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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명 Dec 11. 2015

노인과 바다, 쿠바 코히마르

  요안나 아줌마의 아침식사는 신선한 망고와 오렌지 주스, 빵과 계란 프라이였다. 조촐하지만 정갈한 식사를 감사히 먹었다. 

  아줌마는 식사를 마친 우리에게 파일을 하나 내밀어 주었는데 이곳을 다녀간 한국인들이 남긴 여행정보였다. 원래 호아키나라는 분의 까사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유명한데 발 넓고 정보력 좋은 아줌마의 영향도 있고 한국인들이 남기고 간 'red book', 지금은 분실되고 'blue book'이 다시 생겼다고는 하지만, 하여튼 그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곳이라서 더 유명하기도 하다. 
  요안나 아줌마도 그 사실을 아시는지 그 정보집을 복사해온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최근에 이곳에 오래 머문 여자분의 꼼꼼한 정보까지 더해져 있었다. 워낙 여행자가 적고 보통의 관광지와는 다른 점이 많아서 정보집을 훑어볼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방에 틀어박혀 정보집을 꼼꼼히 살펴보고 필요한 부분은 사진으로 남겨놓았다. 

  거기에 적힌 대로 재즈 공연과 룸바 공연을 보려면, 올드카 택시를 타 보려면 돈이 더 필요했다. 게다가 시장에서 본 너무나 마음에 든 목각 장식품을 살 돈도 필요했다. 
  짐을 챙겨 들고 다시 오비스포 거리의 환전소를 찾았다. 이번에는 ATM이 있는 카데카로 갔는데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역시 나 혼자 들어가 출금을 하려고 카드를 넣었다. 그런데 출금이 되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카드 두 개 모두 불가 표시만 떴다. 어제 들렀던 카데카를 다시 찾아 사람에게 직접 카드를 내밀어 시도해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환전소 직원은 더 큰 환전소로 가보라고 안내해주었는데 알려준 곳은 처음 들른 그곳이었다. ATM이 있는 곳 옆의 문 뒤로 큰 환전소 사무실이 있었다. 순서를 기다려 안내받은 창구의 직원은 내 카드를 보자마자 손을 저었다. 미국계 기업인 씨티 City 카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쿠바 어디서도 사용할 수 없다며 손가락을 옆으로 까딱였다. 
  그래... 누군가의 여행 후기에서 분명히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고 했다. 나는 '되기도 한다.'에만 관심을 두었었나 보다. 미국과의 수교가 열렸으니 문제 되지 않을거라고도 생각했었나 보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에 들고 온 캐나다달러면 넉넉히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카드를 쓸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와서 보니 하고 싶은 것이 많아졌고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쿡이 필요한 것이 문제였다. 쿱, 모네다로만 생활한다면 굶지 않고는 지낼 수 있었다. 80원짜리 조각피자와 얼음 든 주스를 파는 곳이 널려있으니 어려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거리만 좀 돌아다니고 말아야 했다. 제대로 된 모네다, 쿱 식당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일단 칸쿤에서 쓰려고 남겨둔 75달러를 모두 바꿔 64 쿡 정도를 더 손에 쥐었다. 나는 더운 날씨에 환전소를 전전하고 안 되는 돈 계산을 한다고 머리를 쓴 탓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모든 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 마음까지 샐쭉해져서는 공원에 주저앉아버렸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괜히 처량해진 기분마저 들었다. 남편은 나를 다독여 일으켜 세우고는 앞장서서 길을 나섰다. 여태껏 늘 뒤에서 지켜만 보던 사람이 팔을 걷고 나서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일단 싸구려 조각피자와 코코넛 아이스크림으로 코히마르 cojimar까지 갈 양분만 보충을 했다. 


  

  돈이 부족해 택시를 탈 수 없게 되었으니 버스를 타야겠다며 남편이 여행 안내소를 찾아들어갔다. 안내소 직원은 400번 버스를 타라고 알려주었고 정류장은 까삐똘리오 앞 어디쯤이라고만 말해주었다. 지도를 보여주기는 했으나 줄 수는 없다고 했다. 버스 시간을 물어보니 '누가 알아?! Who knows?!'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쿠바의 버스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직원이 알려준 위치에 버스정류장이 있기는 했지만 400번이 서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편은 수첩에 '400'을 크게 적고 물어물어 정류장을 찾았다. 기차역 주변까지 맴돌다 지쳐서 공원에 앉아 잠시 쉬었다. 


