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이 없는 선실에서는 시계만 보지 않으면 언제고 밤이 될 수 있고 언제고 끼니 때가 될 수 있었다. 책을 읽다가 잠이 쏟아지면 잠시 눈을 붙였고 허기가 지면 주전부리를 오물거렸다. 꼬박 하루의 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유. 나에겐 이것이 자유인 것이 아이러니다. 자유로운 시간이 너무 낯설어 심장이 조금 두근거렸다. 설렘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할 일이 없는 상태로 인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예전에 어떤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독일의 한 동물보호단체에서 평생을 축사에서 보낸 젖소들을 방사해 주는 장면이었다. 축사를 나선 소들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겅중겅중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크게 흔들며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말 그대로 기뻐 날뛰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태어나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뭔가.. 인간인 나는 분명 소보다도 어리석은 것이 틀림없다. 자유에 내던져지고도 겅중겅중 뛰기는커녕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다니! 해야 할 일도 없고 누군가 시키는 일도 없으니 침대에 누워 다리를 까딱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여행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면 좋을지, 그렇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따위를 두 시간이 넘도록 생각하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말이다. 그나마 피곤한 몸이 현명하게도 현실을 직시하고 나를 잠으로 끌어들였으나... 그마저도 나의 어리석은 머리를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병원으로 다시 출근하여 어머니들과 아이들의 새로운 문제행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꿈을 꾸고 있었다! 맙소사! 나의 관성은 생각보다 더 강력했다. 이것은 모두 사고비행에 가까운 나의 몹쓸 사고 습관 때문이었다.
인간의 사고력이 우월한 것이라거나 매우 좋은 삶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오래도록 계속 해왔다. 어째서 인간만이 '내가 나임을 인지하고', '내가 사유하고 있음을 사유하는' 따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혹은 '왜'라는 질문으로 진리에 닿기는 매우 어려운 것임을 안다. 하지만 분명 오래전의 사람들도 이 질문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결국 신에게서 답을 내는 것으로 이 궁금증을 매듭지었던 것 같다. 성서에서 천지만물의 창조설화에 바로 이어 두 번째로 인간의 '사고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것을 보면 말이다.
'선악과'일화는 신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그 명령을 어기고 열매를 따먹은 뒤 벌을 받게 되는 이야기이다. 성서학자가 아닌 이상에야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사건의 전말을 잘 살펴보면 이것이 단지 신과 같이 슬기로워지려는 인간이 그의 오만함 때문에 벌을 받은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성서에 쓰인 그대로만을 조금 더 곱씹어 보면 이렇다. 신의 명령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고 신께서 경고한 불순응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이 말이 '나의 것에 함부로 손을 대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와 같은 위협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더 이상 신을 자비롭고 관대한 존재로 여기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행태에도 좀 수상한 구석이 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그들은 신과 같이 슬기로워져 의기양양하게 신께 대들기는커녕 갑자기 알몸이 '두려워' 숨는다! 더 이상한 것은 신께서 걱정하신 다음의 일이, 인간이 '생명나무'에 손을 대어 영원히 살게 될 수도 있으니 불칼을 세워 그것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은 인간에게 출산과 노동의 고통을 명령하고 에덴동산을 나가게 하셨다.
