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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명 Dec 11. 2015

부조화의 치명적인 유혹.

  침낭을 다시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공항의 에어컨 바람이 너무 쌀쌀해서 결국 또 침낭을 폈다. 침낭 덕분에 요 며칠 중 가장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밖으로 나돈 내 몸뚱이가 이제는 험지를 더 편안하게 여기게 된 것은 아닌지 잠깐 걱정이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바하마의 바다는 놀라웠다. 맑고 투명한 날씨와 잔잔한 바다 덕분에 구름의 그림자가 바다의 바닥까지 내려앉아 있는 것 같았다.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는 구름 사이에서 형광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 맑은 색깔을 띠고 있어서 구름 사이를 메운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한참을  내려다봤다. 


  나는 풍경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창 밖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더 가까이 가고 싶고 손에 쥐어보고 싶어졌다. 내 온몸이 풍경에 잠기도록, 그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버리게 하고 싶은 욕망이 올라왔다. 하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금세 슬픈 감정이 올라왔다. 하얗고 뽀드득거릴 것만 같은 구름은 가까이 다가가면 뿌옇고 차가운 공기로 돌변해 냉랭하게 나를 스쳐 지나갈 뿐일 테고 형광빛 바다는 투명하고 차갑게 출렁거리며 나를 흔들어 놓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마치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처럼 애만 태우고 말 것이다. 

  내가 만질 수 있는 것은 고작 한 줌의 차가운 공기와 한 줌의 물일 뿐이고 한 줌의 흙과 풀포기뿐이다. 나는 바다를, 산을, 구름을 볼 수는 있지만 전부를 만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한눈에 들어오도록 하려면 멀리 물러나야 하고 그렇게 하면 손에 닿도록 할 수가 없다. 만지려고 다가서면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자연은 내가 감히 품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기 때문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어려워 호기를 부렸다가는 신기루에 홀려 정신이 나가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황홀한 인생을 꿈꾸고 평생을 멋진 삶의 시간에 젖어들기를 바란다. 하지만 삶의 시간은 한 번에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저 한 줌의 시간일 뿐이다. 흙과 물처럼, 물방울 맺힌 한 줌의 공기처럼 말이다. '지금'은 분명 삶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전혀 빛을 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의 삶이 좋아 보이는 것은 한 걸음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막상 들여다보면 치열하고 힘겨운 노력의 '순간'만 보인다. 나의 삶이 빛나려면 나 역시 겪어야 할 '순간' 말이다. 
  야속하지만 황홀한 인생, 충만한 행복감은 그렇게 온전히, 내가 바라는 만큼의 크기로 소유하고 묶어둘 수 없다. 욕심을 부리다가는 평생을 잡히지 않는 것을 쫓다가 지쳐서 걸음을 멈춰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을 치열히 살다가 가끔씩 한 발 물러나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는지 살펴보다가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결코 그 어떤 것과도 하나가 될 수 없고 한 순간으로 엮일 수 없는 운명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무無에 가까운 찰나와 한 점에 불과한 공간에 갇혀있는 몸뚱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이 거대한 욕망이 어떤 이유로 주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인간이 저지른 엄청난 죄에 대한 혹독한 형벌이거나 우주 질서의 완성을 위해 천적 없는 인간을 자멸로 이끄는 치밀한 장치이거나. 

  무엇이 되었든 너무나 잔혹한 욕망과 현실의 부조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을 날아 쿠바 아바나 Habana, 호세 마르티 Jose Marti 공항에 도착했다. 
  쿠바. 
  쿠바에 왔다. 

