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