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앙코나, 로마
크로아티아의 호기로움과 융통성은 그곳에 머무르는 내내 믿음직스러웠는데 마지막까지도 우리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선상의 데크에서 지중해의 밤바람을 맞거나 그도 아니면 실내 복도나 계단 어디선가 웅크리고 밤을 보낼 각오를 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따뜻한 바에서 푹신한 소파에 침낭까지 펼쳐 깔고는 안락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쫓아내지 않았고 눈치를 주지도 않았다. 팍팍하지 않은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인심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두들 일상이 늘 이래 왔다는 듯이 아무런 동요도 없이 여기저기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하선을 준비했다.
낮 시간의 배였다면 아드리아해를 건너는 내내 유람선 위에서 국경을 넘으며 변해가는 풍경을 만끽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아쉬운 대로 갑판에 나가 이탈리아의 땅끝, 앙코나 Ancona에 아침이 밝아오는 풍경을 맞이했다.
첫 번째 심란한 고비는 무사히 잘 넘겼다. 두 번째 고비는 앙코나에서 로마로 가는 기차표를 받는 일이었다. 이곳의 시스템을 잘 아는 사람에겐 별일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이탈리아어를 전혀 모르는 우리 같은 무지렁이는 이메일로 전자티켓을 받지 못한 상황이 무척 막막했다. 한정된 예산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그다지 싸지 않은 표를 이중으로 사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마 두 번째 실수도 배편을 데크로 예약한 그 밤에 일어났을 것이다. 이메일을 잘못 기재했는지 전자티켓을 받지 못했고 예약 페이지에서 예약 상황을 확인하려고 해도 이메일을 어떻게 잘못 기재했는지 알 길이 없으니 로그인도 할 수 없었다. 이 사실도 여행을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 티켓들을 확인하면서 알게 되었으니 여간 갑갑한 일이 아니었다. 티켓을 다시 구매하자니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금액이 올라가는 유럽의 기차표 시스템 상 차액이 제법 되었었다. 그나마 예약 창이 닫히기 전에 PNR 코드라는 것을 적어놔서 그것으로 어떻게 안되겠냐며 그 번호만 적어 들고 온 참이었다. 게다가 스플릿의 여유로움에 너무 취해있었는지 긴장이 풀려서는 앙코나 항구에서 기차역 가는 것도 알아보지 않았고 로마에서 만나야 하는 왕신부하고 연락도 해놓지 않았지 뭔가! 떼르미니역에 와이파이가 잡히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만 갖고 있었다. 로마가 코앞인데 갈 길은 참 멀었다.
항구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기차역까지 버스를 타야 한다고 말해서 짐이 될게 뻔한 물까지 사가며 잔돈을 만들어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기사는 요금이 얼마냐고 묻는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도 낯선 우리를 애써 외면하는 눈치였다. 버스 안에 있는 기계에 2유로, 4유로, 5유로 숫자가 쓰여 있길래 일단 2유로를 넣고는 버튼처럼 생긴 뭔가를 이것저것 눌러보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빨간 버튼을 눌러주었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가버렸다. 뭐.. 기사가 별말 안 하니 요금은 낸 셈이 되었지만 1유로만 내도 되었을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버스가 세 정거장쯤 왔을 때 기사가 '스테이션 station'이라며 우리를 쳐다봤다. 3km라고 했는데? 정류장 표지에도 다섯 정거장쯤은 되었는데? 