순전히 자의적인 해석을 붙여보자면 이 일화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선과 악', 가치의 판단,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곧 '사유'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신은 어쩌면 이 능력이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담과 하와는 열매를 따먹은 즉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몸을 숨기게 되었다. 흔히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는 근본에는 '죽음'이 닿아있게 마련이다. 공격, 파괴, 질병, 무리에서의 도태, 심지어 존재의 불확실성 등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로 인해 죽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상태에서 이런 두려움에 떨며 숨어 지내는 존재는 상상하기 어렵다. 대부분 직접적인 위협의 자극이 있어야만 나타나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런 자극이나 사건 없이도 '죽음'에 대해 '알게 된' 인간은 아마도 생존을 위한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다가 혹은 그 두려움에 압도되어 생을 유지시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큰 사고를 겪은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거나 투신자살자들이 심장마비로 추락 전에 이미 사망하는 일들을 보면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감정을 일으키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나도 한때, 지금도 종종, 당장 다음의 순간에 죽음이 닥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눈을 질끈 감고 돌처럼 굳어져 버린 경험이 있다. 출근길에 타고 가던 전철이 사고를 일으켜 죽게 된다던지, 길을 지나가던 낯선 사람이 갑자기 내 배에 칼을 들이댄다던지 하는 따위의 장면이 떠오르면 호흡이 흡-하고 멈춰지곤 했다. 그 생각을 떨쳐버리지 않으면 한순간도 온전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신께서 경고한 '죽음'은 위협이 아니라 사유가 가능하게 된 인간이 맞게 될 자명한 결과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줄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될 것이라는 것이 신이 할 수 있는 그 다음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이 납득이 간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인간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은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생명의 진리를 거스르는, 우주의 근본적인 질서를 깨는 가장 위험한 일이니 말이다.
이러한 '죄'의 대가로 신께서 인간에게 명하신 것은 조금은 엉뚱하게도 출산과 노동의 '고통'을 주신 것이었다. 그저 '이놈들! 벌 좀 줘야겠다!'라고 하여 주신 벌 치고는 이상하리만치 개연성이 부족한데 심지어 구체적이기까지 하다. 의구심을 가지고 앞에서 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적인 우리의 삶을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사실 이 명령은 벌이라기보다 인간을 살게 하는 구원은 아니었을까라는 상상에 이르게 된다. 이미 모든 것이 주어진 생명의 땅에서 스스로 생명을 일궈야만 살 수 있는 곳으로 보내진 인간은 생명을 일궈낼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해야만 했을 것이다. 또 그에 따르는 육체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노래를 만들거나 춤을 추는 따위의 일에 사고력을 써야 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그런 벌을 내린 신을 원망하거나 자비를 구하는데 사고력을 쓰기도 했을 것이다. 당장 앞에 놓인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의 순간에 대한 생각은 저만치 멀어지고 말 것이다. 게다가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으로 일어나는 두려움을 떨칠 방법으로 그것의 반대 끝점인 생명의 시작, 임신과 출산에 사고력을 쏟게 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또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신은 이런 여러 가지의 일들로 사고를 흩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혹시나 사고의 잉여가 생겨 다시 죽음을 떠올리며 두려워할 것을 대비해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라고 생명과 죽음의 순환에 따른 영원성, 일치성에 대한 답까지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물론 성서의 말씀이 진실로 그러한 것인지를 믿는 것은 신앙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를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들이 인간의 사고력을 욕망으로 얻게 된 '저주'스러운 결과물로 여겼으며 삶의 피할 수 없는 고통들은 사실 신이 내린 처벌이 아니라 인간을 살게 하는 신의 자비라는 결론에 동의하였다는 것은 상상해볼 법한 일이다.
노동과 출산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그래서 고통도 없는 지금의 내가 이런 생각 따위로 자유에 젖어들지 못하는 것만 봐도 그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잉여적인 사고의 결과가 언제나 죽음에 도달해 두려움이나 불안 그도 아니면 허무나 염세 등으로 귀결되던 경험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들의 의견에 신뢰가 간다.
그러니 이제 이 불필요한 사고를 집어치우고 에덴 동산에 있는 것처럼 노동 없이 먹고, 편안히 휴식하며 신께서 창조한 만물을 두루두루 살피는 일에만 열중해야겠다. 그러다 보면 나도 어디선가 겅중겅중 뛰며 기쁨을 만끽할 수 있게 되겠지. 그곳이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이 될지 포르투갈의 땅끝 어디가 될지, 그도 아니면 우유니의 새하얀 사막 위에서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