  

  어느새 땀범벅이 된 남편이 진한 색깔이 도는 주스를 한 컵 사들고 오며 소리 내어 웃었다. 주스를 파는 할아버지에게 주스 한 컵이 얼마인지 물으니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다가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손가락 하나를 더 피더란다. 1 쿱이면 고작  40원쯤 되는 돈인데 쿠바의 할아버지를 유혹에 빠트리기엔 충분한 금액이었나 보다. 금전의 유혹에 넘어간 할아버지의 그 순진하게 음흉한 표정이 너무 귀여우셨다며 남편은 한참을 더 웃었다.

자그마치 1 쿱이나 바가지를 씌운 주스 파는 할아버지


  우리는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물어물어 허름한 건물의 기둥에 버스 그림과 '400'이 적힌 판이 붙어있는 것을 찾아내었다. 버스정류장에는 원색의 민소매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청년 셋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봉지에서 술병을 꺼내 권했다. 남편이 잠시 머뭇거리니 이상한 것이 아니라며 자기들이 한 모금 씩 마시고는 다시 내밀었다. 러시아의 보드카가 어찌하여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청년들은 엄지를 쳐들며 다시 한번 눈썹을 찡긋했다. 결국 남편은 손에 쥐고 있던 빈 주스컵에 술을 받아 들었다. 
  술을 한 잔 마시는 동안 버스가 왔다. 먼저 탄 청년들이 하는 대로 2 쿱의 차비를 내고 자리에 앉았는데 한 정거장을 가더니 기사가 모두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종점에 다 왔으니 길을 건너 다시 타란다. 
  "뭐라는 거야?!"
  청년들도 황당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내려놓은 버스는 길을 돌아 기차역 건너편 정류장 앞에 차를 대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리고 차장 같은 사람에게 흰색 표 같은 것을 내고 타고 있었다. 버스 문간에 서 있는 기사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내니 그 줄의 뒤에 가서 서란다. 그런데 표를 쥔 사람들과 표를 받는 사람들이 뭔가 언쟁을 하는 사이 반대편으로 늘어져있던 다른 줄의 사람들이 우르르 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뭐지?" 
  우리도 일단 그 줄의 뒤로 뛰어가서 버스에 올랐다. 어이없게도 다시 2 쿱을 내야 했지만 80원을 두고 따질 일은 아니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우리는 버스에 올랐고 표를 쥐고 실랑이를 하던 사람들은 오르지 못했다. 청년들은 버스에 성공적으로 탑승한 우리에게 잘했다며 박수를 쳐주었다. '흠! 이 정도쯤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여 대꾸했다. 
  쿠바 사람들과 땀으로 끈끈해진 맨 살을 비비는 사이 버스는 달렸다. 
  창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사람들 틈에 끼어 버스 기사 가까이로 물어보러 갈 수도 없어서 구글 지도의 이동 방향을 보고 내릴 곳을 가늠했다. 코히마르에 이르기 전에 한 번 정차를 했는데 마을과는 조금 멀어 보였다.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리기로 하고 지도를 주시했는데... 한 정거장이 왜 그렇게 먼지... 결국은 코히마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버스가 섰다.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 상으로는 2~3km만 걸으면 될 것 같았다. 
  까미노 때문이었다. 
  까미노를 걷지 않았다면 이 정도 거리는 당연히, 어떻게 해서든 차를 타야 하는 거리였다. 하지만 까미노 이후로 5km 이내는 걸을 수 있는 거리가 되어버렸다. 사서 고생하는 버릇이 들어버렸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린 지 두 시간만에 코히마르 마을에 들어갔다. 물론 중간에 시장도 구경하고 주먹싸움도 구경했다. 또 한참 동안은 거리에 앉아 지나가는 올드카들도 구경했다. 야자수를 배경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우리는 그렇게 느리게, 천천히 마을로 다가갔다. 
  코히마르는 헤밍웨이가 쿠바에 이십 년간 살면서 낚시를 즐기던 마을이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했다. 소설 속의 노인 푸엔테스 Fuentes가 살았던 그 마을이었다. 
  '노인과 바다'. 
  초등학생 때 멋모르고 꺼내 들었다가 노인이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 시간만큼, 물고기를 배 옆구리에 동여 메고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시간만큼 오래 걸려서 겨우 다 읽은 책이었다. 내용을 다 이해하고 공감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런데 한 번 읽기 시작했으니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한 줄 한 줄씩, 읽고 또 읽어 결국 마지막 장을 덮고야 말았었다. 노인이 기진맥진해 마을에 당도했을 때처럼 말이다. 
  '아.. 이제 끝났다..' 
  그런 이유로 '노인과 바다'는 나에게 특별한 소설이었다. 
  우습게도 오늘의 길이 또 그랬다. 
  한 발 한 발 찻길을 따라 걸으며 마을로 가까워졌다. 덥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제 마을이 어떤 곳이어도 상관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보이고 건물이 나타났다. 
  다 왔다...
  그것이 전부였다. 
  우습게도 우리가 마을 입구로 들어서고 있을 때 젊은 마을 사람들이 낚시를 나섰다 돌아오는 길인지 다랑어 한 마리를 들고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다행히 노인 산티아고 Santiago의 그것과 달리 살이 온전히 붙어있는 그대로였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는 나의 요청에 사람들은 신이 나서 물고기를 싸고 있던 비닐까지 벗겨 높이 들어주었다. 