  사실 쿠바에 대한 환상만 아련하게 있을 뿐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아는 것이라고는 체 게바라, 헤밍웨이의 모히또가 전부였고 남편에게는 시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과 럼이 전부인 나라였다. 
  그래서 오고 싶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나라에 들어와 보고 싶었다. 
  공항에서부터 쿠바의 풍경은 독특했다. 
  짐이 나오기를 그렇게 오래 기다려보기는 처음이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랩으로 꽁꽁 두른 자전거와 TV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세계에 몇 남지 않은 공산국가인데다가 미국의 경제 봉쇄로 공산품을 구하기 쉽지 않다더니 미국이며 바하마 같은 근처 나라에서 알아서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것인지 커다란 짐을 가진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 한참만에 나오는 가방들도 여행가방이 아니었다. 온전한 가방도 많지 않았다. 천으로 된 낡은 가방에 온갖 것을 가득 넣고 랩으로 둘둘 감아놓아 공처럼 구르는 가방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 여행 배낭은 우리의 것뿐이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가방을 찾았는데 나오는 길에 또 줄이 이어졌다. 각각의 줄 앞에는 부스가 있었는데 구입한 물품을 신고하고 세금을 내는 곳이었다. 같은 부스에는 환전소도 붙어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들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짐이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들. 빛이 들어오는 저 곳은 곧바로 공항 밖이다. 


  우리는 환율이 별로인 공항에서는 택시비 정도만 환전을 하고 일단 밖으로 나왔다. 출국장은 세금 신고소와 환전소로 북적거리는 그곳이 전부였고 문을 열자마자 사람이 가득하고 후덥지근한 거리가 바로 나타났다. 
  내가 너무나 신기한 그 풍경에 정신이 팔려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길게 빼들고 두리번거리는 사이 택시기사 한 명이 턱 밑까지 다가왔다. 
  '흥정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다행히 남편이 먼저 나서서 가격을 물었다. 
  30 쿡 cuc, 30 달러를 외치는 기사의 말에 손을 내젓고 인터넷에서 알아본 대로 17 쿡 정도의 가격을 제시했다. 기사도 역시 손을 내저으며 20 쿡을 불렀다. 
  잠시 고민했지만 더 깎지 않고 그 가격에 가기로 했다. 한국사람들이 유난히 흥정 자체를 목적으로 지나치게 가격을 깎는 경향이 있어서 종종 불쾌한 대접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 정말 없으면 모를까 단 몇 푼에 불편한 동행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드디어 공항을 나서 아바나의 거리로 들어섰다. 처음의 풍경은 스리랑카와 매우 비슷했다. 노란빛이 살짝 도는 뿌연 대기와 습한 날씨, 울창한 나무와 허름한 건물들이 그랬다. 그런데 조금 더 달리다 보니 쿠바의 독특한 풍경이 시작되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올드카!
  영화에서나 보던 멋스러운 색색깔의 올드카들이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공항을 막 나선 여행객들이 페도라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오픈카에 끼어 앉아 환호를 지르며 지나갔다. 우리도 올드카 택시를 잡을 걸 그랬다며 후회했지만 남편 말대로 올드카 안에서는 막상 차가 안보이니까, 그리고 또 차를 탈 기회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지나가는 차를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시내로 가까워지니 독특한 풍경이 비단 차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허름한 건물들. 언젠가는 화려했을 유럽식 건물들이 낡고 헐어 칠이 벗겨지고 부서진 채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의 차림새도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은 것처럼 빛바랜 느낌이었다. 
  군데군데 검은 줄이 내려오며 흔들리는 화면 안에 들어와 살짝 늘어져 낮게 울리는 음악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어디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생경함이었다. 



  택시기사는 우리의 숙소가 있는 까삐똘리오 capitolio를 지나쳐 골목골목을 돌았다. 가격이 정해졌으니 일부러 돌 이유는 없을 테고 도시가 크지 않으니 길을 헤맬 리도 없어 잠시 더 지켜보았다. 
  기사는 일방통행이 많은 뒷골목을 돌고 돌아 정확히 우리의 숙소 앞에 멈추어 주었다. 무거운 가방을 모두 내려주고 환한 인사로 떠나는 기사를 보며 택시비를 지나치게 깎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서로 고마운 일이었다. 
  '요안나와 헤라르도의 집 Ihovanna and Geraredo's Casa'이 있는 높은 건물 앞에는 작은 간판만 있을 뿐 아무런 안내도 없었다. 안에서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나온 틈에 건물로 들어가 보았지만 계단을 올라도 아무런 표시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가방을 안으로 들여놓는 동안 삼 층, 사 층까지 올라가 보았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해도 몇 층인지 알 수가 없으니 소용이 없었다. 조금 더 올라가 보려는 참에 저 아래서 남편이 나를 소리쳐 불렀다.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아 일단 다시 내려갔는데 마침 요안나 아줌마가 외출하는 길에 마주쳤다며 까사는 10층에 있고 집에 있는 딸에게 전화를 해놓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요안나 아줌마를 만난 것은 참 다행이었다. 까딱하면 한 층 한 층 살피며 10층까지 올라갈 뻔했다. 
  방은 제법 괜찮았다. 개인 화장실이 딸린 트윈룸이 아침식사를 주고도 인당 10 쿡이면 나쁘지 않았다. 소리가 매우 크긴 하지만 찬바람이 나오는 에어컨과 냉장고, TV까지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온 것이 영 김이 샐 정도였다. 


