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을 가르고 닿은 대륙. 러시아

by 신지명

남편이 들뜬 표정으로 나를 흔들어 깨웠다. 서둘러 따라 나선 바깥의 풍경은 놀라웠다. 크게 덩어리 진 얼음이 둥둥 떠있는 바다가 보였다! 갈라진 얼음들 사이에 거대한 전함과 여객선이 정박해 있고 기둥도 몇 개 없이 길게 세워진 블라디보스토크의 금각교가 보였다. 무엇보다도 네모 반듯한 건물 위에 붉게 쓰여진 키릴 문자가 생경함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겨울의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다! 거대한 대륙의 나라!

적지 않은 여행 경험이 있지만 그 어느 곳보다도 러시아는 낯설고 신선한 곳이었다. 분명 우리나라와의 지리적 거리도 가깝고 중국이나 몽골과의 연결로 접근성도 좋은데, 나에게 이 나라는 아프리카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던 곳이었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는지 항구의 풍경을 쉽게 눈에서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무거운 가방을 둘러메고 갑판을 내려서면서도 헛웃음을 흘리며 몇 번을 더 중얼거렸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왔다...하하...러시아라니.."
좁고 어둑어둑하며 사람들이 꽉 찬 입국심사소를 무사히 통과했다. 계단 아래로 열린 무거운 철문 사이로 바깥에서 들어온 빛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문 밖에 있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뿜어내는 빛과 같이 느껴졌다.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가방을 메고 철문을 나선 뒤 땅을 몇 걸음 디디고 나니 감동은 급격히 진정되었다. 바위처럼 무거운 가방과 깃털처럼 가벼운 러시아 정보.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2년 전 스리랑카에서 배낭을 메고 완전히 새로운 장소를 탐험하는 여행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경험을 했던 것이 이번 여행을 현실로 만들어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일단 가보자!'
경험이 부족할 땐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경험이 축적되면 '일단'이라는 마음으로 무장하는 것이 뭐든 가능하게 하는 것 같았다.
이런 무모함과 용기에 힘입어 남편과 나는 우선 항구 밖으로 나섰다. 선상에서 인터넷이 끊기기 직전 확인한 바로는 역 내에 분명히 가방 보관소가 있었다. '항구, 다리, 기차역, 왼쪽' 이란 단서만 기억한 채 일단 역을 걸어 나왔다. 정말로 항구에서 다리를 건넌 뒤 기차역 왼편에 있는 계단을 내려서니 작은 건물에 'left luggage'라고 적힌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철문은 굳게 닫혀있고, 어떤 알 수 없는 글자와 시간이 적힌 표지판만 문 앞에 걸려있었다. 창문의 블라인드까지 모두 내려져 있어서 도통 내부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운영을 안 하는 것인가?! 시간이 지났다는 뜻인가? 가방을 맡길 수 없다면 우린 블라디보스토크는 포기하고 밤까지 기차역에 있어야 한다!
하... 건물을 빙 둘러 서성거리기를 몇 분. 추운 겨울임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철문을 두드려보았다. 조용했다. 난감함에 발 길을 돌리려던 그 순간, 철컹하고 문이 열리더니 짙은 갈색 머리가 하얀 얼굴을 더욱 볻보이게 하는 예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선뜻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두드려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희망찬 가르침인지 새삼 깨달았다.
영어가 단 한 마디도 통하지 않아 애를 먹기는 했지만 짐을 맡기려는 자와 이를 보관하는 자의 분명한 목적 덕분에 무사히 일을 마칠 수는 있었다. 가방 보관표를 받아 든 나도, 업무를 무사히 마친 그녀도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난 후에야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싱긋 웃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섰다. 그런데 잔뜩 부풀어 있던 나의 기대와 달리 우리를 처음 반긴 것은 먼지 덮인 시커먼 눈과 칼칼한 매연이었다. 겨우 내 내린 눈이 녹기 시작하여 매연과 뒤엉킨 채 새까매진 도로, 낡고 칠이 벗겨진 건물과 자동차들(심지어 앞코가 죄다 날아간 채로 달리는 차도 여럿 보였다.). 그리고 '익숙함'이었다. 순전히 버스들 때문이었다. 익숙한 모양새에 자세히 보니 현대, 대우 마크가 달린 우리나라 버스들이, 연식이 제법 오래되보이는, 황토색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키릴어 간판을 단 채 거리에 줄줄이 서 있었다.
그 풍경은 왠지... 슬펐다.
나에게 미지의 러시아는 미국과 대적했던,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한 대륙의 나라인데... 사방이 막힌 작은 땅의 나라에서 오래도록 사용되었던 낡은 버스에 무표정하게 들어찬 사람들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슬프게 느껴졌다. 마치 빛바랜 군복에 낡은 훈장을 정갈히 고쳐 달고 군모를 겨드랑이에 끼워 넣은 채 먼 바다를 응시하는 퇴역군인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특히 여성들의 옷매무새는 몇 번을 흘깃거릴 정도로 품위 있고 정갈했다. 여자들은 각양각색의 모자를 쓰고 허벅지를 충분히 덮을 정도의 기다란 패딩 코트의 허리를 단단히 여몄으며 통굽의 롱부츠를 신고 각진 가방을 든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녀들의 단호한 걸음걸이였다. 흐느적거리거나 휘적거리지도 않고 어깨를 움츠리거나 느싯거리는 걸음도 아니었다. 어느 나라건 낯선 이방인에게 눈길을 던지기 마련인데 애써 외면하는가 싶을 정도로 꼿꼿하게 정면을 응시한 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제법 매력적이었다. 어쩌면 이런 단호함이 양날의 검처럼 러시아를 한 때 부강하게 하였으며 또 지금에 와서는 역사에서 한 걸음 비켜난 곳에 서 있게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찬 바람과 비둘기만 가득한 혁명광장에 앉아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고 금빛의 둥근 지붕이 덮인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에 들어가 금빛의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저 눈과 발이 닿는 대로 가다 보니 어느새 아르바트 거리에 이르렀다. 거리의 양 옆으로 늘어선 카페며 옷집, 심지어 한식당까지 있는 것을 보아하니 번화가여야 하는 것이 맞는데... 사람은 거의 없고 문을 연 가게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쉬워 사진이나 몇 장 찍고 해양공원으로 내려갔다. 공원의 앞으로는 하얀 눈과 함께 얼어붙은 바다가 펼쳐져있었다. 거대한 대륙에서 흘러내린 물자국 같은 길쭉한 땅을 가로질러 걸어온 모양이었다. 서로 다른 해류의 영향을 받는 때문인지 분명 항구 쪽은 얼음덩어리는 있을지언정 배가 드나들 정도로 완전히 녹아있었는데 30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의 반대편인 아무르만의 바다는 아직도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는 중이었다.