기사가 버스 스테이션 bus station을 잘못 알려준 것은 아닌가 의심스러워 '기차 train?', '여기가 here?'를 반복했다. 기사가 우리를 쳐다만 보고 뭐라 더 대꾸를 안 해주니 남편은 급기야 '칙칙폭폭?'이라고 묻고 있었다. 이곳이 아니면 버스를 다시 타지 싶어 일단 내렸는데 우습게도 그곳은 기차역이 맞았다. 걸어와도 되는 거리를.. 온갖 바보짓은 다하며 버스를 타고 왔다니.. 이곳 사람들에게 이 정도 거리는 제법 먼 거리였던 모양이었다. 뭐.. 어찌 됐든 기차역까지는 왔다. 우리는 곧 도착할 로마행 기차표를 해결하러 창구로 갔다. 나는 내 상황을 영어로 천천히 설명했지만 나이 많은 여직원은 내 설명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내가 내민 PNR 코드만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컴퓨터로 무언가를 검색하고 티켓을 출력해주었다. 다행히 그 번호만으로도 무사히 티켓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갑갑했던 일이 너무 쉽게 해결되어버려서 그동안 마음 졸이고 신경을 썼던 시간들이 떠올라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 알고 있다. 현자들은 세상의 모든 걱정들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리 걱정을 한들 상황에 놓이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해결이 될 일이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해결이 안 되는 일은 걱정을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남편은 언제나 전자의 가능성으로 아무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이고 나는 항상 후자의 가능성으로 최대한 일이 되도록 미리미리 발버둥이라도 쳐야 안심이 되는 사람인 것을. 이번에도 역시 남편이 내 뒤통수에 뿜어내는 '거봐라. 별일 없잖아.'하는 기운을 애써 모른 척해야 하는 것이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물론 나에게만.., 일들이 너무 쉽게 해결이 되어버려서 우리는 더욱더 해이해졌다. 우리는 표에 적힌 대로 2번 플랫폼에 들어서서는 허기진 배를 채우고 기지개도 켜며 실컷 여유를 부렸다. 로마에서 친구를 만날 기대에 한껏 들떠있었다. 그러기를 한참이 지났는데 작업용 카트를 타고 가던 한 할아버지 직원이 우리 앞에 멈추고는 '로마 rome?'하고 물었다. '네, 떼르미니요 yes~termini'라고 답하니 손을 내젓고는 저 뒤쪽 어딘가를 가리키며 '2 two'라고 말했다. 여기가 2번 플랫폼인데? 맞는데? 그러고 보니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 십 분도 채 안 남는데 전광판엔 어떤 안내 표시도 뜨지 않았고 심지어 사람들도 너무 없다는 사실이 그제야 인지가 되었다. 기차표를 개시하기 위해 잊지 않고 펀칭을 했다며 좋아하고나 있을 일이 아니었다. 서둘러 가방을 다시 메고 큰 전광판을 찾아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해보니 '2 오베스트 ovest'라고 적혀있었다. 'ovest'가 '서쪽'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무턱대고 2번 플랫폼에 가서 기다리지. 한참을 걸어 '2 ovest'라고 적힌 플랫폼을 찾아가니 이미 기차는 들어와 있었다. 사람도 아주 많았다. 그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놈의 앙코나-로마 기차표는 또다시 골칫거리가 될 뻔했다. 우리는 할아버지에게 더욱 격렬히 감사 인사를 했어야만 했다.
네 시간이 넘게 길쭉한 이탈리아의 허리를 가로질러 떼르미니역에 도착했다. 불과 7개월 전에 직장에서 연수 차 왔던 로마에 백수가 되어 다시 나타나니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오묘했다. 홀가분하지만 불안한 마음, 자유롭지만 막막한 마음이 뒤섞여 들었다. 게다가 익숙하지만 여전히 긴장되고, 반갑지만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까지 겹쳐져 떼르미니의 혼잡함만큼이나 내 마음도 혼란스러웠다.
