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결을 향해 떠난다.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by 신지명



뜨거운 바다에 몸을 누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물살을 가르는 배의 움직임 덕분이었다. 곰팡이 냄새가 나는 수증기에 휩싸인 채 노리끼리한 탕 안에 앉아있으니 쏴...철썩...쏴...철썩하는 움직임이 반복되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날카롭게 파란 바다도 동일한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배 안에서 기대하지 못한 호사를 누렸다. 배가 출항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보송보송하게 말라있는 편백 마루와 물소리만 요란한 탕에 나 홀로 몸을 녹이게 되다니...그 매력적인 상황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바다를 보다가, 다시 누워 몸을 녹이다가, 또다시 창가에 턱을 괴고 앉기를 반복했다. 여행의 출발이 너무나 고되었던 탓에 더욱 달콤한 선물 같았다.

며칠을 내리 새벽잠을 자야 했다. 온몸이 욱신거리도록 집안일을 했다. 순전히 나의 병에 가까운 몹쓸 성격 탓이었다. 문을 박차고 세상으로 나가보자며 준비한 여행을 앞두고 집안일이라니! 오래도록 비어 있을 그 공간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옷장을 뒤집고, 냉장고 내부를 죄 들어내어 닦아내고, 빨래를 몇 번이나 해댔다. 그것도 모자라 찬장에 베란다까지 쓸고 닦느라 골반이며 엉치뼈까지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나의 이런 어리석은 짓거리는 사실...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어느 순간에 닥칠지 모르는 죽음과 죽음 뒤에 남겨질 '나'의 조각들, 흔적들에 마음이 쓰이기 때문이었다. 서른이 조금 넘은 언젠가부터 삼사일 이상 집을 비우게 될라치면 반복되는 일이었다.
'이 길로 집을 나서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지, 내 죽음 이후의 뒷정리를 해야 할 누군가가 이곳에 들게 될 텐데 그 순간 나의 마지막은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늘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한 번 시작한 짓거리는 관성을 얻어 점점 더 '무결'을 향해 내달렸다. 내 스스로가 괴로울 지경인데도 불구하고 멈출 수가 없었다.
죽은 자가 부끄러움을 어찌 알 것이며 슬픔에 잠긴 가족이 무엇을 책잡아 손가락질 하겠냐 마는 지금의 나는... 살아있는 나는 간절하게 그렇게 싶었을 뿐이었다. 빛 쫓는 나방처럼 죽음 이후에는 무엇 하나 쓸모 없어질 돈 쪼가리나 명예 따위를 쫓아다니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단지 내가 쫓는 것이 '무결함'일 뿐이었다. 현재는 내게 없는 것, 온전하게 이룰 수도 없는 것, 그러나 나를 사로잡는 그것이 나를 노예적인 삶으로 밀어 넣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쫓던 나의 관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삶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준비한 여행이었다. 몸의 어딘가가 기능을 상실하도록 굴려온 이 삶을 놓아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알맹이는 별로 없고 불필요한 강박만 남아버린 삶일 뿐이었다. 그래서 지도 위에 기다란 선으로 길만 대충 그려놓고 흘러가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나아가고 그 순간에 만족하는 여행을 가보자고 했다. 의미 없는 '무결'을 쫓는 데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했다.
비록 삼십육 년을 굴러 온 관성에 힘입어 막바지 중노동에 시달리기는 했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도록 코앞으로 다가온 출발시간 덕분에 드디어 '남겨질 공간'에 대한 노예적 충성을 멈추고 지금껏 걸어온 나의 길 밖으로 튕겨져 나갈 순간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기대한 대로 여행은 처음부터 '유결'로 시작되었다. 어젯밤 몇 차례 배낭을 메어 보고 준비가 다 되었다고 안심했는데 추운 새벽 공기를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두터운 패딩 점퍼를 입으니 배낭을 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빠듯하게 다가온 버스 시간 탓에 남편과 나는 급하게 껴입은 옷을 미처 여미지도 못했고 옷의 두께 때문에 앞으로 하나, 뒤로 하나 둘러 멘 가방이 줄줄 흘러내린 채로, 우리를 배웅 나온 가족들에게 멋진 인사말을 전하지도 못한 채로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에 등을 떠밀려 그렇게 허둥지둥 터미널에 들어섰다. 불과 몇 분 전, 어떠한 결함도 용납할 수 없는 사람처럼 몸을 혹사시켰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다. 이제 여행이 시작된 것이었다.
강제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버스에 태워지고 나서야 나는 잠을 잘 수 있었고 그리하여 드디어 국경을 넘는 배에 태워져 자유롭게 바다 위를 넘실거리게 되었다.

배의 진동은 마치 나의 관성과 자유로의 열망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마찰음과 같았다.
그래, 어디 한 번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그 길로 들어서보자! 자유로 얻은 에너지가 나에게 무엇을 선사하는지 똑똑히 지켜보자!

나의 육신이여!
나의 영혼이여!
부디 전진하라!
오직 자유만을 구하라!

'끼 체르카 뜨로바 Chi cerca trova!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