단정하게 길이 놓인 산책로를 따라 알록달록한 관람차와 멋을 한껏 부린 가로등이 이어지고 있었고 얼음 사이에 갇힌 선상 'Disco Club'과 요트들이 눈에 띄었다. 여름에는 제법 번화한 유원지였을 법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 멀리 점으로만 보이는 사람들이 얼음을 뚫고 낚시나 하는 '겨울'이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바다가 너무 신기하여 얼음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먼 곳 까지 걸어나가 볼 요량으로 바다 위에 올라섰으나 갑작스럽게 불어오는 칼바람에 고개를 들 수 조차 없었다. 바다의 얼음이 뿜어내는 한기가 바람에 날려 고스란히 얼굴에 와 닿으면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는 몇 걸음 나가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꽁꽁 얼어붙은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항구로 돌아가는 길의 방향을 잡느라 애를 먹었다. 발걸음도 빨라졌다. 어느새 해도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먹을거리를 좀 사들고 기차역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나는 기차에 무사히 오를 때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블라디보스토크를 한 바퀴 돌아본 것만으로도, 무거운 가방을 무사히 지켜낸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마무리가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짐 검사를 마치고 들어선 기차역 안에서 봉지를 뒤적거리더니 맥주를 한 캔 꺼냈다.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시어머니가 싸주신 멸치볶음을 안주삼아 한 입 털어 넣었다. 나도 캔을 건네받아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 있는데 우리 앞으로 가까이 다가선 경찰과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던졌는데 표정만 봐도 우리가 역 안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이미 딴 맥주를 버리기는 좀 아까웠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역 앞 계단에 앉아 다시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런데 그 경찰은 굳이 따라나와서는 계단에서도 마실 수 없다며 깐깐하게 굴었다. 결국 남편과 나는 찻길을 하나 건너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거리에서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 캔에 닿아있는 손가락이 쓰릴 정도의 찬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추위에 맥주 마시기를 포기하고 남편이 나머지를 벌컥벌컥 털어 마신 뒤에야 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3시 52분. 모스크바 시간으로 16시 52분. 러시아의 모든 기차역 시계는 모스크바의 시간에 맞춰져 있다. 시간경계를 수시로 넘나드는 이들의 긴 이동에 필요한 수단이었다. 기차가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으로 추정되는 소리에 가방을 장착하고 사람들을 따라 1번 플랫폼에 들어섰다.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메텔과 같은 복장을 한 여직원이 손전등을 비춰 우리의 티켓과 여권을 확인하는 시간은 무척 길게 느껴졌다. 행여나 티켓을 잘못 끊은 것은 아니겠지, 무언가 잘못되어 탑승이 거부되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했다. 여직원은 역시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까딱하고는 탑승을 허락했다. 깜깜하고 고요한... 사람들의 실루엣만 겨우 확인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플랫폼에서 발을 떼어 드디어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랐다. 분명 더 좁은 공간으로의 이동이지만 나에겐 '은하'만큼의 자유를 의미하는 거대한 공간! 그곳으로의 거룩한 입성이었다.

'3호차' 13번과 15번. 앞으로 삼일 간 우리의 숙소이자 여행지가 될 그곳에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았다. 자리에 놓인 새하얀 시트와 담요를 깔아 편안한 잠자리를 만들고 가방들을 의자 밑에 욱여넣은 후에야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리는 불이 꺼진 열차 안에서 보드카를 꺼내 조용히 축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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