  소설 속의 노인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신이 나서 보여주고 싶었겠지... 유일한 친구였던 소년 마놀린 Manolin이 나처럼 호들갑스럽게 감탄하며 박수를 쳐주었다면 좋았을텐데...

  거리의 한 갤러리 앞에는 헤밍웨이와 노인이 커다란 청새치를 그렇게 들고 웃고 있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찾아 헤맬 것도 없이 우리가 걷던 길 위에 '라 테라자 La terraza'가 있었다. 이곳은 정말로 헤밍웨이의 집과도 같은 곳이었으리라. 
  레스토랑의 곳곳에는 헤밍웨이의 흑백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모티브가 된 노인 푸엔테스가 시가 cigar를 물고 먼 곳을 응시하는 사진도 있었다. 일렁이는 노인의 눈빛이 바다를 닮아있었다. 


라 테라자 La terraza 앞 거리


  아무도 없는 빈 홀은 오래된 TV에서 흘러나오는 야구 중계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노인이 동경하던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Joe DiMaggio는 없지만 말이다.   

  이곳은 오래전, 헤밍웨이가 살던 그때, '노인'과 함께였던 그때에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우리는 오래도록 그곳에 머무르며 바다를 보았다. 


헤밍웨이를 사랑한 코히마르 사람들이 배의 닻을 녹여 만들어주었다는 흉상. 바다를 향한 그는 아마도 사자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을까...


  동네 주민이 친절하게 알려준 덕에 58번 버스를 타고 아바나 시내로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노선을 몰라 구글 지도를 지켜보다가 가장 가까운 곳에 내렸다. 

  산 라자로 San lazaro거리에 내려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힘찬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과 나는 격렬한 음악소리를 따라 한 건물 앞에 이르렀다. 가정집처럼 보이는 건물 안에서 세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고 아주머니 한 분과 남자 한 명이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가 기웃거리니 집 입구에 서 있던 사람들이 공간을 내주고 우리를 안쪽으로 넣어주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이미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들의 땀방울이 콩가에 부딪혀 소리와 함께 튀어올랐다. 그들은 노래인지 주문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힘차게 질러댔다. 귀가 아니라 가슴 깊이로 들려오는 그들의 소리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한참을 음악에 빠져 눈도 깜빡하지 않고 서 있던 나를 남편이 잡아끌어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바나에서 계속 느껴지는 묘한 느낌의 근원을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이들의 도시는 폐허에 가까울 만큼 오래되었고 헐어있었다. 사람들은 뻥 뚫려 속살이 드러난 창가에 앉아서 거리를 내다보거나 다 낡은 차를 손수 고치고 있었다. 시장에는 썩어버린 과일과 야채가 수북했고 즐겨먹는 것이라곤 골판지에 얹어주는 치즈 토핑뿐인 피자나 빵 한 덩어리가 고작이었다. 그도 아니면 사탕수수나 과일을 짜낸 음료수를 마셨다. 
  그런데... 사람들에게서는 뭔지 모를 에너지가 느껴졌다. 거칠거나 드세지는 않았다. 비교적 친절하고 과묵했다. 호객을 하는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무례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운 집 안을 벗어나 길가에 삼삼오오 모여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눴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여자들도 있었다. 호쾌한 웃음소리가 자주 들렸고 아이들은 아무 곳에서나 공을 차고 뛰어다녔다. 거리거리마다 사람들은 함께했고 심지어 위아래로도 끊임없이 교류는 일어나고 있었다. 전화가 거의 없어서인지 골목마다 높은 창문을 향해 친구를 부르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모두들 목청이 좋았다. 심지어 창문에서 줄 달린 바구니를 내려 음식을 사고팔기도 했다. 색색의 빨래가 펄럭이는 테라스에 턱을 괴고 거리를 구경하는 여자들은 가끔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야생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이들의 에너지 때문인지 아무렇게나 옷을 걸쳐 입고 곧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의 계단에 앉아있는 여자는 내가 지금껏 봐온 어떤 여자들보다도 훨씬 농염해 보였다. 거리의 대부분 여자들이 모두 매력적이었다. 몸매가 예쁘지도 않았고 얼굴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는데도 몇 번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바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은 이곳의 사람들이었다. 
  스페인의 침략에 오래도록 대항한 원주민의 저력도 저력이거니와 노예로 팔려 와 힘겨운 삶을 보내고 이곳에 정착한 아프리카인의 생명력까지 더해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여전히 뿜어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남편은 이곳을 '문명의 아마존'이라고 말했다. 
  이제 조금씩 아바나에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씩 '야생의 낭만'에 깊숙이 젖어들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아홉 시가 다 되어갈 무렵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정보집에 적혀있는 '재즈 카페 Jazz cafe'에 가보기로 했다. 원래는 '라 조라 이 엘 쿠에르보 La zorra y el cuervo'라는 곳이 유명하다고 해서 가볼 생각이었는데 요안나 아줌마가 'Jazz cafe'가 더 낫다고 추천해주었다. 
  까삐똘리오 앞에서 한 아저씨가 알려준 대로 버스정류장을 찾아갔다. 아바나의 신시가지에 해당하는 베다도 vedado 지역으로 가는 버스 p-11에 올랐다. 지도대로 한참을 잘 가던 버스는 목적지에 한참을 못 미쳐서 멈춰버렸다. 
  또 종점이란다. 
  우리는 또 걸어야 했다. 
  이쯤 되면 우리가 너무 헐렁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닌가 반성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버스 노선을 더 꼼꼼히 알아보고 움직였어야 하나? 