일단 바짝 긴장해서 가방을 틀어쥐고는 수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어디서 오는지를 알고 있으니 왕신부 성격에 분명 마중을 나왔을 것 같긴 한데 플랫폼을 다 빠져나와도 왕신부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좀 급해졌다. 부활절을 맞아 숙소 예약이 쉽지 않았던 터라 왕신부가 숙소를 잡아줬는데 주소만 알고 어찌 가는지 구글 지도를 받아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스플릿에서 너무 노닥거린 우리를 자책해야만 했다. 와이파이를 찾아야 한다! 보통은 와이파이를 공짜로 쓸 수 있는 맥도널드를 찾아 들어갔는데 잡히는 게 없다. 큰 가방을 메고 혼잡한 사람들 틈을 다니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남편은 맥도널드에 남아 오프라인 지도에서 숙소와 가까운 전철역을 찾아보기로 하고 나만 다시 와이파이를 잡으러 돌아다녔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잡힐까 싶어 찾아 나섰는데 줄이 또 몇 미터고 티켓 관련 안내만 하는 것 같았다. 근처에 가보았지만 잡히는 신호도 없었다. 그 주변을 좀 더 서성거리다가 이탈리아 통신사인 'TIM'에서 나오는 신호를 발견하곤 연결을 시도해보았으나 원망스러운 작업 중 신호만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언뜻 떠오르질 않아 일단 남편과 다시 합류하려고 돌아선 순간 왕신부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있다니! 로마 떼르미니에서 약속도 없이, 너무나 필요한 그 순간에, 그냥 그렇게 만나지다니! 너무 반가워 소리만 꽥꽥 질러댔다.
왕신부는 기차가 조금 일찍 도착한 바람에 이미 플랫폼을 나와 전철이든 버스든 타러 갔을 것 같은 우리를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고 했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고 가려다가 혹시나 와이파이를 잡으러 돌아다니지 않을까 싶어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에서 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왕신부와 나는 중학교 동창이었고 심지어 나름대로 소울메이트였다. 일산 신도시로 막 전학을 와서 모든 것이 낯설었던 중학교 2학년 때, 아직 성당이 들어서지도 않아 바람 부는 허허벌판 흙바닥에서 미사보를 턱밑에 동여매고 미사를 드리던 그때, 함께 바람을 맞으며 저쪽 건너에 앉아있던 같은 반 남자아이가 바로 왕신부였다. 지금은 무슨 부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 같은 부서도 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일주일 내내 학교에서 얼굴을 보고 주일에 성당에서도 재밌는 무언가들을 함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둘 다 좀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다른 친구들 노는 모양새를 영 유치하다 여기며 둘이서 속닥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왕신부가 전교회장을 하고 내가 학급 부반장을 하면서 이런저런 학교 일을 함께하느라 또 내내 붙어 다녔다. 오죽하면 선생님들이 우리를 실, 바늘이라 부르며 뭐든 함께 시키셨을까. 행여 교무실에 혼자 내려갈라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둘이 싸운 것은 아닌지 물으시는 게 당연했고 학교 축제 때도 전교 부회장 대신 내가 왕신부와 사회를 보게 하시기도 했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에는 조금 뜸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성당 친구들과 더불어 학교 친구들보다 더 가깝게 어울려 놀고 뭐든 함께 했었다.
왕신부는 처음 만났던 그때 이미 '시골의 작은 성당 신부님'이 되는 게 꿈이라고 자기소개를 했었더랬고 내가 결혼하던 그 해에 신부님이 되어 14년 만에 우리 동네를, 내 곁을 떠나 여기 로마까지 오게 되었다.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 나를 가장 많이 알고 가장 많은 추억을 함께하는 친구. 그래 우리는 그런 친구였다.
그 끈끈함이 우리를 이끌어주었던 것일까. 정말 기적처럼 우리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기약 없이 만나게 되었다.
인연이란 보이지 않는 끈으로 평생 동안 이어지는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끈이 더 두껍고 강해져 어디서든 함께할 수 있게 되는 모양이다.
이제는 지난번 로마에 왔을 때처럼 왕신부 뒤만 졸졸 쫓아다니면 되었다. 이번엔 남편도 함께.
우리는 생략이 전혀 없이 이어지는 만만치 않은 로마의 성금요일 예식을 함께 드리고는 늦은 시간까지 회포를 풀었다. 이제 로마는 나에게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