요안나의 까사에서 내려다 본 아바나 골목
아바나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호아끼나 아줌마의 까사. 우리 부부는 늘 주류를 따르는 것이 부담스럽다.


  우리는 짐을 대충 풀어놓고 일단 거리로 나섰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아바나가 너무 궁금했다. 
  그런데 거리로 나서고 제일 처음 본 것은 우습게도 '4212번' 초록색 한국 버스였다. 방배동과 고속터미널로 간다는 간판을 그대로 달고 까삐똘리오 옆 골목에 떡하니 서 있었다. 쿠바 번호판을 달고 말이다. 실제 운행도 하는지 기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미국의 국회의사당을 본떠 지은 까삐똘리오는 아바나 관광의 중심지인데 지금은 온통 공사 중이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그곳에서 길을 건너면 보이는 공원 앞에는 관광객의 눈을 홀리는 올드카들이 늘어서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관리하고 광을 냈는지 흡사 자동차 전시장 같았다. 



  괜히 얼쩡거리면 다가와 타라고 잡아끌까 봐 우리는 눈치만 살살 보면서 사진만 얼른 찍고 그곳을 벗어났다. 
  뒷골목으로 들어가 오비스포 obispo거리로 들어섰는데 그곳도 역시 대대적으로 공사를 하고 있어서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관광객과 호객꾼, 공사 인부들이 좁은 길에 모여 어깨를 비벼야 했다. 그래도 여기저기 식당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음악에 뭔가 신나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오비스포 obispo 거리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환전소, 카데카 cadeca였다. 오비스포 거리에는 카데카가 두 곳이 있었는데 시간대를 잘못 맞추면 오래 줄을 서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간 시간이 좀 어중간했는지 두세 사람 뒤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환전소 앞의 경비원이 한 사람 씩 들여보내고 일행은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는 바람에 남편을 두고 나 혼자 긴장한 채 환전소로 들어섰다. 미국에서 환전해 온 캐나다달러-미국과 수교의 길이 열렸지만 아직까지는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지 미국 달러의 환율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와 여권을 내밀고 외국인용 화폐 쿡 cuc을 받았다. 쿱 cup으로도 좀 바꾸고 싶었지만 거절당했다. 쿡과 25배 차이가 나는 내국인용 쿱은 상점 등에서 거스름돈으로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기회를 보기로 했다. 
  숫자에 약하고 특히 돈 계산에 둔한 나에게 쿠바에서의 경제활동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가게마다 내건 간판에 적힌 가격이 쿡인지 쿱인지도 구분이 어려워 눈만 빙글빙글 돌았다. 첫날이니까... 곧 적응이 되겠지... 



  돈을 들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헤밍웨이의 바 bar,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 La Bodeguita Del Medio'였다. '쿠바 거리 cuba st.'로 들어서니 인력거를 끄는 젊은이들이 우리가 그곳을 찾아가는 것인지 알아채고는 '헤밍웨이? 모히또? Hemingway? mojito?'하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청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바 안에서는 마침 음악이 신나게 연주되고 있었다. 좁은 바의 절반은 악단이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모히또 잔을 손에 든 사람들과 주문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바텐더의 앞에는 민트 잎이 담긴 똑같은 술잔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은 모히또를 마시니 바텐더가 다른 칵테일을 만들 일은 없어 보였다. 
  안쪽의 레스토랑은 훨씬 한적했지만 음악과 함께 그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 우리도 바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모히또 두 잔이 앞에 놓였다. 
  드디어 우리가 쿠바에 왔다. 



