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
로마에서는 그간 줄여놓은 배꼴을 실컷 늘렸다. 아침 먹고 카메라 충전기와 문구류를 좀 사러 돌아다니고는 여유롭게 차를 한 잔 마시고 점심을 또 푸지게 먹었다. 잠시 숙소에 돌아와 오침을 하고는 또 나가 저녁을 먹었다.
남편이나 나나 로마에 온 것은 순전히 왕신부를 만나기 위함이었던 지라, 게다가 나는 말도 안 되게 세 번째 로마 방문인지라 둘러보고 싶은 관광명소는 더 이상 없었다. 스무 살 어린 시절, 처음 로마에 왔을 때만 해도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고 심지어 7개월 전, 두 번째 방문에서도 지금 내가 여기에 또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겠거니 하지만 또 아는가? 언젠가 로마에 또 오게 될지.
인생이 두렵고도 희망적인 것은 이런 예측 불가함 때문이겠지. 그러니 나쁜 일이 생길까 봐 주저하는 것도 어리석고, 모든 것을 계획해놓으려고 하는 것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준비하고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은 후하게 쳐봐야 삼 할 남짓이면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칠 할은 흘러가는 대로 맡기는 것이 최선인 듯 싶다.
로마는 부활절을 맞아 매우 붐볐으나 우리 세 사람만을 감싸는 공기 안에서 우리는 무척이나 오붓하고 즐거웠다. 우리 모두 열심히 달리다가 마주친 벽 앞에 멀뚱히 서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 벽을 넘을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끝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의심하고 채근하고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삼십 년 넘게 좀 살아봤다고 벽 앞에 철퍼덕 앉아 술 한 잔 기울일 여유는 부릴 줄 알았다. 혹시 아는가? 힘겹게 넘어선 벽 뒤에는 아무도 없고 혼자서 외로이 걸어야 할 좁은 길만 있을지. 최소한 지금, 여기엔 각자 마음속에서 벌이고 있는 치열한 투쟁을 응원해주고 위로해주며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들이 함께 있지 않은가.
작년 봄, '감사하게도' 유행성 눈병에 걸려 일주일의 휴가를 얻은 일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을 하다 보니 병의 경중보다는 전염성의 여부가 더 중요한 '덕'에 아프지도 않으면서 쉬게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정신이 혼미해져서는 정처 없이 돌아다녔더랬다. 집 근처에 있으면서도 해가 나 있는 동안에는 쉽게 갈 수 없었던 호수공원을 걸으며 무척이나 행복했더랬다. 그때, 하늘로 높이 솟은 메타세콰이어들을 보면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었다. 신도시가 처음 생겼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그 자리에서 점점 자라나 큰 숲이 된 것이었다.
한참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차서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나고 악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호의호식하는 것에 배알이 뒤틀려 억울해하던 때였다. 마음이 힘들던 그때, 높이 솟은 나무들을 보면서, 시간이 공들여 키워낸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당당해 보여서 큰 위로가 되었었다. 정말 중요한 가치는 권력이나 착취, 투쟁 따위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직 '시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이었다. 씨앗을 뿌리고 지켜내고 '기다려야'하는 것이었다. 모든 생명체에 부여된 그 평등함과 보편성이 위로가 되었고 그 정직하고 분명한 결과물에 희망을 얻었었다. 내가 무엇에 마음을 쏟고 무엇을 일궈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 밤, 22년의 시간이 내게 내어준 달콤한 과실. 내 친구와 보내는 행복함으로 로마에서의 부활을 맞는 것이 내가 마음을 쏟아야 할 전부였다. 달빛이 머리 위까지 내려앉은 밤, 곳곳에서 거행되는 부활 전야 미사로 온 도시가 불을 밝힌 그 밤의 공기는 무척이나 푸근했다.