마른 하늘에 벼락이 치는 까삐똘리오 앞 광장


  이건 우리 두 사람의 성격 탓이다. 남을 귀찮게 하느니 내가 고생하고 말지 하는 생각에 누구를 오래 붙잡고 캐물을 성격이 못돼서 그렇다. 질문해봐야 서로 못 알아들어 답답해하느니 알아서 찾아가 보자 하는 생각 때문이다. 둘 다 똑같아서 그렇다... 어리석다고 자책해봤자 다음번에 또 같은 짓을 할게 뻔했다. 
  그냥 걸었다... 반듯한 네모로 된 길이니 길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열 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한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인당 10 쿡을 내면 그 가격 내에서 음식을 시킬 수 있고 공연도 볼 수 있었다. 다른 공연장은 음료만 두 잔 내어준다고 하니 괜찮은 선택인 것 같았다. 
  음식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고 공연이 삼십 분으로 짧긴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단지 내가 조금 아쉬웠던 것은 내가 상상한 재즈바처럼 담배연기 자욱하고 사람들이 흥에 겨워 함께 음악에 취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재즈에 취하기에 레스토랑은 너무 휑했고 차가웠다. 

재즈 카페 Jazz cafe


  그래도 없는 살림에 호사를 누리고 나와 말레콘 Malecon의 밤바다까지 보았다. 
  돌아가는 길은 늦은 밤이라 꼼짝없이 택시를 타야 했다. 레스토랑 앞에 대기해있던 택시기사가 10 쿡을 부르길래 손을 젓고는 해변가 길로 나섰다. 보통 관광객을 상대하는 택시는 비싼 값을 부르게 마련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서는 뒤통수에 대고 기사는 7 쿡까지 불렀지만 손만 흔들어주고 자리를 떴다. 그는 매몰차게 돌아서는 우리에게 마음이 상했는지 '6, 5, 4, 3, 2, 1... 0!!!'하고 소리쳤다. 나는 뒤돌아 'zero! OK!'하고 응수해주었다. 


말레콘의 밤 풍경


  우리는 시내를 향해 걸으며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5 쿡을 부르는 기사에게 3 쿡을 제시했더니 안된다며 가버렸다. 떠나는 택시를 보며 4 쿡 정도면 적정 가격인 것 같으니 다음에 오면 그 값을 부르자고 했다. 모네다 택시를 잡으면야 25 모네다, 1 쿡으로도 간다는데 그 밤에 어디 가서 그런 택시를 찾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열두 시가 다 된 시간이라 정상 가격에 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우리는 조금 더 걸었다. 도통 빈 택시가 오지 않다가 한참만에 가까이 다가오는 차 한 대를 손 흔들어 세웠다. 세우고 보니 3 쿡을 불러 보낸 그 차였다. 우리가 택시를 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편은 기사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보이고 4 쿡을 제시하며 차에 올랐다. 
  결국 올드카를 타게 되었다. 차의 좌석은 생각보다 넓고 편했다. 등에 와 닿는 탄성 강한 스프링의 느낌이 좋았다. 차가 좀 높은 편이라 발을 딛고 있기도 좋았다. 하지만 남편 말대로 정작 차에 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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