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타고 건너는 아드리아 해

크로아티아 스플릿. 두 번째

by 신지명

하늘과 바다는 표면의 느낌만 다를 뿐 하나의 색깔로 나의 시선에 가득 차 있었다. '푸르다'는 표현으로는 성에 차지 않지만 딱히 다르게 표현할 능력도 없었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 덕분에 사람들이며 가로수, 하물며 비둘기도 공간과의 경계를 분명히 드러내 무척이나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이 재밌었다. 잡지의 사진을 가위로 깨끗하게 오려내 세워놓은 것 같았다.
우리는 여기 바닷가에 앉아 서너 시간은 노닥거릴 작정이었다. 유럽 사람들이 왜 해만 나면 시도 때도 없이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피부의 주름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심장으로 이르는 혈관까지 따뜻하게 만드는 지중해의 햇살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내 몸의 구석구석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따뜻함이었다.
그러나... 바닷바람은 햇살이 내 몸에 닿기 전에 그 열기를 모두 식혀버리는 모양이었다. 두어 시간쯤 지나니 바람이 제법 불기 시작해 다시 스산해졌다. 리바 거리에 늘어선 카페 테라스만큼만 물러나도 바람의 위세가 꺾이는 것이, 사람들이 그쪽에만 앉아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반짝거리는 지중해와 푸른 하늘은 실컷 보았으니 아쉬움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숙소로 짐을 찾으러 갈 수 있었다.
오전 내내 시끌벅적하게 신선한 채소며 꽃, 과일 등을 팔던 시장은 어느새 파장을 했고 새끼 오리며 병아리떼만 아침 추위에 서로 엉겨 붙던 모습과 달리 햇빛을 향해 고개를 빼들며 삐약거리고 있었다. 남편은 한 마리 사서 데리고 다니자며 진심 섞인 농담을 몇 차례 말했지만,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마지막 이성의 끈은 놓지 않았다. 길고 고된 여정에 동물을 동반하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고민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보드랍고 따뜻한 노랑이들이 자칫 잘못되기라도 하면 너무 슬플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성곽 안은 어제보다 더 활기찼고 예닐곱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아카펠라 공연을 하며 음반을 팔고 있었다. 멋진 화음에 흥겨운 리듬까지 곁들여 오래된 홀을 울리니 나는 입도 채 다물지 못하고 흥이 나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눈은 작아져 보이지 않고 입만 크게 벌려 벙긋 웃고 있는 동양 여자가 서 있는 꼴이 노래하는 그 사람들 쪽에서 보기에는 좀 우습기도 했을 것 같다.

우리는 가방을 찾아 메고는 다시 바닷가로 나와 한두 시간 더 햇볕을 쬐고 해 질 무렵이 돼서야 항구로 들어갔다. 좋은 관광여행은 이제 거의 끝이 나가고 당장 오늘 밤부터는 몇 번의 고비를 넘겨야 하기에 마지막 여유가 더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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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준비에 쫓기던 그때, 하룻밤 사이 몇 개의 기차표를 예매하고 비행기 편을 알아보는 통에 정신이 없어 여기 스플릿에서 이탈리아 앙코나로 지중해를 건너는 배편 예약을 잘못했더랬다. 무조건 제일 싼값의 자리를 예약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놔서는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예약을 했는데 확인 메일을 받고 보니 'deck, 2 places'라고 적혀있었다. 데크라니.. 자리 seat이 아니고 place라니... 하룻밤을 꼬박 가는 배인데 데크를 예약하면 어쩌자는 말이냐. 취소를 하려니 수수료가 제법 나오고 'seat'만 해도 가격이 또 차이가 나서는 에라 모르겠다, 얼어 죽기야 하겠냐, 침낭이랑 텐트도 있고 발열조끼랑 핫팩도 있으니 어떻게든 가보자 하고 그냥 온 참이었다. 그런데 바닷가에 몇 시간 앉아있어 보니 한기가 만만치 않음을 겪은 터라 배에 오르고 나서는 불안감에 살짝 들떠서 데크 자리를 찾아 나섰다. 직원이 4층이라고 말해주어 올라갔는데 정작 그곳엔 바, 레스토랑만 있고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없었다. 한 층 더 위는 밖으로 나갈 수 있었으나 비상용 보트가 걸려있는 데크였다. 다시 바 bar로 내려왔는데 군데군데 사람들이 큰 가방을 가지고 앉아있는 것을 보니 우리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분명했다. 우리도 쫓겨날 때까지는 있어 보자 싶어 소파 쪽 자리에 가방을 부렸다. 창밖은 마을까지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햇빛에 물들어 어마어마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자리고 뭐고 간에 흥분해서는 짐을 지키느라 번갈아가며 5층 데크로 나가 사진을 찍어댔다. 스플릿은 석양마저도, 그런 멋진 풍경마저도 늘 그래 왔다는 듯이 여유 있게 받아내며 저녁 어스름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햇살이 흘러가듯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크로아티아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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