  헤밍웨이가 사랑했다는 진짜 모히또의 맛은 어떤지 늘 궁금했었다. 유명인의 흔적을 쫓는 것은 그것 자체가 흥미로운 경험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작품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기도 한다. 헤밍웨이는 모든 면에서 더 살기 좋은 미국을 놔두고 왜 쿠바에 이십 년이나 머물렀을까, 쿠바의 무엇이 그토록 그를 매료시켰을지가 궁금했다. 
  라 보데기따의 모히또는 지극히 남성적이었다. 
  조금도 달콤하지 않았다. 
  럼 rum의 거친 술기운의 뒤를 밀고 들어오는 민트의 쌉싸름함에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강력한 맛에 어질해진 나를 진짜 쿠바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환영하듯이 음악의 리듬이 한층 더 빨라졌다. 작은 나무 몽둥이, 무들러 muddler로 민트 잎을 짓이기는 바텐더의 손놀림은 리듬에 맞춘 춤사위처럼 현란했다. 밖에서 불어오는 후덥한 공기와 음악, 사람들의 몸짓이 작은 공간에 뒤섞여 나를 흔들었고 내 몸을 채우는 모히또 한 잔이 또 나를 흔들었다. 


 


  바텐더의 머리 위 벽면에는 '나의 모히또는 라 보데기따에, 나의 다이끼리는 엘 플로리디따에 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라고 적힌 헤밍웨이의 빛바랜 글귀가 시공을 초월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주문처럼 일렁거렸다. 


  더운 날씨에 술 한 잔을 걸쳐서인지, 조금 한적해진 골목으로 들어와서인지 우리는 한 점으로 모아지도록 깊게 이어진 골목에 홀려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남편과 나는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었다가 고개만 연신 갸웃거렸다. 카메라에는 도통 잡히지 않은 묘한 분위기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다른 골목을 들어가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오래전에 본 영화 '러브 어페어 Love affair'나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 africa'의 느낌이 떠올랐다. 
  아련한 야생에서의 낭만. 
  빛바랜 거친 공기가 일렁거리며 골목을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아바나의 거리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조금 더 머물러보아야 알 것 같았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식당을 찾아 나섰다. 저렴한 가격에 랍스터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쿠바라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먹지 못했다. 남편이 알아온 곳은 문을 닫고 간판을 내렸는지 럼 박물관 주변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알아온 곳은 쉽게 찾기는 했으나 8 쿡에 먹었다는 후기와 달리 메뉴판에 20 쿡이 넘는 가격이 적혀있어 그냥 나와버렸다. 저렴한 가격에 먹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고집하고 싶지 않았다. 인터넷이 안되니 더 이상 찾아볼 방법도 없었다. 

에어컨 바람에 쉬어 가기 좋은 초콜렛 박물관 Museo del Chocolate
1 쿡이면 초콜렛 음료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코코넛이 좀 들었는지 묘하게 화한 맛으로 끝이나 시원하다는 착각이 들게 한다. 
비에하 광장 

  랍스터를 못 먹은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비에하 Vieja광장을 지나오며 봤던 '타워 맥주 tower beer'를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은 또 금세 옮겨졌다. 
  광장 한 편에 늘어선 테이블들 위에는 길쭉하게 생긴 맥주통들이 놓여있었다. 통의 가운데에는 얼음 막대가 들어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했다. 


  남편과 나는 잔을 가득 채우고 탐험과 같은 여행의 종착지, 쿠바에 와 있음을 자축했다. 우리의 삼 개월 간의 동행은 생각보다 더 즐거웠고 더 편안했다고 추억했다. 남편은 나이 육십 쯤은 되어야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던 깊은 우정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하루에 기껏해야 서너 시간을 함께 하는 삶을 살았을 텐데 백일 가까이 한 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그러면서도 크게 다투는 일 없이 - 두어 번의 작은 다툼은 있었지만...- 즐거웠으니 이런 좋은 친구가 또 없겠다 싶었다. 무엇보다도 평생을 함께 나눌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에 감사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동안 우리의 시간들은 삶 안에서 완전하게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곳이나 음악이 빠지지 않는 아바나의 거리답게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광장에도 경쾌한 콩가 연주와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울렸다. 


아바나 대극장 Great Theatre of Hab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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